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루 남부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차피 성지에는 매년 25만 명의 순례객이 모여들어 묵묵히 먼 길을 걸어갑니다.
- 4,000여 종의 감자를 일구는 고지대 농부와 밧줄 하나로 절벽을 오르내리는 어부의 삶에는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 척박한 자연환경과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신앙과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안데스 사람들의 노동과 헌신은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매년 페루 남부 아리키파에서 약 90km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로 무려 25만 명에 달하는 신도와 순례객들이 발걸음을 옮깁니다. 막대기 하나에 의지해 비포장도로를 몇 시간씩 걸어서 도착하는 이곳은 바로 페루인들의 가톨릭 성지인 차피(Chapi)입니다.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차피 성지는 종교 시설을 제외하면 허허벌판에 가깝지만, 사람들은 밤추위를 무릅쓰고 노숙하며 성모상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인내합니다. 척박한 안데스 고원지대에서 펼쳐지는 이 거대한 순례 행렬은 오늘날 우리에게 삶의 가치와 신앙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듭니다.
고난 속에서 꽃피운 신앙과 전통: 차피 성지순례의 의미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토록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차피 성지로 몰려드는 것일까요?
페루는 국민의 약 80%가 가톨릭 신자인 국가이지만, 이들의 신앙은 단순한 유럽식 가톨릭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유입된 가톨릭이 안데스 고유의 잉카 신앙과 결합하면서 '안데스 가톨릭'이라는 고유한 종교 문화로 재탄생했습니다.
기적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척박한 사막을 건너 이곳 성지까지 찾아온 사람들의 진심 어린 신앙심에 깊은 울림을 받습니다.
차피 성모상은 1년에 단 세 번만 성당 밖으로 나와 신도들 가까이로 행진합니다. 가뭄과 지진이 빈번했던 척박한 땅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성모를 접하는 짧은 순간은 1년을 버텨낼 삶의 희망이자 위안이 됩니다. 희생과 인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이 걷기 여정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도입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 4천 종의 감자와 비쿠냐
차피 성지를 지나 해발 3,700m 고지대에 위치한 우루밤바 마을로 들어서면, 안데스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유산인 감자 수확이 한창입니다. 감자의 고향이라 불리는 페루에서 재배되는 감자 품종만 무려 4,000여 종에 이릅니다.
다양한 맛과 식감을 자랑하는 이곳의 감자는 안데스 고원 지대 사람들의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 줍니다.
농부들은 밭에서 직접 흙덩이와 돌을 쌓아 '와티아(Huatia)'라는 자연 오븐을 만듭니다. 잉카 전통 건축 방식처럼 틈 없이 돌을 쌓고 불을 지펴 뜨거워진 흙 속에 갖가지 감자를 넣어 익혀 먹는 방식입니다. 50년간 감자 농사를 지어온 아버지는 이 묵묵한 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지켜왔습니다.
우리에게 쌀이 일상의 중심이듯 페루 사람들에게 감자는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양식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한편, 페루 국기에도 그려진 멸종 위기 보호종 비쿠냐(Vicugna)는 과거 밀렵으로 개체수가 6,000마리까지 감소했으나, 국가 차원의 강력한 보호 정책 덕분에 최근 30만 마리까지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인위적인 개발 대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려는 노력이 만들어낸 소중한 결실입니다.
현장의 삶이 보여주는 변화: 절벽을 오르내리는 어부 치코카
수도 리마에서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파라카스 해상 국립보호구역에서는 문명의 편리함을 뒤로하고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60m 높이의 천길 낭떠러지를 밧줄 하나에 의지해 맨손과 맨발로 오르내리는 어부 치코카 씨의 삶은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험한 절벽을 오르내리며 어업을 이어가는 이들의 삶에는 고단함 속에도 자신을 향한 당당한 자부심이 묻어나 있습니다.
10년 전 동료 어부들을 잃은 조난 사고를 겪은 후, 그는 다시는 큰 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보호구역이라 배를 댈 수 없는 절벽 아래 황금어장을 찾아 나선 그는, 필요한 만큼만 고기를 잡으며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위험하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그에게는 바람 같은 자유와 삶의 평안을 주는 터전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지켜봐야 할 가치: 정성과 노동이 주는 삶의 울림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안데스 순례자들과 농부, 그리고 어부 치코카 씨가 보여주는 삶은 잊고 지냈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쉽고 빠르게 결과를 얻으려는 조급함 대신,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아내는 노동의 가치, 그리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여유야말로 이들이 안데스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차피 성지의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땀방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따뜻한 위안과 묵직한 여운을 전해줍니다.
FAQ
페루 차피 성지에는 매년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모이나요?
매년 차피 성모의 날 축제 기간이 되면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차피 성당 주변으로 약 25만 명의 신도와 순례객이 모여듭니다.
차피(Chapi)라는 이름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원래 성모상이 현재 위치로 옮겨질 때 케추아어로 '여기까지'를 뜻하는 '차르피(Charpi)'라는 단어를 반복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오늘날 '차피' 성지가 되었습니다.
안데스 지역의 와티아(Huatia)는 어떤 음식 문화인가요?
와티아는 흙덩이와 돌을 잉카 전통 방식으로 쌓아 간이 오븐을 만든 뒤, 불을 지펴 뜨거워진 흙 속에 다양한 종류의 감자와 콩을 넣어 익혀 먹는 안데스 농가 전통의 조리 방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