김제 벽골제 / 한국관광콘텐츠랩-강시몬 |
전북 김제 들판 한가운데에는 흙으로 쌓은 긴 둑이 남아 있는데, 서기 330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된 벽골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수리 시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며, 삼국사기는 백제 비류왕 27년에 이 둑을 쌓았다고 적어 두었다.
17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길게 이어진 흙둑과 돌기둥 몇 개가 전부라, 처음 온 사람은 여기가 무엇을 보러 오는 곳인지 잠시 헤매게 된다.
그런데 이 밋밋해 보이는 둑 하나에 물을 다스리던 옛 기술과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학계의 논쟁이 함께 얹혀 있어, 알고 보면 들판 풍경이 달라 보인다.
돌기둥 넷만 남은 다섯 개의 수문
김제 벽골제 / 한국관광콘텐츠랩-강시몬 |
벽골제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다섯 개의 물길이 나 있었고, 각각 수여거와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둑에 구멍을 내어 물을 빼는 자리를 이렇게 다섯 군데나 두었다는 것은 물의 양을 세밀하게 조절했다는 뜻이다.
지금 남은 것은 그중 장생거와 경장거의 돌기둥뿐이다. 수문을 여닫는 나무판을 세워 끼우던 기둥으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돌덩이가 짝을 이뤄 들판에 박혀 있다.
기둥 사이의 폭과 홈의 깊이를 보면 나무판이 얼마나 두꺼웠을지, 물이 얼마나 세게 밀었을지가 어렴풋이 그려진다.
조선 태종 때 한 차례 크게 손을 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무너졌고, 그 뒤로는 둑 자리에 논이 들어서면서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김제 벽골제 / 한국관광콘텐츠랩-강시몬 |
이 시설을 두고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의견이 갈려 왔다. 강물을 가둔 저수지였다는 쪽과, 바닷물이 밀려드는 것을 막던 방조제였다는 쪽이 각각 근거를 대고 있다.
김제 일대가 지금은 내륙처럼 보이지만 예전에는 바닷물이 훨씬 안쪽까지 들어왔다는 점이 방조제설의 바탕이고, 다섯 개 수문의 배치와 물길 방향은 저수지설의 근거로 쓰인다.
어느 쪽이든 이 둑이 서기 330년에 쌓였다면 그때 이미 수천 명을 동원해 흙을 나르고 물길을 계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논쟁 자체보다 그 사실이 더 놀랍다.
단야가 대신 뛰어들었다는 이야기
김제 벽골제 / 한국관광콘텐츠랩-강시몬 |
이 둑에는 오래된 설화가 하나 붙어 있는데, 신라 원성왕 때 벽골제를 고치던 시절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공사를 맡은 기술자 원덕랑과 태수의 딸 단야, 그리고 원덕랑의 고향 약혼녀 월내가 등장한다.
둑이 자꾸 무너지자 사람들은 용신에게 사람을 바쳐야 한다고 했고, 태수는 딸이 마음에 둔 원덕랑을 붙잡아 두려고 월내를 제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단야가 월내를 대신해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김제 벽골제 / 한국관광콘텐츠랩-강시몬 |
물을 다루는 공사에는 어느 나라에나 비슷한 전설이 따라붙지만, 이 이야기가 남달리 오래 살아남은 것은 김제 사람들이 이를 놀이로 만들어 이어 왔기 때문이다.
197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간 벽골제 쌍룡놀이가 그것이고, 같은 해 전라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형태가 굳어졌다.
김제 벽골제 / 한국관광콘텐츠랩-강시몬 |
여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실제로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는 둑 옆의 연꽃단지다. 논을 그대로 활용해 조성한 넓은 밭이라 홍련과 백련이 사람 키 높이까지 올라와 시야를 덮는다.
연꽃은 아침에 벌어졌다가 한낮이 지나면 오므라들기 시작하므로, 꽃이 활짝 열린 모습을 보려면 오전에 도착하는 편이 낫다.
김제 들판은 산이 시야를 가로막지 않아 하늘과 땅이 맞닿는 선이 그대로 보이는 몇 안 되는 곳인데, 해마다 가을이면 이 지평선을 내세운 축제가 벽골제 일대에서 열린다. 연꽃이 지고 벼가 누렇게 익을 무렵 다시 오면 같은 자리에서 전혀 다른 색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