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유럽 전역이 40도를 넘나드는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리고 있지만, 가정 내 에어컨 보급률은 여전히 20%를 밑돌고 있습니다.
- 건물 미관을 중시하는 까다로운 규제, 이웃의 동의 절차, 두꺼운 돌벽 시공 난이도로 인해 에어컨 설치비가 한국의 3~4배인 최대 1천만 원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 폭염으로 인한 생존 위협과 전력망 과부하, 환경 보호라는 가치가 충돌하면서 에어컨 확충 문제는 단순한 가전제품을 넘어 유럽 내 뜨거운 정치·사회적 논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올여름 프랑스 파리나 동유럽으로 여행을 계획하셨다가 취소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최근 유럽 전역이 그야말로 펄펄 끓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기온이 43~44도까지 치솟았고, 비교적 선선했던 체코나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들도 사상 처음으로 40도를 넘겼습니다.
이런 살인적인 폭염 속에서 매년 유럽에서만 2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했던 건, 유럽의 에어컨 보급률이 채 20%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80~90%에 달하는 미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심지어 중동이나 중남미보다도 낮은 수치죠.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들이 모여 있는 유럽은 왜 이렇게 에어컨 없이 쪄죽는 길을 택하고 있는 걸까요? 오늘은 그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사연을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40도 폭염의 습격과 옥탑방의 몰락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실 유럽은 원래 이렇게 더운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파리만 해도 서울보다 위도가 훨씬 높고, 편서풍의 영향으로 바다의 찬 공기가 자연 에어컨 역할을 해왔거든요. 한여름 낮에도 25도에서 30도 사이, 밤에는 15도까지 떨어져 선선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오메가 블록'이라는 기상 현상이 유럽 상공에 형성되면서,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열풍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버렸습니다. 재밌는 건 기온 상승의 역설적인 원인 중 하나입니다. 1980년대부터 유럽이 대기 오염을 줄이겠다며 강력한 환경 규제를 도입했는데, 그 결과 공기 중의 미세먼지(에어로졸)가 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이 에어로졸이 구름처럼 빛을 반사해 줬는데, 공기가 너무 깨끗해지니 태양열이 그대로 지표면에 내리꽂히면서 유럽이 다른 대륙보다 2배나 빠른 속도로 더워졌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신호등이 녹아내릴 만큼 유럽 전역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럽인들의 삶의 방식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아파트 꼭대기에는 우리로 치면 펜트하우스 자리에 다락방들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뷰도 좋고 저렴해서 학생이나 청년들이 많이 살았죠.
에어컨 설치가 어려운 파리의 오래된 다락방들은 폭염이 닥치면서 거주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어컨이 없는 이 다락방들은 이제 거대한 '오븐'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자 월세가 나가지 않고 부동산 가격마저 폭락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에어컨 설치비가 1천만 원? 상상을 초월하는 규제
자, 그러면 "더우면 당장 에어컨을 사서 달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시죠? 그런데 유럽에서는 돈이 있어도 에어컨을 달기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가장 큰 장벽은 건물 미관과 이웃의 동의입니다.
유럽의 도시들은 수백 년 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습니다. 길거리에 길쭉하고 현대적인 실외기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미관상 극도로 꺼립니다. 실제로 런던의 캠든 자치구 같은 곳에서는 주민들이 아파트에 설치한 에어컨에 대해 무더기 철거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일단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어본 뒤에, 그래도 정 못 참겠으면 그때 설치 허가를 받아라"라는 식의 깐깐한 규정이 존재합니다.
유럽의 전통적인 건물 구조는 미관을 중시해 에어컨 실외기 설치가 까다롭고 제약이 많습니다.
건물 바깥쪽에 못 다니, 결국 건물 안쪽 공용 공간인 '중정'에 실외기를 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터집니다. 중정은 소음이 크게 울리는 구조인데, 실외기에서 나는 45~50데시벨의 소음과 더운 열기를 이웃들이 참아줄 리 없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이웃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절대 동의해 주지 않죠. 심지어 전신마비 환자가 더위를 못 견뎌 에어컨을 샀는데, 이웃들이 소음 문제로 소송을 걸어 설치하지 못했다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웃의 반대와 복잡한 규제로 인해 에어컨 설치조차 쉽지 않은 유럽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간신히 허가를 받는다고 해도 비용이 문제입니다. 유럽에서 벽걸이 에어컨 하나를 설치하려면 기본 500~600만 원, 비싸면 1,000만 원 가까이 듭니다. 소음 규제 때문에 일본의 다이킨이나 미쓰비시 같은 고가의 초저소음 에어컨을 사야 하고, 두꺼운 돌벽을 몇 시간에 걸쳐 뚫어야 하니 인건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게다가 냉매를 다룰 수 있는 라이선스를 가진 기술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한국에서 30~50만 원이면 끝날 설치비가 유럽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 겁니다.
