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만장자 실업가였던 유일한 박사는 50세에 OSS 냅코 프로젝트 특수공작원으로 참여할 만큼 조국 독립에 헌신했습니다.
- 귀국 후 세운 유한양행에서는 탈세 없는 경영, 종업원지주제 도입, 자녀 경영권 배제 등 철저한 윤리경영을 실천했습니다.
- 세상을 떠나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그의 유언은 오늘날 오너리스크가 반복되는 한국 기업사회에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1971년 3월 세상을 떠난 한 억만장자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세상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내 소유 주식은 모두 사회에 기증한다. 아들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경영권을 자식이 아닌 평사원 출신 전문경영인에게 넘긴 기업가, 바로 유한양행의 창업자 고(故) 유일한 박사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50세 억만장자가 비밀 공작원이 된 사연
유일한 박사의 삶을 들여다보면 기업가 이전에 뜨거운 피를 지닌 독립운동가의 면모가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9세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15세에 미주 최초의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으며 조국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성인이 된 후 숙주나물 통조림 사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성공한 실업가가 되었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조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으며 조국 독립을 꿈꿨던 청년 유일한의 모습입니다.
그는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민주공화정 수립을 천명하는 결의문을 작성했고,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막대한 독립 자금을 묵묵히 지원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45년, 50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 육군 전략정보처(OSS)의 한반도 침투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의 핵심 요원(암호명 A)으로 자원해 혹독한 특수 공작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생전에 이 같은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일절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국가 전략 정보국인 OSS가 첩보 작전을 위해 조선인 공작원들을 비밀리에 훈련시켰던 산타 카탈리나 섬의 현장입니다.
1원도 깎이지 않은 세무조사, 윤리경영의 시작
31세가 되던 1926년, 안정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온 유일한 박사는 "건강한 국민만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했습니다. 사업을 통해 나라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가치를 기업 운영의 뿌리로 삼은 것입니다.

정직한 납세와 투명한 기업 경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던 유일한 박사의 흔들림 없는 철학이 돋보입니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업들의 부정과 탈세가 공공연하던 시절이었음에도, 유한양행은 단 1원의 추징금도 나오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투명한 회계를 고수했습니다. 정밀 세무사찰에서도 흠결 하나 잡히지 않은 모범 납세 기업의 표본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정직해야 한다는 엄격한 윤리적 기준이 경영 전반에 스며있었습니다.
자식 세습을 거부하고 전문경영인을 택한 결단
유일한 박사는 기업을 결코 개인이나 가문의 사유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196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당시, 그는 경영 수업을 받던 아들이 아닌 공채 평사원 출신의 전문경영인에게 사장직과 전권을 넘겼습니다.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대신 회사를 투명하게 이끌어갈 전문경영인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자녀에게 특권을 주기보다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손녀에게 남긴 것은 대학 학자금 1만 달러가 전부였습니다. 부를 무상으로 물려받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존엄을 해친다는 그의 철학은 가문 중심의 족벌 경영이 당연시되던 당대 한국 재계에 거대한 경종을 울렸습니다.

가족 경영을 대신해 전문 경영인 체제를 택했던 과거의 결단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겨 봅니다.
'돈을 넘어선 삶'이 오늘날 던지는 화두
오늘날 끊이지 않는 재벌가의 갑질과 편법 승계, 이른바 '오너리스크'로 몸살을 앓는 현대 사회에서 유일한 박사의 궤적은 더욱 또렷한 질문을 던집니다. 기업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명제입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부를 얼마나 축적했는가가 아니라 그 부를 어떻게 형성하고 사회에 어떻게 환원했는가로 완성된다는 점을 그는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청년기에는 총을 들고 전선에 섰고, 장년기에는 정직한 기업으로 민족의 건강을 지켰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것을 사회에 돌려준 유일한 박사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나침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FAQ
유일한 박사가 참여한 OSS 냅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1945년 미 육군 전략정보처(OSS)가 계획한 비밀 한반도 침투 작전입니다. 유일한 박사는 당시 50세의 나이에 암호명 'A'로 자원하여 서울 진입 조장으로서 강도 높은 특수 공작 훈련을 받았습니다.
유한양행의 경영권은 자녀에게 상속되었나요?
아닙니다. 유일한 박사는 1969년 은퇴하며 아들이 아닌 공채 평사원 출신의 임원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여 한국 기업 역사상 선구적인 전문경영인 제도를 정착시켰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요?
보유하고 있던 회사 주식 등 개인 전 재산을 사회 및 교육 사업에 환원한다는 내용이 담겼으며, 자녀들에게는 스스로 자립할 것을 당부하고 어린 손녀에게만 학자금 1만 달러를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