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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리우드 직배의 거센 공습 속에서도 자국 영화 점유율 50%를 지켜낸 한국 영화의 독보적인 저력은 일제강점기 검열의 시대부터 다져진 저항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천재 영화인 나운규는 1926년 작 <아리랑>에서 '미치광이 주인공'이라는 정교한 예술적 알레고리를 활용하여 일제의 삼엄한 검열망을 완벽하게 우회했습니다.
  • 우리가 오늘날 민족의 노래로 부르는 '아리랑'은 고대 민요가 아니라, 나운규가 전국 벌목 노동자들의 소리를 엮어 영화 주제가로 창작하고 유통해 성공시킨 근대의 유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철공소닷컴의 강헌입니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 영화가 전 세계 시장에서 얼마나 대단하고 유의미한 지위를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전 세계 200여 개 국가 중 자국 이름을 걸고 자체적으로 영화를 꾸준히 제작하는 나라는 손에 꼽힙니다. 한때 위대한 영화 유산을 자랑했던 브라질 같은 나라조차 연간 제작 편수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것이 냉혹한 현실입니다. 전 세계의 영화 영토가 할리우드로 통일된 지금, 자국 영화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나드는 나라는 전 세계에 단 세 나라밖에 없습니다. 그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을 일궈낸 희한한 조국이 바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입니다.

사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영화는 '방화(邦畫)'라 불리며 대낮에 야동 보러 간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쓰레기 취급, 하수구 문화 취급을 받았습니다. 1986년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시작되자 영화인들이 극장에 뱀을 풀며 저항했던 눈물겨운 역사도 있었죠. 이처럼 끈질긴 한국 영화의 저항 정신과 독보적인 생명력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그 뿌리를 추적해 올라가면,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한국 영화사의 유일무이한 거장, 춘사 나운규와 그의 불멸의 명작 <아리랑>(1926)을 만나게 됩니다.

1. 왜 지금 '검열 속의 알레고리'를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대중문화사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복기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옛날 영화를 추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와 문화통치라는 '검열의 제국' 안에서,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예술을 도구로 삼아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집단적 분노를 표출했는지 그 메커니즘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예술가에게 검열은 거대한 장벽이지만, 동시에 이를 돌파하기 위한 상상을 초월하는 창조적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직설적인 표현이 원천 봉쇄된 시대에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탄생한 무기가 바로 '알레고리(Allegory)', 즉 상징과 은유입니다. 이 개념을 이해해야만 억압받는 시대의 대중예술이 지닌 진짜 가치와 힘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2. '검열 돌파의 알레고리'란 무엇인가

검열 하의 알레고리란, 권력자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무해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피지배층인 대중은 그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정치적 메시지를 단박에 알아채도록 설계된 이중적 서사 구조를 뜻합니다.

일제 총독부의 검열관들은 대본에 '독립'이나 '일제 비판'의 낌새만 보여도 가위질을 해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운규가 선택한 알레고리는 바로 '미치광이'였습니다. 주인공이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이라면, 그가 순사를 때리거나 기괴한 행동을 해도 검열관들은 "미친놈이 헛소리하는 것"이라며 방심하고 통과시켜 주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극장을 찾은 조선의 관객들은 그 미치광이의 눈빛과 칼끝이 향하는 진짜 표적이 누구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3.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아리랑'과 초기 영화의 진실

여기서 우리 선생님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국가대표 응원가로 부르는 민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아주 먼 옛날 삼국시대나 조선시대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고대 민요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시죠? 과연 그럴까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가장 대표적인 형태의 아리랑은 바로 1926년 나운규가 직접 가사를 쓰고 영화 <아리랑>의 주제 음악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작한 '대중가요이자 영화 주제가'입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었던 나운규가 어릴 적 두만강 변에서 전국 각지의 벌목 노동자들이 부르던 애달픈 소리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자신의 음악적 감수성으로 깔끔하게 엮어낸 창작곡인 셈입니다. 이 영화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흥행을 기록하고 전국으로 배급되면서, 향토적 경계를 넘어선 최초의 전국구 '민족의 노래'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또한 초기 한국 영화를 기술적으로 낙후된 조잡한 수준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남아 있는 몇 장의 스틸컷만 보더라도 대각선 X자 구도를 활용한 역동적인 영상미는 이중섭의 황소 그림을 보는 듯한 엄청난 예술적 성취를 보여줍니다.


