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지로 세운상가에 위치한 1967년생 1세대 주상복합 아파트를 매입해 예술적인 주거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 기둥과 보가 지탱하는 옛 건축 구조 덕분에 천장 속 숨은 1m를 찾아냈고, 가변형 벽과 조명 연출로 10평 공간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철거되는 현대 아파트 문화 속에서, 오래된 공간에 정성을 담아 100년 가옥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서울 을지로 한복판, 1967년에 지어진 대한민국 1세대 주상복합 아파트를 고쳐 자신들만의 '백년 가옥'으로 만든 부부가 있습니다. 빈티지 가구 수집가인 이들은 단 10평에 불과한 노후 아파트를 허무는 대신, 숨겨진 1m의 천장을 발굴하고 벽을 움직이는 마법 같은 인테리어로 예술적 살롱을 탄생시켰습니다. 30년만 지나면 부수고 새로 짓는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이들의 도전은 공동주택도 시간의 정성이 쌓이면 위대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1967년생 최고급 아파트, 을지로에서 다시 깨어나다
젊은이들에게 '힙지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활기가 넘치는 서울 중구 을지로. 그 골목 한편에는 홍콩의 고즈넉한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상가 건물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바로 한국 건축의 거장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세운상가군입니다. 이 상가 건물의 7번째 건축물 위에는 무려 1967년에 지어진 대한민국 1세대 주상복합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 건축의 거장 김수근이 설계한 대한민국 1세대 주상복합 아파트의 모습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이곳은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정치인, 연예인, 대기업 임원들이 모여 살던 당대 최고의 타워팰리스급 고급 주거지였습니다. 복도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작동해 주던 직원까지 따로 있었다니 그 화려함이 짐작 가시나요? 세월의 흐름 속에 낡고 잊히던 이 상징적인 공간에, 오래된 것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부부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바로 빈티지 가구를 수집하는 권용식, 변재희 부부입니다. 이들에게 6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를 고치는 일은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묻혀 있던 유물을 발굴하는 설레는 작업이었습니다.
30년이면 부수는 나라에서 '100년 가옥'을 외치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라고 하면 보통 30년, 길어야 40년이 지나면 재건축 대상이 되어 헐려 나가는 고단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정말 콘크리트의 수명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걸까요? 놀랍게도 콘크리트의 실제 물리적 수명은 100년이 넘는답니다. 단지 우리가 더 넓고, 더 새것을 빠르게 얻기 위해 너무도 조급하게 허물고 있을 뿐이지요.
부부는 이 오래된 아파트를 고치며 공동주택도 얼마든지 100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가는 '백년 가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과거 우리가 북촌 한옥마을을 허물지 않고 지켜내어 오늘날 서울의 위대한 문화 자산으로 남긴 것처럼, 1세대 주상복합 아파트 역시 서울의 역사와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리모델링은 단순한 주거 개선을 넘어, 한국의 획일화된 부동산 소비 문화에 정면으로 던지는 아름다운 질문입니다.
천장 속 숨겨진 1미터와 움직이는 벽의 비밀
부부가 매입한 아파트의 면적은 약 33제곱미터, 즉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혀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 웅장함이 펼쳐집니다. 그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높은 층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존보다 더 넓고 효율적인 주거 공간을 창조해냈습니다.
