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천대받으며 버려지던 '물턴벙이' 아귀는 오늘날 바닷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미식가들을 사로잡는 귀한 겨울철 별미로 재탄생했습니다.
- 부산 기장 어부들은 해파리 침공과 고단한 조업 환경 속에서도 '하루 한 번 투망'이라는 자발적 규칙을 지키며 바다와의 지속 가능한 공존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 3대째 이어져 온 마산의 전통 건아귀찜과 배 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신선한 아귀 회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빚어낸 따뜻한 위로의 음식입니다.

※ 이 포스트는 2021년 10월 27일에 방송된 <바닷가 사람들 - 못난이의 반란! 아귀잡이>의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부산 기장의 대변항은 그야말로 새로운 활기로 들썩입니다. 봄날의 분주했던 멸치잡이가 지나간 자리에, 이제는 겨울 바다의 숨은 주인공인 아귀를 찾아 나서는 배들이 새벽 어둠을 가르며 출항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잡히는 족족 버려지거나 다른 생선을 사면 덤으로 끼워주던 천덕꾸러기 아귀가, 오늘날에는 겨울철 식탁을 풍성하게 채우는 최고의 별미이자 어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귀한 보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못생긴 외모 뒤에 숨겨진 쫄깃하고 담백한 맛, 그리고 그 맛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는 바닷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금 바다에선 무슨 일이
초겨울로 접어들면서 부산 기장 앞바다는 아귀를 잡기 위한 어선들로 분주해집니다. 수심 깊은 곳에 머물던 아귀들이 겨울철 먹이인 청어를 쫓아 연안으로 이동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35년 베테랑 김진호 선장을 비롯한 어부들은 매일 새벽 조류의 흐름에 맞춰 배를 띄웁니다. 하지만 최근 바다의 표정은 마냥 너그럽지만은 않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수온 상승으로 인해, 원래는 사라졌어야 할 해파리 떼가 늦가을을 넘어 무려 11월까지 바다를 점령하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입니다.
해파리 떼로 인해 그물이 훼손되고 조업에 어려움을 겪는 어민들의 고충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물 가득 아귀 대신 독성을 품은 해파리가 엉켜 올라올 때면 조업은 그야말로 비상 상황이 됩니다. 해파리는 무거운 무게로 그물을 찢어놓을 뿐만 아니라, 어부들의 살결에 닿아 심각한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아귀를 낚아 올려야 할 귀한 시간에 해파리를 일일이 떼어내느라 조업 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지고, 어부들의 손길은 더욱 고단해집니다. 자연의 변화가 가져온 이 예기치 못한 불청객 때문에 겨울 바다의 첫걸음은 한층 더 무겁고 치열해졌습니다.
천대받던 '물텀벙이'의 귀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아귀찜의 주인공인 아귀는, 사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그물에 걸리면 재수 없다며 바다로 다시 던져버리던 고기였습니다. 물에 빠질 때 '텀벙' 소리가 난다고 해서 '물텀벙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죠. 워낙 못생긴 데다 살이 흐물흐물해 먹을 것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출처] EBSDocumentary (EBS 다큐) 제공
그러나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 마산의 한 할머니가 우연히 벽에 걸려 말라비틀어진 아귀를 가져다 된장 육수에 콩나물과 고춧가루를 넣고 쪄내면서 아귀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흉측하게만 보였던 커다란 입과 물컹한 살은 꾸덕꾸덕하게 마르면서 그 어떤 생선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쫄깃함과 짙은 감칠맛을 품게 된 것입니다. 천대받던 존재가 정성과 아이디어를 만나 세상에 둘도 없는 위로의 음식으로 거듭난 순간이었습니다.
아귀를 지켜내기 위한 바다의 사투와 '자연의 법칙'
아귀를 온전히 육지까지 살려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시간 및 온도와의 싸움입니다. 아귀는 성질이 급하고 수온 변화에 극도로 민감하여, 잡자마자 어창의 온도를 아귀가 가장 좋아하는 10도에서 11도 사이로 정확하게 맞춰주어야만 활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금방 상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아귀를 잡는 부산 지역만의 독특한 어업 방식입니다.
이러한 기술적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다의 순리를 따르는 어부들의 철학입니다. 기장 연안의 아귀잡이 어부들은 아무리 고기가 많이 나더라도 '하루에 딱 한 번만 그물을 내린다'는 철칙을 스스로 지켜가고 있습니다. 또한 어족 자원 보호를 위해 일정 크기 이하의 어린 아귀는 망설임 없이 바다로 돌려보냅니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내일의 바다를 먼저 생각하는 불편한 여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매년 겨울 맛있는 아귀를 대접받을 수 있는 진짜 비결이 아닐까요?
마산 건아귀찜부터 선상 회까지, 아귀가 바꾼 삶의 풍경
아귀가 귀한 대접을 받게 되면서 사람들의 삶도 함께 피어났습니다. 마산 오시장에서 50년간 아귀를 손질해 아들 삼 형제를 키워낸 김옥순 여사의 삶이 그러하고,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3대째 뚝심 있게 전통 마산식 건아귀찜을 빚어내는 식당의 풍경이 그러합니다. 마산의 아귀찜은 다른 지역과 달리, 바짝 말린 건아귀를 사용하고 소금 대신 재래된장으로 간을 맞춰 깊고 구수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귀 요리의 명성이 시작된 마산 오동동 거리는 오늘날 지역을 대표하는 미식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반면, 조업을 마친 차가운 배 위에서는 오직 뱃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 즉 '아귀회'가 펼쳐집니다. 잡자마자 상하기 시작하는 특성 때문에 육지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귀한 별미입니다. 꼬리 부분의 두툼한 살점을 썰어 입에 넣으면, 쫀득쫀득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씹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이 달콤한 선상 만찬은 어부들에게 단순한 음식을 넘어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위로가 됩니다.
아귀회는 어부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맛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바다의 미래
한때 버려지던 아귀는 이제 수많은 이들의 인생과 추억을 담은 따뜻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고마운 바다의 선물을 오래도록 곁에 두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급격한 기후 변화와 수온 상승은 해파리의 습격처럼 바다의 생태계를 끊임없이 뒤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주는 만큼만 받고 욕심내지 않겠다는 어부들의 말처럼, 결국 해답은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바다를 지켜내려는 우리의 태도에 있을 것입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날, 매콤하고 정성 가득한 아귀찜 한 접시를 마주할 때 그 속에 담긴 바닷가 사람들의 땀방울과 푸른 바다의 묵묵한 헌신을 한번쯤 마음 깊이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FAQ
아귀를 왜 과거에는 '물턴벙이'라고 불렀나요?
과거에는 아귀의 생김새가 못생기고 살이 물컹하여 식재료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물에 걸리면 바로 바다로 던져버렸는데, 이때 물에 떨어지며 '턴벙' 소리가 난다고 하여 '물턴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마산식 아귀찜과 일반 아귀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일반 아귀찜은 주로 생아귀를 사용하여 부드러운 식감을 내는 반면, 전통 마산식 아귀찜은 차가운 해풍에 보름 이상 바짝 말린 '건아귀'를 물에 불려 사용하여 꼬들꼬들하고 쫄깃한 식감을 냅니다. 또한 양념에 재래된장을 풀어 구수하고 깊은 맛을 더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귀 회는 왜 육지에서 먹기 힘든가요?
아귀는 잡히자마자 부패와 변질이 매우 빠르게 시작되는 예민한 생선입니다. 수온 변화에도 민감하여 활어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갓 잡은 신선한 상태에서만 먹을 수 있는 아귀 회는 배 위의 어부들이나 조업 직후의 선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별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