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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국가를 가져본 적 없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중문화는 추상적인 민족주의적 열망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반복 학습시키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 전통의 단절이라는 통념과 달리 판소리는 임방울의 '쑥대머리'로 1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일본 엔카와 결합한 '신민요'라는 독특한 하이브리드 장르를 탄생시켰습니다.
  • 이러한 대중문화적 경험과 학습은 해방 후 우리가 왕조나 봉건 체제로 회귀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민주 공화국으로 이행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대중문화사의 숨겨진 이면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강헌입니다.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를 떠올릴 때 '문화 통치'라는 기만적인 외피 아래 모든 민족문화가 숨죽이고 말살당했던 암흑기로만 기억하곤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롭고도 본질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어떻게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왕조 체제로의 회귀가 아닌 '민주 공화국'이라는 현대적 시민 사회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 기적 같은 열쇠는 바로 '국가 없는 민족주의(State-less Nationalism)'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국가라는 공식 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조선의 대중들은 영화와 음악이라는 대중문화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근대적 시민의식을 스스로 학습해 나갔습니다. 검열의 제국 속에서 피어난 이 뜨거운 문화적 생존 방식을 지금부터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왜 '국가 없는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중요한가

역사학적으로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근대 국가라는 울타리와 교육 체제, 군대 등의 제도를 전제로 성립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우리에게는 우리를 보호해주거나 교육해줄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민족주의는 자칫 공허한 구호나 추상적인 이념에 그치기 쉽습니다.

여기서 대중문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조선의 민중들은 학교가 아니라 극장에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고,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부르며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했습니다. 즉, 국가 없는 민족주의는 대중문화라는 거울을 통해 대중이 스스로를 '조선 사람'으로 자각하고 결속하게 만든 실천적 에너지를 뜻합니다. 이 문화적 경험이 축적되었기에 해방 이후 봉건 왕조로 돌아가자는 어리석은 주장이 발붙일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국가 없는 민족주의'의 명확한 정의와 작동 원리

이 개념의 핵심은 국가 권력의 강제가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모방과 정서적 공감'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이 확산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지배 권력이 촘촘한 검열의 그물을 쳐놓아도, 대중은 그 틈새를 칼날처럼 파고드는 은유와 알레고리를 기막히게 알아채고 소비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분노를 담은 이 노래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통합적인 민족의 노래로 자리 잡았습니다. 남북 단일팀이 구성될 때마다 국가 대신 아리랑을 부르는 역사적 전통의 뿌리가 바로 이 영화 한 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검열관의 눈을 피해 대중의 가슴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음악과 영상의 힘, 이것이 바로 국가 없는 민족주의를 작동시킨 위대한 테크놀로지였습니다.


강연자가 스크린에 띄워진 1932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의 흑백 스틸컷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 대중문화는 국가가 부재했던 민중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시민의식을 싹틔우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빠지는 이분법적 오해와 '하이브리드'의 진실

많은 이들이 식민지 시대의 문화적 풍경을 '순수한 전통의 고수'와 '일제에 의한 완벽한 말살'이라는 이분법으로만 바라봅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는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첫째로, 일제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제도적으로 완전히 단절시켰다는 생각은 졸라 오해입니다. 오히려 전통문화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급격한 공업화와 농촌 공동체의 붕괴 때문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였던 1930년대에도 판소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편제의 거장 임방울이 부른 <쑥대머리> 음반은 공식, 비공식 추산으로 무려 100만 장이 팔려나갔습니다. 웬만한 유행가는 명함도 못 내밀 대기록입니다.

둘째로, 이 시기에는 전통의 고수가 아니라 동서양의 양식이 뒤섞인 아주 독특한 '하이브리드(Hybrid)' 문화가 대폭발했습니다. 우리의 전통 민요적 질서가 일본의 엔카, 나아가 서양의 음계와 만나면서 '신민요'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전통 경기 민요로 알고 있는 <노들강변> 역시 1934년 음반사가 철저히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해 만든 창작 신민요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이 가사를 쓰고 기생 출신 가수들이 불러 대히트를 기록했죠.

