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의 주요 재건축 아파트들이 공공 개방을 조건으로 건축 규제 완화 혜택을 받은 뒤, 입주 후에는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펜스 설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 주민들이 약속을 번복하는 배경에는 2m 이하의 펜스는 건축물로 보지 않으며, 재건축 조합의 개방 약속이 현재 소유자에게 자동 승계되지 않는다는 법원의 판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이에 서울시는 향후 재건축 단지의 인허가 조건 위반을 막기 위해, 의무 개방 사항을 아예 등기부에 지상권으로 설정하여 소유주가 바뀌어도 효력이 유지되도록 제도를 보완할 계획입니다.

최근 강남의 대형 재건축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펜스를 치고 보안문을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당연히 내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는 건 싫으시겠죠? 쓰레기를 버리고 가거나 소음을 유발하는 외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주민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이 아파트들이 애초에 '담장 없는 개방형 단지'를 약속하고 지자체로부터 엄청난 건축적 인센티브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혜택은 이미 챙겼으면서, 이제 와서 약속을 뒤집고 문을 걸어 잠그겠다는 이른바 '먹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데는 어떤 믿는 구석이 있는지 자세히 파헤쳐보겠습니다.
혜택은 다 받고 이제 와서 문을 닫겠다고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반포의 대장 아파트라 불리는 '래미안 원베일리'입니다. 이 아파트는 재건축을 진행하면서 서초구청과 서울시로부터 아주 특별한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 조건은 단 하나, 아파트 단지 내의 도서관, 야외 무대 같은 공공시설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단지 외곽과 중앙에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공공 보행로를 뚫어 '담장 없는 단지'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개방형 단지를 조건으로 인센티브를 받았던 아파트 단지가 뒤늦게 보안 펜스 설치를 추진하며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주가 끝나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파트에 구경 오는 이른바 '임장객'이나 산책하는 외부인들이 늘어나자, 주민들은 사유지를 보호해야겠다며 단지 외곽에 펜스를 치고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보안문을 설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서초구청은 당연히 "처음 약속했던 인허가 조건 위반"이라며 이를 불허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외부인 통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간 거리 규제 완화, 도대체 얼마짜리 혜택이길래
그렇다면 원베일리가 공공 개방을 대가로 받은 '동간 거리 규제 완화'라는 혜택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건 엄청나게 큰 경제적 이익입니다.
건물 높이의 절반만큼 거리를 띄워야 하는 기존 규제와 개방형 단지 조성 시 주어지는 인센티브의 관계입니다.
원래 서울시 건축 조례에 따르면, 아파트를 지을 때 일조권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건물의 높이 대비 절반(0.5배)만큼은 무조건 앞뒤 건물과 띄워서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원베일리는 공공 개방을 약속한 대가로 이 규제를 완화 받았습니다. 동과 동 사이를 빽빽하게 붙여서 지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렇게 되면 병풍처럼 건물을 배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이른바 '한강 조망권' 세대를 훨씬 더 많이 뽑아낼 수 있습니다. 현재 반포 일대에서 한강이 정면으로 보이는 84㎡(국민평형) 아파트와 한강이 안 보이는 아파트의 가격 차이는 무려 7억에서 10억 원에 달합니다. 규제 완화로 한강 조망 세대가 조금만 늘어나도, 조합 입장에서는 수백억 원 이상의 가치를 추가로 얻게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막대한 이익을 챙겨놓고 이제 와서 펜스를 치겠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잖아요?
통념을 깬 법원 판결: "2m 이하 펜스는 담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주민들이 계속해서 펜스 설치를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이 '믿는 구석', 즉 기존의 법원 판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 펜스 설치를 둘러싼 법적 공방과 그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종로구에 있는 경희궁자이 2단지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이곳 역시 단지 중간을 관통하던 도로를 없애고 하나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묶는 엄청난 혜택을 받는 대신, '담장 없는 아파트'를 만들기로 종로구청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입주 후 외부인 출입이 불편해지자 주민들은 약 1.2m 높이의 펜스와 보안문을 설치했습니다. 종로구청이 이를 제재하자 행정소송이 벌어졌는데, 놀랍게도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법원의 논리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건축법 시행령상 2m 이상의 담장만 건축 허가 대상일 뿐, 그보다 낮은 야트막한 펜스는 법적인 의미의 '담장'이나 '건축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가 더 충격적인데, 애초에 지자체와 공공 개방을 약속한 주체는 '재건축 조합'이지 현재의 '소유자(주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관련 법률에 최초 사업 시행자가 맺은 협약이 다음 소유자에게 명확히 승계된다는 명문의 규정이 없으니, 현재 주민들에게 개방 의무를 강제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초대형 단지가 도시의 거대한 장벽이 된다면
이 판결은 서울시와 각 구청에 비상을 걸었습니다. 최근 지어지는 재건축 아파트들은 20동, 30동이 넘어가는 초대형 단지입니다. 이런 거대한 단지들이 인센티브만 쏙 빼먹고 펜스를 둘러버리면, 그 동네 전체의 보행 동선이 꽉 막혀버립니다.
