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리콘밸리에도 한국의 리픽싱과 동일한 풀래칫(Full Ratchet) 등 지분희석 방지 조항이 존재합니다.
- 다만 미국은 시장의 역학 관계에 따라 호경기에는 투자자가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완화된 조건을 수용합니다.
- 한국은 시기와 관계없이 모든 투자자가 상시 강력한 리픽싱 권리를 보유하여 불경기 다운 라운드 시 구조적 병목이 발생합니다.

안녕하세요. 데모데이 김범수입니다.
최근 한국 스타트업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가 바로 리픽싱(지분희석 방지) 조항과 이로 인한 다운 라운드(Down Round)의 어려움입니다. 지난 영상에서 한국 VC들이 가진 리픽싱 권리 때문에 왜 한국에서 다운 라운드가 유독 일어나기 힘든지 말씀드렸는데요.
그럼 이런 의문이 드실 겁니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아무 권리도 없이 돈만 던져두고 지분이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쓰나요? 걔네는 바보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실리콘밸리에도 한국의 리픽싱과 똑같은 권리가 존재합니다. 다만 이 권리를 적용하는 방식이 고정된 관행이 아니라 시장의 역학 관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불경기가 왔을 때 스타트업들이 훨씬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을 주저앉히는 리픽싱, 실리콘밸리는 왜 조용할까
한국에서는 경기가 나빠져 이전 라운드보다 낮은 기업가치로 투자(다운 라운드)를 받으려고 하면, 기존 투자자들의 리픽싱 조항이 발목을 잡습니다. 기존 투자자들의 주당 단가를 낮춰줘야 하는데, 이를 조정하기가 극도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면 실리콘밸리에서는 다운 라운드가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됩니다. 이는 미국 VC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계약을 맺는 구조적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조항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유연성'이다
실리콘밸리에도 한국의 리픽싱과 동일한 지분희석 방지(Anti-dilution) 조항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차이점은 한국처럼 모든 투자자가 호경기든 불경기든 항상 최고 수준의 방어벽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지분 희석 방지 방식과 한국 리픽싱의 차이를 살펴봅니다.
미국에서는 시장의 힘겨루기에 따라 이 조항의 강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즉, 리픽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시장 상황에 따라 계약 조건이 유연하게 변하지 못하는 한국의 경직된 투자 환경이 진짜 문제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지분희석 방지 3가지 방식
실리콘밸리에서 사용하는 지분희석 방지 조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 지분희석 방지 조항 없음 (No Anti-dilution): 말 그대로 투자 단가 조정을 전혀 해주지 않는 방식입니다.
- 가중평균 방식 (Weighted Average): 신규 투자로 인해 단가가 낮아질 때, 전체 발행 주식 수와 신규 발행 주식 수 등을 고려한 특정 공식에 따라 투자 단가를 일부 조정해 보전해 주는 방식입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입니다.
- 풀래칫 방식 (Full Ratchet): 한국의 리픽싱과 정확히 똑같습니다. 이전에 주당 10불에 투자했는데 이번 라운드 단가가 5불이 되면, 기존 투자자의 단가도 그냥 5불로 수직 하강하여 조정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지분 희석 방지 조항은 투자자와 창업자 간의 유연한 합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결국은 역학 관계의 문제입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스타트업이 '갑'이 됩니다. 투자 자금은 넘쳐나는데 좋은 스타트업은 적기 때문입니다. 이때 투자자가 "나 풀래칫(리픽싱) 조항 넣어줘"라고 요구하면, 스타트업 대표님들은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하고 다른 투자자를 찾습니다. 투자자로서는 딜에 들어가기 위해 조항을 빼거나 가장 부드러운 가중평균 방식을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경기가 왔을 때 '몸이 가벼운' 미국 스타트업들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에 2021년까지의 엄청난 불장(호경기) 동안 미국 스타트업들은 풀래칫 같은 독소 조항 없이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같은 불경기가 찾아와 다운 라운드를 진행해야 할 때, 기존 투자자들과 얼굴 붉히며 권리 포기 협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계약서에 그런 강력한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이 다운 라운드를 진행할 때 몸이 훨씬 가벼운 상태로 빠르게 자금을 수혈받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 한국 스타트업들은 호경기든 불경기든 항상 똑같이 강력한 리픽싱 조항이 계약서에 박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꺾였을 때 기존 투자자들의 권리를 조정하느라 펀딩 자체가 무산되는 비극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시장 주도권의 변화와 우리가 배워야 할 점
물론 미국도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 동네에서 다시 풀래칫 계약서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는 농담 섞인 탄식이 나옵니다. 투자자가 다시 '갑'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강력한 조건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실리콘밸리의 계약 조건은 고정된 법률이 아니라 시장 논리에 의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작동합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도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장 중심의 유연한 메커니즘을 어떻게 우리 환경에 이식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FAQ
한국의 리픽싱과 미국의 풀래칫(Full Ratchet)은 정확히 무엇이 다른가요?
본질적으로 동일한 권리입니다. 신규 투자 단가가 기존 투자 단가보다 낮아질 때, 기존 투자자의 단가를 신규 단가 수준으로 낮춰 지분율을 보전해 주는 방식입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계약에 기본 적용되는 반면, 미국에서는 시장 상황에 따라 강력하게 요구되거나 아예 배제되기도 합니다.
가중평균(Weighted Average) 방식은 스타트업에게 왜 더 유리한가요?
신규 투자 단가가 낮아지더라도 기존 투자자의 단가를 무조건 신규 단가로 깎아주는 것이 아니라, 신규 발행 주식 수 등의 비중을 고려해 완만하게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창업자의 지분 희석을 최소화하면서도 투자자를 합리적으로 보호할 수 있어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선호되는 방식입니다.
한국의 리픽싱 관행을 창업자 개인이 거부할 수는 없나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한국 투자 환경에서는 리픽싱이 표준 계약서처럼 굳어져 있어 개별 스타트업이 이를 거부하면 투자 유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개별 기업의 협상력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구조적 관행의 문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