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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와 몽골의 30년 전쟁은 정권의 정당성 결여가 국가 안보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입니다.
  • 최씨 무신정권은 쿠데타로 잡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정예병을 사병으로 묶어두고, 백성들을 방치한 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 국가의 버림을 받은 상황에서도 처인성과 충주성의 민초들은 스스로 힘을 합쳐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격퇴하며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고려와 몽골의 30년 전쟁. 흔히 우리는 이를 '위대한 대몽항쟁'으로 기억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정당성 없는 쿠데타 정권이 정권 안보를 위해 국가 안보와 백성을 희생시킨 지극히 '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정당성 없는 정권이 초래한 안보의 공백과 그 속에서 스스로 일어선 민초들의 투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습니다.

고려와 몽골의 30년 전쟁, 그 '이상한 전쟁'의 시작

동아시아의 패권이 급격히 재편되던 13세기 초,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던 몽골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한반도로 몰려왔습니다. 발단은 1225년,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던 몽골 사신 저고여 일행이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된 사건이었습니다. 몽골은 즉각 국교를 단절했고, 고려에게는 전례 없는 위기가 닥쳤죠.

그런데 고려 조정의 대응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강대국의 사신이 피살되는 중대 사건이 터졌음에도 고려는 무려 6년 동안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시 몽골의 칭기즈칸이 서아시아 원정과 서하 정복 전쟁에 집중하느라 고려에 군사 행동을 하지 못했던 것뿐인데, 고려 조정은 이를 그저 방심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결국 1231년 8월, 서방 원정을 마친 몽골군의 선봉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고려는 눈물나게 고단한 전쟁의 서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권의 정당성과 국가 안보의 숨겨진 연결고리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고려의 대응은 과거 거란의 침입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무기력했습니다. 거란 침입 당시에는 당일에 요격군을 보내 예봉을 꺾었던 고려가, 몽골의 침입 때는 의주성이 당일에 함락되고 황해도까지 적이 들이닥친 9월 중순이 되어서야 겨우 개경에서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고려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이상한 대응의 핵심에는 바로 정통성 없는 쿠데타 정권인 최씨 무신정권이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의 정점에는 왕이 아닌, 어떠한 공식 직함도 없이 오로지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최우(최이)가 있었습니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국가 안보에 더 유능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대의명분 및 정당성이라는 '소프트 파워'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은 내부의 배신과 또 다른 쿠데타를 두려워한 나머지, 나라를 지켜야 할 힘을 오직 정권 자체를 지키는 데만 쏟아부었습니다.

정권 안보를 위해 국가 안보를 포기한 최씨 무신정권

최씨 무신정권의 안보 포기는 그야말로 철저했습니다. 최우의 아버지 최충헌 시절부터 전방의 장수들이 적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리면, 오히려 정권을 흔들려는 음모라며 장수들을 처벌하기 일쑤였습니다. 이 때문에 장수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적이 성을 점령하고 백성들을 도륙한 후에야 겨우 보고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복장을 한 남성이 실내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

강화도 천도라는 무리한 결정을 강행하며 독재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최씨 무신정권의 단면입니다.


더욱이 이들은 쓸 만한 정예병들을 모두 자신들의 사병(호위병)으로 삼아 개경의 호화로운 저택에 묶어두고, 전선에는 허약한 노약자들 위주의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결국 첫 전투인 안북성 전투에서 참패한 최우는 몽골군과 정면 대결을 피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결정을 내립니다. 바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강화도 천도'였습니다. 넓은 뻘과 거센 물살 덕분에 몽골군이 쉽게 건너지 못하면서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을 걷기 좋은 조운망의 요충지였던 강화도는 귀족들에게는 호의호식하기에 정말 안성맞춤인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육지에 남겨진 백성들은 온전히 몽골군의 칼날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버림받은 강토에서 스스로 일어선 이름 없는 민초들의 투쟁

국가는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고단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깊은 산속이나 먼 섬으로 피난하라는 대책 없는 지시만 내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척박하고 깊은 산속에서 백성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강화도의 귀족들이 안전한 섬 안에서 "오랑캐가 사납다 한들 이 물을 어찌 건너랴"라며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동안, 육지의 민초들은 온몸으로 전쟁의 참화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고려 시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돌로 쌓은 성벽 위에 일렬로 서서 경계 근무를 서는 모습

지배층이 도망친 자리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선 민초들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입니다.


그럼에도 나라를 지켜낸 것은 국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습니다. 1232년 12월, 경기도 용인의 작은 토성인 처인성에서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었던 처인 부곡의 천민들과 승려 김윤후가 힘을 합쳐 몽골군 최고 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하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또한 충주성 전투에서는 양반들이 모두 도망쳐버린 성을 노비들로 구성된 노군별초가 끝까지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30년 대몽항쟁의 실체는 지배층의 찬란한 투쟁이 아니라, 스스로의 터전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구슬땀과 피눈물을 흘린 민초들의 헌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 진정한 국가 생존 전략과 정당성의 가치

최씨 무신정권이 몽골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20년 넘게 질질 끌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몽골과 타협하여 왕정으로 복귀하는 순간, 자신들의 무신 정권이 설 자리를 잃고 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즉, 항복을 하고 싶어도 정권의 안위를 위해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죠. 결국 이들의 임시변통식 대응은 몽골군이 서해안을 봉쇄하여 강화도로 들어오는 세금을 끊어버리자마자 무너졌고, 최씨 정권의 마지막 권력자 최의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백성의 안위와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장기 항전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30년 동안 전화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정당성 없이 힘으로만 유지되는 비정상적인 정권은 위기 상황에서 국가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가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려와 몽골의 이 비극적인 전쟁을 통해 뼈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국가의 정당성과 책임감 있는 리더십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역사라는 거울은 여전히 따뜻하면서도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FAQ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요?

몽골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해 거센 물살과 뻘로 둘러싸인 강화도를 천혜의 요새로 삼고, 동시에 삼남 지방에서 걷히는 세금(세곡)을 조운망을 통해 원활하게 확보하여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려의 정예병들이 전선에 배치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최씨 무신정권은 정당성이 부족하여 늘 내부 반란과 정변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을 지켜줄 최정예 병력들을 사병(호위병)으로 삼아 개경과 강화도의 사저에 배치해 두었고, 전방에는 노약자 위주의 약한 군대만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국가와 지배층이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친 상황에서도, 사회 최하층이었던 부곡민(천민)과 노비들이 스스로 힘을 합쳐 세계 최강의 몽골군 사령관을 사살하고 성을 지켜내며 나라의 자주성을 수호한 민초 중심의 대몽항쟁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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