전력망 붕괴의 공포와 비싼 전기요금
어렵게 에어컨을 설치했다 쳐도 유지비가 발목을 잡습니다. 유럽의 전기요금은 한국보다 서너 배 비쌉니다. 한여름에 하루 10시간씩 에어컨을 틀면 한 달에 전기세만 50만 원이 훌쩍 넘게 나옵니다.
유럽에서는 에어컨 설치가 까다로워 효율이 낮은 이동식 에어컨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으로 호스를 빼는 이동식 에어컨을 많이 사지만, 이는 효율이 극도로 떨어지고 소음만 큽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럽의 전력망이 에어컨의 보급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현재 유럽 가정의 에너지 사용량 중 에어컨이 차지하는 비중은 0.5%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작년 폭염 때 사람들이 선풍기와 이동식 에어컨을 동시에 켜자 순간 전력 수요가 14%나 반짝 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남부에서 정전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염은 발전소의 가동마저 멈추게 합니다. 원자력이나 가스 발전소는 강물이나 바닷물로 터빈을 식혀야 하는데, 기온이 너무 올라 물마저 뜨거워지니 냉각 효율이 떨어져 발전소 출력을 낮춰야 하는 상황입니다. 전기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전기 생산이 줄어드는 아찔한 딜레마에 빠진 것이죠.
생존인가 환경인가, 정치판으로 번진 에어컨
결국 이 문제는 정치적 논쟁으로 불붙었습니다. 과거 유럽인들에게 에어컨은 '미국식 소비주의의 상징'이자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사치품'이었습니다. 더위를 자연적으로 견디는 것에 대한 묘한 문화적 자부심도 있었죠.
하지만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 되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은 "파리의 엘리트 환경주의자들 때문에 노인과 환자들이 에어컨도 없이 폭염을 견뎌야 하는 것은 수치스럽다"며 서민들의 분노를 자극해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반면 좌파 진영에서는 "에어컨을 튼다고 기후 위기로 인한 산불이나 농작물 피해를 막을 수 있냐"며 여전히 공원 조성이나 나무 심기 같은 근본적인 대책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당장 44도의 폭염 속에서 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병원 간호사들이 "더워서 내가 먼저 정신병에 걸리겠다"고 절규하는 현실 앞에서, 과거 선선했던 시절에 맞춰진 낡은 규제와 인프라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에어컨은 더 이상 환경 파괴의 주범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딜레마에 빠진 유럽이 과연 어떤 슬기로운 해법을 찾아낼지, 앞으로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봐야겠습니다.
FAQ
유럽은 원래 여름에 이렇게 덥지 않았나요?
네, 아닙니다. 유럽은 위도가 높고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으로 한여름 낮에도 25~30도, 밤에는 15도 안팎으로 선선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대기질 개선으로 인해 햇빛을 반사하던 에어로졸이 줄어드는 역설적 현상과 기후 변화가 겹치며 세계 평균보다 2배 이상 빠르게 기온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에어컨 설치비가 한국보다 훨씬 비싼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럽 건물 특성상 두꺼운 석회벽이나 돌벽을 뚫어야 해 시공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인건비가 비쌉니다. 또한 냉매 취급 라이선스를 가진 기술자가 부족하며, 엄격한 소음 규제로 인해 고가의 초저소음 에어컨 모델을 구매해야 하기 때문에 설치비가 최대 1천만 원에 달하기도 합니다.
건물 미관 때문에 에어컨 설치를 막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은 고풍스러운 건물 미관을 보존하기 위해 실외기를 눈에 띄는 외벽에 설치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합니다. 이 때문에 건물 안쪽 공용 공간(중정)에 설치해야 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소음과 열기 문제로 이웃들이 동의해주지 않아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