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가는 서양 음악과 결합한 일본 근대 노래의 총칭이며, 엔카(演歌)는 본래 메이지 유신 시기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연설하듯' 부르던 정치적 노래였다.
- 제국주의 군국주의화된 일제 정권의 탄압과 검열을 피하는 과정에서, 뜨거웠던 정치 엔카는 애상적이고 청승맞은 남녀 사랑 노래로 급격히 변질되었다.
- 조선의 '학도가'와 안창호의 '거국가' 역시 이러한 일본 엔카 음계의 강력한 영향 아래 탄생했으며, 이는 문화가 시대의 타이밍과 권력에 어떻게 굴절되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가 흔히 일본의 왜색 짙은 트로트이자 청승맞은 사랑 노래로 알고 있는 엔카(Enka)는 사실 사랑 타령이나 하려고 만든 노래가 아닙니다. 본래 엔카는 메이지 유신 시기, 무지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목숨 걸고 부르던 '연설하는 노래(演歌)'였습니다.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신을 아는 것, 즉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는 나 자신의 사주를 볼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중문화의 뿌리를 찾을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근대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여명기에 울려 퍼진 창가와 엔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곧 우리 대중음악의 뼈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깨닫는 첫걸음입니다.
1. 이 개념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무시했던 일본 문화의 마수
조선은 전통적으로 일본에 대한 강한 문화적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산 안창호도, 백범 김구도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망정 그들에게서 정신적으로 얻을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을 '왜놈'이라 부르며 졸라게 무시했던 것이죠. 하지만 정작 나라를 빼앗겼을 때 조선 지식인들이 맞닥뜨린 집단적 패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처럼 방자하게 굴지 않고, 을사늑약 전까지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자신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통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병합이 확실해지자마자 치밀하게 준비한 문화적 플랜을 폭발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창가(唱歌)'와 '엔카(演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만들었다고 믿었던 초기 근대 노래들조차 사실은 이 일본식 근대 음악의 강력한 자장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 개념을 명확히 아는 것은 우리의 근대성을 주체적으로 독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합니다.
2. 창가와 엔카의 명확한 정의
그렇다면 창가와 엔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사실 대중이 이 둘을 구별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기원과 성격을 뜯어보면 명확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첫째, 창가(唱歌)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 음악을 받아들이면서 만들어진 근대 일본 노래의 총칭입니다. 아동들의 동료, 기독교 찬송가, 군가, 정치적인 노래부터 남녀의 사랑 노래까지 서양의 평균율(도레미파솔라시도)에 입각해 만들어진 근대식 노래라면 전부 창가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단 20~30년 만인 1885년에 이미 풍금을 자체 생산해 전국 학교에 보급했습니다. 이는 전통 음악을 버리고 서양식 음악 교육으로 세계인이 되겠다는 국가적 결단이었습니다.
둘째, 엔카(演歌)는 창가의 하위 분류이자 매우 특별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탄생한 양식입니다. 한자를 자세히 보면 사랑을 속삭이는 연가(戀歌)가 아니라, 연설하다 할 때의 '연설 연(演)' 자를 씁니다. 즉, 글을 모르는 봉건 시대의 민중들에게 메이지 유신의 사상과 자유민권운동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연설하듯이 목숨 걸고 부르던 '정치적 투쟁가'였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며 활동하던 이들을 '엔카시(演歌師)'라고 불렀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연설하듯 노래를 불렀던 엔카의 기원을 살펴봅니다.
3.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지점: 투쟁가에서 신파조 사랑 노래로의 타락
여기서 진짜 소름 돋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엔카는 왜 청승맞고 음침한 단조의 사랑 노래가 되었을까요? 바로 권력의 탄압과 검열 때문입니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메이지 유신의 이상은 퇴색하고 일본은 급격히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길을 선택합니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자유민권 사상을 노래하던 엔카시들의 존재는 졸라게 불편한 눈엣가시였습니다. 일제 정권은 이 정치적 엔카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금지시켰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엔카시들은 살아남기 위해 검열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탈출구를 찾아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검열관들이 절대 시비 걸지 않는 주제, 바로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이었습니다.