첫 번째 비밀은 바로 '천장'에 있었습니다. 인테리어 전문가였던 아내의 과감한 결단으로 천장을 뜯어내자, 무려 1m에 달하는 거대한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이 공간을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 스프링클러 배관을 위로 올리느라 건물 7층 전체의 물을 다 빼야 하는 대공사를 치러야 했지만, 그 수고는 충분히 값진 결실로 돌아왔습니다. 부부는 높아진 층고를 활용해 아늑한 다락방 같은 복층 침실을 만들었고, 세운상가의 기술자에게 의뢰해 제작한 6mm 두께의 철제 수납장을 계단 삼아 올라가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두 번째 비밀은 '라멘(Rahmen) 구조'에 있습니다. 벽 자체가 건물을 지탱하는 요즘의 벽식 아파트와 달리, 옛날 아파트들은 튼튼한 기둥과 보가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덕분에 내부 벽을 마음대로 허물거나 움직일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부부는 이 점을 활용해 미닫이문과 여닫이문 두 개만으로 공간의 구획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트랜스포머형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문을 닫으면 프라이빗한 침실이 되고, 문을 열면 넓은 복도와 거실이 하나로 연결되는 마법 같은 공간 분할입니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치한 이동식 벽은 필요에 따라 침실을 가려주거나 열린 공간으로 변신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묘수가 더해집니다. 바로 물리적인 벽 대신 '조명'을 활용해 공간의 경계를 나누는 것입니다. 조명이 비추는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대비를 극명하게 주어, 마치 소극장의 무대처럼 지금 사용하는 공간만을 돋보이게 만드는 연출입니다. 굳이 답답하게 벽을 세우지 않아도, 빛의 경계가 훌륭한 벽의 역할을 대신해 줍니다.
10평 공간에 피어난 예술가들의 살롱 문화
부부의 집 안은 그야말로 작은 가구 박물관을 방불케 합니다. 세계적인 가구 디자이너 한스 웨그너의 1960년대 초반 식탁부터, 잉그베 엑스트롬의 우아한 확장형 테이블까지, 오랜 시간의 결을 품은 미드 센츄리 모던 가구들이 청록색 벽면과 테라코타 타일 바닥 위에 조화롭게 놓여 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물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가치를 발한다는 부부의 철학이 공간 전체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이 아름다운 공간은 부부만을 위한 쉼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곳을 '충무로 살롱'이라 부르며, 다국적의 지인들과 예술가들을 초대해 음악을 듣고 인생을 논하는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해외 여행길에서 자신들에게 기꺼이 집을 내어주었던 외국 친구들의 따뜻한 정을 기억하며,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특별한 공간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의 진짜 깊은 속살을 보려면 경복궁 대신 충무로 살롱으로 가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도시의 시간과 풍경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의 오래된 골목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사라지고 위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부부는 없어질지도 모르는 서울의 마지막 풍경을 이곳에서 온몸으로 붙잡고 즐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50년대, 60년대, 70년대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이 낯설고도 매력적인 도시의 레이어는, 한 번 허물면 결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값진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쉽고 빠르게 새것을 올리는 세상 속에서, 60년 된 아파트의 뼈대를 존중하며 정성스레 고쳐 쓴 부부의 삶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파트도 충분히 백 년 가는 가옥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일상도 공간에 쌓이는 시간만큼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오늘 밤, 여러분이 머무는 그 공간에는 어떤 시간의 정성과 철학이 쌓여가고 있나요?
FAQ
이 아파트는 어떤 구조이길래 리모델링이 이토록 자유로웠나요?
요즘 아파트들은 벽이 건물을 지탱하는 '벽식 구조'로 지어지지만, 1960년대 지어진 이 아파트는 기둥과 보가 하중을 지탱하는 '라멘(Rahmen)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덕분에 내부 벽을 허물거나 공간을 자유롭게 나누는 구조 변경이 훨씬 용이했습니다.
천장을 뜯어내며 진행한 대공사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천장을 뜯어내어 무려 1m의 숨겨진 높이를 확보했지만, 그 공간에 있던 배관과 스프링클러를 위로 올리는 까다로운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스프링클러 배관 공사를 위해 건물 7층 전체의 물을 모두 빼야 하는 대공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좁은 10평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부부가 도입한 인테리어 팁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고정된 벽 대신 필요에 따라 여닫고 밀 수 있는 '가변형 미닫이문'을 설치해 공간의 구획을 자유롭게 바꿨습니다. 둘째로 물리적인 벽 대신 '조명'의 밝고 어두운 대비를 활용해 공간의 경계를 나누는 소극장 무대 같은 연출을 시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