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타면 깎아지른 절벽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어우러진 친퀘테레와 리구리아 해안의 숨은 소도시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마나롤라의 층층이 쌓인 집들과 카몰리의 화려한 색채 이면에는 해적을 막고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어부와 가족들의 치열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 거대한 솥에 튀긴 생선을 나누는 카몰리 축제와 예술가들의 안식처였던 포르토 베네레의 풍경은 빠르고 편리한 관광 대신 느리고 다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눈부신 지중해의 햇살과 시원한 파도 소리. 뻔한 관광 명소를 벗어나 진짜 이탈리아의 속살을 마주하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탈리아 제1의 항구도시 제노바에서 출발해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는 순간, 그 해답이 펼쳐집니다.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겨진 리구리아 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들은 그저 예쁜 사진을 남기기 위한 배경이 아닙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수백 년을 버텨온 사람들의 고단한 땀방울과,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이웃들의 따뜻한 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죠. 빠르고 편리한 여행 대신, 조금은 느리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지중해 소도시들의 진짜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깎아지른 절벽 위, 느리고 여유로운 기차 여행의 시작
한정된 일정 속에서도 현지인들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은 바로 기차에 오르는 것입니다. 탑승 구간만 정해져 있고 좌석은 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오픈 티켓 한 장이면 충분하죠. 탑승 전 펀칭 기계에 표를 찍는 작은 수고로움조차 여행자에겐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지중해의 낭만을 찾아 떠나는 기차 여행, 제노바역에서 마나롤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기차는 제노바를 떠나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궤적을 그립니다. 창밖으로 탁 트인 바다를 기대했다가 절반 이상 이어지는 어두운 터널에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벽 바로 옆에 바다가 맞닿아 있는 리구리아 해안 특유의 거친 지형을 이해하고 나면, 터널 끝에 불쑥 나타나는 에메랄드빛 지중해가 무척이나 반갑고 경이롭게 느껴진답니다. 느릿느릿 달리는 완행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노부부와 인사를 나누다 보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조차 그야말로 낭만적인 여행의 일부가 됩니다.
화려한 동화 마을 이면의 고단함과 생명력
기차를 타고 닿을 수 있는 친퀘테레 국립공원의 마을 중에서도 많은 이들의 로망으로 꼽히는 곳은 마나롤라입니다. 약 70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 형형색색의 집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죠. 하지만 이 아름다운 진풍경 뒤에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싸워 온 주민들의 눈물겨운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절벽과 터널이 이어지는 리구리아 해안을 따라 기차 여행의 낭만을 만끽합니다.
12세기 무렵, 해적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해 험준한 절벽 위에 요새처럼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이 마을의 기원입니다. 자동차조차 진입할 수 없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걷다 보면, 손바닥만 한 자투리땅도 버리지 않고 레몬과 꽃을 심어놓은 주민들의 억척스러운 집념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다 거친 풍랑을 이겨내며 살아온 이들은 집집마다 문고리와 열쇠 구멍 하나에도 자신의 개성을 듬뿍 담아냅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결코 멋과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따뜻한 철학이 골목 구석구석에 배어 있습니다.
3만 명을 위한 거대한 프라이팬, 어촌 마을의 유쾌한 반전
친퀘테레 인근의 또 다른 소도시 카몰리(Camogli)로 발걸음을 옮기면, 지중해 어촌 마을의 든든한 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바다에 나간 남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내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아내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마을은, 어부들이 밤바다에서도 집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건물을 유독 밝고 화려하게 칠해두었습니다.
축제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하면 기념 접시를 선물로 주는 따뜻한 인심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가장 들썩이는 순간은 바로 매년 열리는 물고기 축제, '산 포르투나토' 기간입니다. 무려 28톤에 달하는 거대한 프라이팬에 3천 리터의 기름을 붓고 하루 동안 30여 톤의 생선을 튀겨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줍니다. 도대체 왜 이런 엄청난 수고를 자처하는 걸까요? 70년 전, 구두쇠 마을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어부 20명이 시작한 작은 나눔이 이제는 10만 명이 찾는 대축제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1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지만, 뜨끈뜨끈한 생선튀김을 한입 베어 물면 낯선 여행자도 어느새 마을의 넉넉한 인심에 푹 빠져들게 됩니다.
