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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단 한 집 남은 함평 왕골 돗자리, 500년 여름 명품의 명맥이 위태로운 이유

spark_icon6분 지식
  • 한때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던 전남 함평의 왕골 돗자리는 현재 마을 전체에서 단 한 가구만 재배와 제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모종 심기부터 수확, 건조, 3천 올 이상의 수동 직조까지 기계화가 불가능한 고된 수작업과 생활양식 변화가 주된 원인입니다.
  • 종묘와 경복궁에도 납품될 만큼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전통 공예인 만큼, 마지막 장인 세대 이후의 기술 보존 대책이 시급합니다.

에어컨의 인공적인 바람이 일상이 된 오늘날, 자연이 건네는 가장 시원한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때 여름철 집집마다 깔고 앉아 무더위를 식히던 함평 왕골 돗자리의 명맥이 현재 마을에서 단 한 집으로 좁혀졌습니다. 500년의 역사를 품고 궁궐과 종묘에까지 납품되던 전통 여름 살림의 정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한때 전국 생산량 70%, 이제는 단 한 집만 남은 들판

전라남도 함평은 예로부터 왕골의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들판 전체가 왕골로 가득했고, 집집마다 서너 마지기씩 농사를 지으며 전국 돗자리 생산량의 70% 이상을 도맡았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던져두고 왕골 일손을 도와 자식 농사를 다 지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죠.

그런데 오늘날 함평 들판에서 왕골을 심고 돗자리를 엮는 집은 정일범(79)·김용남(74) 씨 부부의 가구 단 한 곳뿐입니다. 과거 1만 3천 평에 달하던 재배 면적도 이제는 수요 감소와 체력적 한계로 인해 700평 남짓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5대째 가업으로 이어온 장인의 집을 제외하면, 그 많던 왕골 밭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왜 500년 전통의 왕골 돗자리가 중요한가

함평 왕골 돗자리는 단순한 바닥 깔개가 아닌,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되고 혼수품 목록에서 결코 빠지지 않던 최고급 명품이었습니다. 햇볕을 머금고 자란 왕골 줄기는 특유의 통기성과 흡습성을 지녀 살에 달라붙지 않고, 끈적임 없는 부드러운 촉감을 선사합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농부들이 수확한 왕골을 가지런히 모아 묶어놓은 모습이며, 작업대 위에 쌓인 왕골 다발들이 길게 놓여 있습니다.

기계적인 작업 대신 일일이 사람의 손을 거쳐 수확하는 왕골은 500년을 이어온 우리네 여름 살림의 귀한 재료입니다.

무엇보다 이들 부부가 엮어낸 돗자리는 종묘와 경복궁의 주요 전각 바닥에 깔릴 정도로 그 완성도와 역사적 가치를 공인받았습니다. 30년 넘게 써도 해지지 않는 내구성과 자연스러운 멋은 석유화학 비닐장판이나 합성섬유 제품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생활문화 유산입니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수작업과 현대화의 그늘

왕골 돗자리가 급격히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기계화가 불가능한 고강도 노동 구조에 있습니다. 노지에서 70일간 키운 모종을 일일이 손으로 심어야 하며, 조금이라도 꺾이거나 깊이 묻히면 숨을 쉬지 못해 썩어버립니다. 두 달 뒤 수확할 때도 밑동이 상하지 않게 뽑아내 마르기 전에 껍질을 벗기고 가닥가닥 찢어 볕에 말려야 비로소 실 형태의 재료가 완성됩니다.

작업장에서 두 명의 중년 남성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왕골 돗자리를 엮고 마무리하는 모습.

기계로 대신할 수 없는 고된 수작업의 현장에서 장인들이 땀방울을 흘리며 전통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재료가 준비된 후에도 고단한 직조 과정이 기다립니다. 부품조차 구하기 힘든 45년 된 수동 기계 앞에 서너 시간씩 꼼짝없이 앉아 한 올 한 올 엮어야 하는데, 돗자리 한 장에 들어가는 왕골 줄기만 3천 개 이상에 달합니다. 1970년대 이후 비닐장판과 에어컨이 보급되며 수요가 급감한 데다, 이처럼 뼈를 깎는 수작업을 배우려는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산업 기반이 무너졌습니다.

마지막 장인들이 감당하는 현실과 현장의 변화

명맥이 끊길 위기 속에서도 장인 부부는 묵묵히 베틀을 돌립니다. 7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70여 년간 왕골을 만져온 남편 정일범 씨는 눈을 감고도 손끝의 감각만으로 굵기를 선별해 돗자리를 짭니다. 서울에서 시집와 평생을 함께 돗자리를 엮어온 아내 김용남 씨와 광주에서 찾아오는 오랜 재봉틀 기술자들이 여전히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여성이 작업장에서 재봉틀을 이용해 돗자리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두르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기계의 도움을 받아도 손길이 한 번 더 닿아야 하는 꼼꼼한 마감 덕분에 돗자리는 더욱 튼튼하고 정갈한 자태를 갖춘다.

오늘날 이들의 돗자리를 찾는 주요 소비층은 사찰의 스님들이나 한옥 거주자, 그리고 전통의 깊이를 알아보는 소수의 애호가들입니다. 수익성을 생각하면 진작에 그만두어야 할 일이지만, "우리 대에서 맥을 끊을 수는 없다"는 장인의 사명감이 마지막 남은 한 평의 왕골 밭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무형의 전통 기술, 앞으로 무엇을 지켜보아야 할까

함평 왕골 돗자리는 장인 개인의 노후 생계를 넘어, 전통 생활 기술의 단절이라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부부의 건강이 허락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고유의 직조 기술과 도구, 가공 노하우가 기록되지 못한다면 500년 역사는 그대로 사라지게 됩니다.

한옥의 문살 앞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여성과 맞은편에서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남성의 손이 보이며 중앙에는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다.

평생을 함께하며 일궈온 일상 속에서 나누는 소박한 식사 한 끼는 그 무엇보다 귀한 위로가 됩니다.

향후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무형유산 지정 검토, 체계적인 기술 전수 프로그램 마련, 그리고 공공 복원 사업과의 연계 여부가 핵심 과제입니다. 선조들의 여름철 지혜가 담긴 가장 시원한 자리가 박물관의 박제된 유물로 남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의 관심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FAQ

함평 왕골 돗자리가 다른 여름 돗자리와 비교해 시원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연 왕골 줄기 내부의 미세한 공기층이 열을 차단하고 땀과 습기를 빠르게 흡수 및 배출하기 때문입니다. 화학 섬유와 달리 살에 달라붙거나 끈적이지 않아 쾌적함을 유지합니다.

왕골 돗자리 제작을 기계로 자동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종 식재부터 줄기 껍질 찢기, 굵기 선별 등 전 과정이 섬세한 손감각을 필요로 합니다. 돗자리를 짤 때도 왕골의 미세한 두께 차이를 사람이 직접 확인하며 한 올씩 밀어 넣어야 균일한 품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현재 함평 왕골 돗자리의 주된 사용처는 어디인가요?

종묘와 경복궁 등 주요 국가 유산 전각의 보존 용도를 비롯해 전통 사찰, 한옥 주택, 천연 여름 침구를 선호하는 개인 애호가들의 주문 제작으로 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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