가장 진보적이고 뜨거웠던 정치적 노래가 가장 애상적인 사랑 노래로 변질되고, 밝은 장조의 선율이 음침하고 청승맞은 단조의 음계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왜색 짙은 엔카의 슬픈 기원입니다.
4. 역사적 사례: 마스이 사다코와 조선의 '학도가'
이러한 엔카의 대중화와 변질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일본의 연극배우 마스이 사다코입니다. 1910년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 일본에는 거대한 톨스토이 붐이 일었고, 그의 소설 《부활》을 각색한 신파극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때 여주인공 마스이 사다코가 극 중에서 부른 주제가가 바로 그 유명한 엔카 '카츄샤의 노래(1914년)'였습니다. 이 음반은 당시 무려 2만 장이 넘게 팔리며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엔카는 철저한 대중적 흥행의 예술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정치적 투쟁가로 시작했던 엔카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변화해 온 과정을 살펴봅니다.
이 흥행 공식은 고스란히 조선 땅에도 이식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동네에서 부르고 다녔던 '학도가'를 기억하십니까?
"학문에 힘을 쓰고 덕행을 닦아야만...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기 전인 1903년에 나온 이 노래는 얼핏 들으면 나라를 구하자는 뜨거운 애국 계몽 가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음계를 가만히 뜯어보면, 완벽한 일본 엔카의 단조 5음계(도레미솔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근대 음악을 만들 힘이 없던 시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가까운 일본의 음악적 방법론(엔카의 음계)을 그대로 가져와 우리 노래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적 마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부터 이미 우리는 일본의 레퍼런스에 깊이 잠식당해 있었습니다.
5. 어떻게 이 개념을 현실 해석에 적용할 것인가: 시대와 타이밍을 읽는 눈
대중문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옛날 노래 제목 몇 개 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안에서 인간의 역사와 시대의 작동 원리를 읽어내기 위함입니다.
명리학은 타이밍입니다. 정치가든 예술가든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의 타이밍을 정확히 아는 것이 삶의 성패를 가릅니다. 도산 안창호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불세출의 연설가였습니다. 그는 나라를 빼앗기자 구구절절한 논리 대신, 민중의 가슴을 즉각적으로 때리는 비장한 노래 '거국가'("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 노래 하나 덕분에 그는 비록 몸은 이 땅에 없었을지언정, 조선 민중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예술적으로 잡아챈 것입니다.
반면, 시대의 흐름과 대중이 원하는 다이내믹한 타이밍을 읽지 못하고 학자처럼 늘 2초 늦게 반응하는 정치가들은 개고생만 하다가 대중에게 외면받기 십상입니다. 대중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고상한 훈화 말씀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싸우는 맹수 같은 결단력과 짜릿한 액션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엔카가 시대의 압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버리고 신파로 굴절되었듯이, 우리의 삶과 선택 역시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지금 내가 부르고 있는 노래가, 그리고 내가 내리고 있는 결정이 과연 나의 주체적인 의지인지, 아니면 나보다 앞서간 거대한 세력의 프레임에 나도 모르게 잠식당한 결과물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진짜 삶의 무기입니다.
FAQ
엔카(Enka)라는 이름의 진짜 유래는 무엇인가요?
엔카는 사랑을 뜻하는 연가(戀歌)가 아니라, '연설할 연(演)' 자를 쓴 연가(演歌)에서 유래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초기, 무지한 민중들에게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고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연설하듯이 노래를 부르던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의 뜨거웠던 정치 엔카가 왜 지금처럼 슬프고 청승맞은 사랑 노래로 변했나요?
1890년대 이후 일본 일제 정권이 군국주의화되면서 자유민권 사상을 담은 엔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검열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살아남아야 했던 엔카 가수(엔카시)들이 검열에 걸리지 않는 안전한 주제인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단조의 애상적인 멜로디에 담아 부르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형태로 변질되었습니다.
조선의 '학도가'가 일본 엔카와 관련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1903년에 발표된 '학도가'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배움을 독려하는 애국적인 가사를 담고 있지만, 그 내면의 음악적 음계는 일본 근대 엔카의 전형적인 5음계(도레미솔라 중심의 단조 음계)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자적인 근대 대중음악을 확립하기 전, 이미 일본의 음악적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