지중해를 온전히 맛보는 여행자의 특권
진짜 여행의 묘미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를 오롯이 맛보는 데 있죠. 친퀘테레에서 가장 번화하고 넓은 해변을 품은 몬테로소 알 마레에서는 아주 특별한 지중해식 요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에 친퀘테레산 올리브 오일과 토마토소스를 듬뿍 넣고, 리구리아 전통 도자기인 암포라 항아리에 담아 한 번 더 끓여내는 해물찜입니다.
리구리아산 도자기에 담아 조리하면 재료의 풍미가 깊게 배어들어 지중해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항아리 특유의 향이 깊게 밴 해산물과 이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을 곁들이면 기다림의 시간은 금세 잊힙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문어와 생선 살을 맛보는 순간, 빠르고 간편한 음식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귀한 정성을 대접받는 기분이 듭니다. 신토불이라는 말처럼, 자연이 내어준 꾸밈없는 재료를 오랜 시간 정성껏 조리해 먹는 이들의 밥상에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영혼의 안식처가 된 바다, 우리가 잊고 있던 여유
여정의 마지막은 친퀘테레의 여섯 번째 마을이라 불리는 포르토 베네레가 장식합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비롯해 수많은 유럽 예술가들이 영혼의 은신처로 삼았던 이곳은, 낡은 집들과 깎아지른 절벽마저도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다가옵니다. 뱃마을 사람들이 바다로 떠날 때의 두려움을 달래고 무사 귀환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절벽 끝에 세운 산 피에트로 성당은, 오랜 세월 마을을 묵묵히 지켜온 든든한 안식처입니다.
잔잔한 지중해 위로 작은 보트를 띄워 투어를 하다 보면, 바다 한가운데서 갓 채취한 귀한 생굴을 맛보는 진풍경도 펼쳐집니다. 화려한 관광지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이 깎아낸 절벽을 바라보며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당신에게도 혹시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있나요? 거친 자연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궈온 지중해 소도시 사람들의 미소가, 오늘 하루 고단했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FAQ
친퀘테레 국립공원의 마나롤라 마을에는 왜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나요?
마나롤라는 내륙 쪽으로 험준한 아펜니노 산맥이 감싸고 있고, 바다 쪽으로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진 지형적 특성 때문입니다. 12세기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새처럼 조성된 마을이라 골목이 매우 좁고 가파르며, 현재도 유람선과 기차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카몰리 마을의 건물들은 왜 유독 화려하고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나요?
카몰리는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의 마을입니다. 과거 바다에 나간 어부들이 어두운 밤이나 안개 속에서도 자신의 집을 쉽게 알아보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아내들이 건물을 눈에 띄는 밝은 색으로 칠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카몰리 물고기 축제에서 무료로 생선튀김을 나누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약 70년 전, 카몰리 마을이 '구두쇠 마을'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자 이를 벗기 위해 어부 20명이 모여 사람들에게 생선을 대량으로 튀겨 나누어주기 시작한 것이 축제의 기원입니다. 현재는 28톤짜리 대형 솥을 이용해 3만 명 이상의 방문객에게 튀김을 대접하는 큰 축제로 발전했습니다.
몬테로소 알 마레의 해산물 찜 요리는 왜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나요?
이 지역 특유의 해산물 요리는 재료를 모아 한 번 끓인 뒤, '암포라'라 불리는 길쭉한 리구리아 전통 도자기 항아리에 담아 한 번 더 데워내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도자기 특유의 향이 음식에 깊게 배어들어 풍미가 훨씬 좋아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