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매출 100억 원의 광고회사 CEO 박동훈 대표는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화번호를 지우고 경제적 지원을 완전히 중단했습니다.
- 배움의 과정은 부모가 끝까지 책임지되, 학업이 끝난 후에는 부모와 자식이 평등하고 독립된 인격체로 서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 지리산 자락의 극심한 가난과 야간 비닐하우스 생활을 견뎌내며 자수성가한 그의 삶은 진정한 자립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연매출 100억 원의 광고회사를 일군 자수성가 CEO가 대학을 졸업한 딸들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경제적 지원을 완전히 끊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신분이 되는 시대에, 그는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박동훈 대표는 배움의 기회는 부모가 책임지되 학업이 끝나면 한 명의 독립된 사회인이자 ‘좋은 친구’로 남아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대학 졸업을 기점으로 부모 자식의 의존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의 삶을 응원하게 된 특별한 교육 철학.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자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자수성가 CEO
박동훈 대표는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핸드폰에 저장된 자녀들의 연락처를 망설임 없이 삭제했습니다. 단순히 금전적 지원을 끊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부모라는 권위와 의존 관계 자체를 정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배움의 과정은 끝까지 책임지겠지만, 졸업 후에는 아빠가 아닌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엄격한 원칙 뒤에는 자녀를 향한 깊은 애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자녀의 안전이 걱정된 박 대표는 회사 경영지원실장을 통해 겨우 딸의 연락처를 받아 “너 거기 있는 거 아니지?”라는 짧은 문자를 남겼습니다. 다행히 안전하다는 답장을 받고 나서야 시름을 놓았던 그는, 냉정한 원칙 속에서도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부모 자식 간의 따뜻한 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딸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었던 순간이 부모 자식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독립과 책임을 선언한 ‘전화번호 삭제’가 던지는 화두
오늘날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성인 이후 삶까지 좌우하는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자녀의 자립 시기는 갈수록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박동훈 대표의 결단은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가 강조하는 핵심은 부모의 재산이 자녀의 태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자녀를 온전한 자립 개체로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유산이라는 그의 믿음은, 과잉보호에 익숙해진 현대 사회에 강렬한 경종을 울립니다.
어린 시절 서울로 홀로 상경해 어머니를 찾아 헤맸던 고단한 기억이 지금의 자수성가 정신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유년 시절의 가난과 배움에 대한 한이 만든 독특한 교육 철학
박 대표가 이토록 확고한 자립 철학을 갖게 된 배경에는 눈물겨운 유년 시절이 있었습니다. 경남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어린 시절, 그는 하루 한 끼조차 먹기 힘들어 부잣집 대청마루 밑으로 들어가 숭늉에 가라앉은 누룽지를 몰래 긁어먹으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만난 어머니는 홍제동 시장에서 호떡 장사를 하고 계셨고, 첫날밤은 버스 종점 화장실 옆 리어카 위에 음박지를 깔고 보냈습니다. 이후 오금동 알로에 농장의 비닐하우스 한 칸을 빌려 물을 주는 조건으로 겨우 거처를 마련했던 그는, 자투리 가구를 수리해 자신만의 방을 꾸미며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어려웠던 과거를 딛고 일어선 박동훈 대표가 경영하는 브랜드의 제품이 화면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예술고등학교에 편입했지만, 비싼 재료비와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자퇴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속상해할까 봐 매일 아침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섰던 그는 막노동과 냉마주이를 전전하면서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이후 디자인 회사에 입사해 자신이 그린 작품을 사장 책상 위에 계속 올리며 기회를 포착했고, 결국 실력을 인정받아 34세의 나이에 창업에 성공해 연매출 100억 원의 기업을 일구어냈습니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은 오늘날 그가 세운 자립 중심의 교육 철학을 만드는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실제 삶과 관계에서 무엇이 달라지나
스스로 가난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뤄낸 박동훈 대표의 경험은 자녀 교육관에 그대로 투영되었습니다. 자신이 배우지 못했던 한이 있었기에 자녀들의 학업만큼은 한계 없이 지원했지만, 배움이 끝난 후에는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것입니다.
현재 그의 큰딸은 오사카에서, 둘째 딸은 LA의 패션 회사에서 자신의 힘으로 당당히 삶을 일궈가고 있습니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역량으로 사회에 뿌리내린 자녀들은 이제 부모에게 의존하는 자식이 아닌, 삶의 궤적을 공유하는 ‘독립된 인격체’이자 ‘좋은 친구’로 박 대표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보낸 잊을 수 없는 첫 하룻밤의 기억이 현재 자립을 강조하는 가치관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자립과 연결 사이에서 찾아가는 새로운 가족의 거리
박동훈 대표의 삶은 성공한 CEO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40년간 터전으로 삼았던 충무로 일대에 버려진 육교 밑과 자투리땅을 활용해 7개의 길거리 미술관을 조성하고, 38억 원의 사재를 쏟아부으며 시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을 선물했습니다. 자신이 거둔 결실을 사회와 나누는 그의 행보는 참된 부모의 역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리더로서의 귀감이 됩니다.
경제적 지원을 끊고 전화번호를 지우는 파격적인 방식이 모든 가족에게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진정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당당하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부모 역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완성해 가는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FAQ
박동훈 대표가 자녀들의 전화번호를 지운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학 졸업 때까지는 부모로서 배움의 과정을 완벽히 책임지되, 학업이 끝난 이후에는 경제적 의존 관계를 청산하고 스스로 자립한 성인 대 성인, 즉 '좋은 친구' 관계로 재정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동훈 대표는 유년 시절 어떤 어려움을 겪었나요?
지리산 자락에서 외할머니와 살며 누룽지 물로 배를 채울 만큼 가난했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버스 종점 화장실 옆 리어카와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했습니다.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학비 때문에 자퇴한 후 막노동을 하며 독학으로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충무로 길거리 미술관 사재 출연은 어떤 내용인가요?
박동훈 대표는 40년 동안 터전이 되어준 충무로에 대한 애정으로, 버려진 육교 아래와 자투리땅 등 7곳에 길거리 미술관을 조성하는 데 개인 자금 38억 원을 투입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