강연자가 스크린에 투사된 1926년 영화 아리랑의 흑백 스틸컷을 가리키며 청중에게 설명하고 있다.

당대 검열을 뚫고 대중과 소통했던 영화 아리랑의 역동적인 미장센과 구도를 살펴봅니다.


4. 나운규와 <아리랑>(1926): 미친 사내의 칼끝에 숨겨둔 시대의 분노

나운규는 단순한 영화감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연 배우이자 감독, 극작가였으며, 실제로 만주에서 홍범도 장군 휘하의 독립군으로 무장 투쟁을 벌이다 옥살이까지 했던 진짜 투사였습니다.


강연자가 스크린에 나운규의 흑백 사진을 띄워놓고 청중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한국 영화사의 선구자이자 전방위 예술가였던 나운규의 삶과 그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어봅니다.


그가 24살의 나이에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아 완성한 영화 <아리랑>의 스토리는 정교한 알레고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인공 영진은 경성에서 철학과를 다니다가 고문을 받고 미쳐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입니다. 그에게는 아름답고 순수한 여동생 영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일제 헌병의 앞잡이이자 친일파 마름인 자가 영희를 겁탈하려 합니다. 축제날 미쳐서 춤을 추며 돌아다니던 영진은 이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낫을 들어 마름을 내리쳐 죽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설정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순간, 미쳤던 영진의 정신이 번쩍 돌아옵니다. 권력의 하수인에게 저항하여 칼을 뽑는 순간 비로소 제정신을 찾는다는 이 소름 돋는 은유! 정신이 돌아온 영진은 결국 순사에게 포박되어 고개를 넘어가고, 온 동네 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영진이 부르던 노래 '아리랑'을 합창하며 그를 배웅합니다.

나운규는 이 위험천만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제작자로 일본인 '요도 토조'를 내세우고 대본 집필자 이름도 일본식으로 올리는 치밀한 전략을 썼습니다. 심지어 검열에서 삭제당한 아리랑 5절 가사("문전의 옥답은 다 어데 두고 쪽박의 신세가 웬일이냐")를 영화 홍보 전단지에 슬그머니 끼워 넣어 배포하는 대담한 게릴라 전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5. 억압의 시대를 돌파하는 예술의 타이밍

명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타이밍'입니다. 나운규의 삶과 예술 역시 기막힌 타이밍의 연속이었습니다. 몸에 병을 얻어 무장 투쟁의 최전선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그는 총 대신 카메라를 쥐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숨통이 미세하게 열린 그 찰나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민족의 울분을 담은 폭탄 같은 영화를 세상에 던졌습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돈을 회수했고, 단성사의 젊은 흥행사 임수호에게 판권이 넘어가며 2년 동안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영화관이 없는 시골 구석구석까지 이동 영사 단이 돌아다니며 주제가 '아리랑'을 퍼뜨렸고, 이는 조선 민중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지폈습니다.

진정한 대중예술은 단순히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오락거리가 아닙니다. 혹독한 억압 속에서도 자기 객관화를 잃지 않고, 우리가 누구인지(To know oneself), 우리가 왜 분노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거울입니다. 검열의 제국 한복판에서 예술적 알레고리로 민족의 영혼을 깨웠던 나운규의 정신은, 오늘날 세계를 뒤흔드는 한국 영화의 DNA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철공소닷컴의 강헌이었습니다.


FAQ

영화 <아리랑>의 원본 필름은 현재 볼 수 없나요?

안타깝게도 현재 국내에는 나운규의 <아리랑> 원본 필름이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과거 북한의 김정일이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무근으로 밝혀졌고, 현재는 일본의 한 수집가가 필름 일부(총 8권 중 3권)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공개나 반환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운규 감독은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사망했나요?

나운규 감독은 1937년, 고작 35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습니다. 젊은 시절 독립군 활동을 하며 얻은 몸의 병과 옥살이의 여파,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미친 듯이 영화 제작에 몰두하며 몸을 사리지 않았던 혹독한 과로가 겹친 결과였습니다.

영화 속 마름을 죽이는 장면이 어떻게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나요?

주인공 '영진'이 미치광이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설정 덕분에 심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나운규는 일본인 제작자를 전면에 내세워 총독부 로비를 진행하고, 각본가 이름을 일본인 이름으로 위장하는 등 검열관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치밀한 우회 전략을 총동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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