동네 주민들이 버스 정류장이나 학교를 가기 위해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아서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공공시설을 지어 기부채납을 했다고 해도, 외곽을 펜스로 막아버리면 사실상 외부인은 그 시설을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이 '먹튀' 선례가 굳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서울시의 초강수: "이제부터 등기부에 박아 넣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 촌극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건축 허가 조건에 종이로 써넣는 것만으로는 법원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서울시는 새로운 초강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파트가 다 지어지고 입주할 때, 아예 부동산 등기부에 '지상권'을 설정해 버리는 방식입니다. 등기부에 "이 단지의 경계는 담장 없이 개방해야 한다"는 조건을 명시해 두면, 나중에 아파트를 사고팔아서 소유주가 바뀌더라도 그 의무가 법적으로 완벽하게 승계되기 때문입니다. 국회를 통해 공동주택관리법을 개정하는 방법도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니, 지자체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알박기를 시도하겠다는 겁니다.
반포 1단지부터 은마까지, 앞으로 벌어질 진짜 전쟁
이 이슈가 단순히 원베일리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앞으로 줄줄이 대기 중인 매머드급 재건축 단지들 때문입니다.
당장 내년부터 윤곽을 드러낼 반포 1단지(반포 디에이치 클래스트)의 경우, 올림픽대로 상부를 덮어 한강공원과 직접 연결되는 거대한 덮개공원을 조성할 예정입니다. 이곳이 개방되면 엄청난 외부인들이 아파트 단지 인근을 지나다니게 될 텐데, 과연 주민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은마아파트 재건축 사업시행계획 인가가 나면서 대규모 단지 내 공공시설 개방 이슈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방금 재건축 사업 시행 인가가 난 대치동 은마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학원가 주차난이 심각한 곳이라, 은마아파트 재건축 조합은 400대 규모의 공영 주차장을 지어 공공에 기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입주가 끝나고 나면 외부 차량이 단지 지하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두고 또다시 펜스 논란이 재현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공공의 혜택과 사유지의 권리,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이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혜택은 혜택대로 누리고 문은 걸어 잠그는 꼼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빠져나갈 구멍 없는 촘촘한 제도적 장치가 시급해 보입니다.
FAQ
래미안 원베일리 아파트는 왜 펜스를 치려고 하나요?
입주 후 아파트를 구경하러 오는 임장객이나 산책하는 외부인이 늘어나면서, 쓰레기 투기나 소음 등 주거 환경이 침해받는다고 느낀 주민들이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펜스와 보안문 설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구청은 왜 펜스 설치를 반대하나요?
해당 아파트는 재건축 당시 공공 보행로와 단지 내 시설을 시민에게 개방하는 '담장 없는 단지'를 조건으로 동간 거리 규제 완화 등 수백억 원 가치의 막대한 건축 인센티브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청은 이를 명백한 인허가 조건 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약속을 어겼는데도 주민들이 당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사한 사례였던 '경희궁자이' 행정소송에서 주민들이 승소한 판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원은 2m 이하의 펜스는 건축법상 담장이 아니며, 과거 재건축 조합이 맺은 개방 약속이 현재의 아파트 소유자들에게 법적으로 자동 승계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울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나요?
단순히 인허가 서류에 조건을 명시하는 것을 넘어, 향후 재건축 단지가 입주할 때 부동산 등기부에 '지상권'을 설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등기부에 개방 의무를 명시하면 소유주가 바뀌더라도 법적 의무가 확실하게 승계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