여기에 산문적인 세태 풍자와 빠른 템포를 결합한 '만요(만화 같은 노래)'라는 일종의 30년대 랩 음악까지 등장했습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같은 노래가 대표적입니다. 낮에는 클래식을 하고 밤에는 '나화랑'이라는 필명으로 뽕짝을 졸라게 써댔던 홍난파의 이중생활도 참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참고로 홍난파의 후예들이 그의 친일 행적을 덮기 위해 가곡 <봉선화>를 어마어마한 민족 저항 가요로 포장하며 '노래 부르다 잡혀갔다'는 식의 눈물겨운 셀프 탄압 시나리오를 조작해냈는데, 일본 경찰 기록에는 그런 사실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멜로디는 참 위대하게 잘 썼지만, 그런 어이없는 구라는 이제 그만 칠 때도 되었습니다.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마이크를 들고 강연하는 모습

식민지 시대 대중문화는 전통과 근대가 복잡하게 얽힌 하이브리드 양상을 띠며 발전했습니다.


공간의 패배자들을 그린 리얼리즘 걸작, <임자없는 나룻배>

개인적으로 저는 나운규의 <아리랑>보다 구조적으로 훨씬 더 진일보한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준 영화로 1932년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를 꼽습니다. 나운규가 주인공 '춘삼' 역을 맡아 인생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춘삼은 시골에서 수해로 농토를 잃고 경성으로 올라와 인력거꾼이 됩니다. 하지만 대도시에는 이미 택시가 등장하면서 인력거는 사양 산업으로 밀려나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신한 아내를 살리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에 가고, 출소해보니 아내는 택시 운전사와 눈이 맞아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결국 길거리에서 태어난 딸아이 하나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룻배 사공이 되어 늙어갑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춘삼이 노를 젓는 그 강 위로 거대한 철교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공간의 권력과 근대화라는 대세 앞에, 늙은 사공의 힘은 절망적으로 무력합니다. 결국 분노에 찬 춘삼은 도끼를 들고 철교를 부수려다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사망하고, 그 와중에 등잔불이 넘어져 집에 자고 있던 딸마저 불타 죽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주인을 잃고 철교 아래 묶여 있는 쓸쓸한 나룻배의 커트로 끝이 납니다.

춘삼은 단순한 불운아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질서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간의 권력에 철저히 패배한 '공간의 패배자'입니다. 이 영화는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근대화의 폭력성과 슬픔을 리얼리즘의 필치로 처절하게 그려냈습니다. 대중은 이 영화를 보며 시대의 모순을 뼛속 깊이 공감했던 것입니다.

대중문화의 유연한 생존력이 우리에게 주는 철학적 교훈

역사를 단순한 '흑백의 논리'나 '순결한 저항'의 프레임으로만 재단하려는 태도는 대단히 위험하고 오만한 발상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유약하게 지배당하기만 한 피해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매일같이 총칼을 들고 싸운 투사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트로트의 이박자 리듬에 몸을 싣고, 신민요의 가락에 슬픔을 달래며, 영화 속 비극적인 주인공의 삶에 자신을 투사했습니다. 서구적 멜로디와 일본풍의 엔카, 조선 고유의 서정이 뒤섞인 하이브리드 대중문화를 주체적으로 소비하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선인'이라는 단단한 내면의 기둥을 세워나갔습니다.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 자신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부터가 시작입니다. 우리의 근대 시민의식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검열의 칼날을 피해 유연하게 살아남았던 대중문화의 끈질긴 생명력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명리학의 지혜처럼, 가혹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문화적 유연성을 잃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눈부신 타이밍과 생존력을 오늘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봅니다.


FAQ

일제강점기 전통문화는 정말 일제에 의해 완전히 말살되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일제에 의해 전통문화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생각하지만, 1930년대에도 판소리 음반인 임방울의 <쑥대머리>가 100만 장 가까이 팔릴 정도로 강력한 대중성을 유지했습니다. 전통문화의 결정적인 소멸과 유실은 오히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급격한 산업화와 농촌 공동체 붕괴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홍난파의 '봉선화'가 민족 저항 가요로 검거를 유발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닙니다. 홍난파가 일제 말기에 행한 친일 행적을 은폐하고 미화하기 위해 그와 추종자들이 사후에 조작해낸 '셀프 탄압 신화'에 가깝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공식 검거 기록 어디에도 가곡 <봉선화>를 불러 체포되거나 처벌받았다는 문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나룻배'와 '철교'는 무엇을 상징하나요?

'나룻배'는 전근대적이고 공동체적인 조선 민중의 삶의 터전을 상징하며, '철교'는 식민지 권력과 결탁하여 밀려 들어온 근대 자본주의적 공간 질서를 상징합니다. 주인공 춘삼이 철교를 부수려다 기차에 치여 죽는 결말은 근대화의 폭력성 앞에 무참히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 민중의 비극적 현실을 은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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