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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철원 최북단 대마리는 1960년대 지뢰밭과 황무지를 맨손으로 개간하여 형성된 대표적인 대북 전략촌입니다.
  •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쪽에 위치해 영농 출입증이 필수적이며, 모내기철에는 군 장병들의 대민 지원과 주민들의 유대가 깊게 이어집니다.
  •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일궈낸 주민들과 최전방을 지키는 군인들의 헌신이 오늘의 평화를 받치고 있습니다.

248km 비무장지대(DMZ) 철책선이 차갑게 드리워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의 최북단에는, 지뢰가 묻혀 있던 황무지를 맨손으로 일구어 만든 특별한 마을이 있습니다. 바로 철원 대마리입니다. 1960년대 대북 선전촌이자 전략촌으로 조성된 이 마을은 무려 38년 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금단의 땅이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도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최전방 장병들의 헌신과, 목숨을 건 개간으로 비옥한 들녘을 만들어낸 주민들의 노력이 맞물려 오늘의 대마리가 존재합니다.

[What happened now] 최전방 철책 아래 숨겨진 최북단 개척촌의 실상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쪽에 자리한 대마리 마을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여느 농촌과 확연히 다른 풍경을 보여줍니다. 도로변에는 북한 체제 통제 목적과 전쟁의 잔재를 증언하는 노동당사 건물과 격전의 기억을 간직한 백마고지 전적지가 인접해 있습니다. 마을 내부에 늘어선 주택들은 종이를 대칭으로 접었다 편 듯 일렬로 정돈되어 있어 과거 대북 대응용 전략촌으로 정밀하게 기획되었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군복을 입고 철모와 복면을 착용한 군인들이 비무장지대 철책선을 점검하고 있다.

철원 최전방 지역의 철책선을 따라 엄중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는 장병들의 모습입니다.


현재는 민통선이 일부 북상했으나 대마리 일대는 여전히 최전방 경계의 긴장감이 감도는 지역입니다. GOP 장병들이 24시간 철책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마을 주민들은 수십 년간 이 철책 아래서 터전을 잡고 농경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Why it matters] 민통선 접경지역이 가지는 역사적·안보적 가치

대마리가 지닌 역사적 무게감은 단순한 시골 마을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과거 남북 간의 대남·대북 확성기 방송이 밤낮없이 울려 퍼지고, 밤이면 등화관제가 실시되던 분단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철원 대마리 마을의 전경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주택들과 도로가 보이며 상단에는 한국기행 프로그램 로고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전략촌으로 계획되어 조성된 마을답게 일정한 규격과 줄을 맞춘 가옥들이 옛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보안부대 발행 출입증 없이는 마을 바깥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던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분단국가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주민들에게 최전방이라는 위치는 거친 생존의 조건이자 안보의 최전선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의미했습니다.

[What is driving it] 맨손과 괭이로 지뢰밭을 파헤친 개척의 역사

오늘날 비옥한 철원 평야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마리의 농경지는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1967년 정부는 제대 군인 150명을 선발해 대마리 입주를 추진했고, 1968년부터 경운기 15대를 갖추어 본격적인 황무지 개간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실내에서 옆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파마머리 여성의 옆모습과 '나무도 많고, 지뢰 미확인 지대였죠. 이 전방 지역이'라는 자막이 화면 하단에 표시된 영상의 한 장면입니다.

지뢰가 도처에 깔려 있던 척박한 땅을 맨손으로 일궈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까지, 대마리 개척 1세대 주민들이 겪었던 고단한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개간 대상 지역은 나무와 돌이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 지뢰가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미확인 지뢰 지대였습니다. 실제로 개간 작업 도중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거나 플라스틱 폭풍지뢰에 발목 상해를 입는 등 수많은 희생이 잇따랐습니다.


1968년 당시 '건설의 해' 현판이 붙은 건물 앞에 경운기를 탄 남성들이 서 있는 흑백 사진 속 모습

황무지였던 지뢰밭을 일구어 오늘날의 비옥한 터전을 만든 개척자들의 땀방울이 서린 옛 기록입니다.


1세대 주민들은 매일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땅을 파헤쳤고, 화산 지대 특유의 쏟아지는 돌을 하나하나 캐내며 약 3,000평씩의 논밭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을 회관 내 자그마한 기록 박물관에 보관된 당시의 입주증과 철주망 사진들은 이 모진 개척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Who is affected or what changes in practice] 군 장병과 주민이 함께 일구는 삶의 들녘

오늘날에도 대마리 주민들이 민통선 안쪽에 위치한 농경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신원 확인과 영농 출입증 제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네비게이션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이 들녘은 여전히 지뢰 경고 표지판이 서 있는 경계의 공간입니다.


태극기가 걸린 다리 너머로 '천하무적 열쇠부대'라고 적힌 아치형 출입문이 보이는 도로 풍경

엄격한 신원 확인과 출입 절차를 거쳐야만 들어설 수 있는 민통선 안쪽의 마을 입구입니다.


하지만 농사철이 되면 이곳은 온정이 넘치는 협동의 장으로 변합니다. 농촌 인구의 연령대가 높아짐에 따라 모내기철 일손이 부족해지면 인근 부대의 장병들이 대민 지원에 나섭니다.


농촌 들판에서 중년 남성과 군복을 입지 않은 젊은 남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뒤편에는 모판이 실린 트럭이 세워져 있다.

농번기가 되면 어김없이 대민 지원을 나오는 장병들 덕분에 최전방 마을의 농사도 차질 없이 이어집니다.


주민들은 뼛속 깊이 집밥이 그리웠을 장병들을 위해 매콤한 돼지불고기와 고소한 햄 반찬 등 정성 어린 새참을 준비하며 고마움을 전합니다. 철책을 지키는 군인과 땅을 일구는 주민이 한마음으로 농사를 짓는 풍경은 최전방 접경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든든한 공존의 모습입니다.

[What to watch next] 분단의 상흔을 넘어 지속 가능한 평화와 기억의 승계

6.25 전쟁 당시 약 30만 발의 폭격이 쏟아져 산등성이가 백마의 형상처럼 깎였다는 백마고지는 오늘날 고요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뢰밭을 일궈 세운 대마리 마을의 역사 역시 고단했던 과거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거대한 삶의 터전으로 뿌리내렸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평범한 하루 뒤에는 최전방을 지키는 장병들의 묵묵한 경계 임무와, 희생을 무릅쓰고 땅을 일궈낸 주민들의 단단한 삶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상흔을 지닌 최북단 마을 대마리가 보여주는 노동의 가치와 평화의 의미는 향후 접경지역의 역사적 자산으로서 지속적으로 기억되고 계승되어야 할 것입니다.


FAQ

철원 대마리는 어떤 계기로 형성된 마을인가요?

1960년대 북한의 선전촌에 대응하기 위한 대북 전략촌으로 조성되었습니다. 1967년 제대 군인 150명을 선발해 입주시킨 뒤 지뢰가 묻혀 있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마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마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농경지에 갈 때 출입 통제를 받나요?

네, 농경지가 민간인 출입 통제선(민통선) 안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민과 방문객 모두 군 초소에서 엄격한 신원 확인과 영농 출입증 절차를 거쳐야 출입할 수 있습니다.

모내기철에 군 장병들이 대민 지원을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령화로 인해 부족해진 농촌 일손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민통선 내 비옥한 들녘에서 주민들과 군 장병들이 함께 모내기 작업을 진행하며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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