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민주주의가 평화로운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돋아난 것이 아니라, 침팬지 무리의 격렬한 권력 투쟁 속에서 싹텄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 수시로 충돌하는 침팬지 사회에서는 이를 억제하기 위한 권력 견제 메커니즘이 발달한 반면, 겉보기에 평화로운 보노보 사회는 오히려 모계 혈연을 바탕으로 권력 서열이 단단히 고착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 이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관점으로,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평등이라는 달콤한 과실 뒤에 가려진 치열한 기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던집니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민주주의가 인류의 평화롭고 평등한 본성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팬지 무리가 벌이는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다듬어졌을 수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칩니다. 흔히 우리는 평화롭고 화목한 공동체야말로 민주주의의 모태가 될 것이라 짐작하지만, 드 발의 저서 『내 안의 유인원』을 파고들다 보면 생각은 정반대로 뒤집힙니다. 매일같이 갈등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침팬지 사회에서 되레 권력을 나누고 감시하는 민주적 메커니즘이 활발히 작동하는 반면,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보노보 사회에서는 정작 이러한 장치를 찾아보기 힘든 까닭입니다.
이 기묘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침팬지 사회의 구체적인 사건 하나를 들여다보겠습니다. 드 발이 연구하던 동물원 무리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수컷 침팬지 '라위트'는 권력 구도에서 밀려나 있던 '니키'와 '예루'라는 두 수컷의 협공을 받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침팬지 세계에서 권력은 곧 종족 번식과 직결되는 암컷과의 짝짓기 기회를 의미하기에, 수컷들은 우위를 점하고자 쉴 새 없이 동맹을 맺고 깨뜨리며 거친 투쟁을 이어갑니다. 겉모습만 보면 약육강식의 비정함만 가득해 보이는 탓에, 침팬지의 행동을 인간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속성을 대변하는 근거로 삼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20세기 일부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정글식 무한 경쟁이나 제국주의적 폭력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침팬지의 야수성을 인간 본성의 뿌리로 인용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드 발은 이 대목에서 매우 강력한 반론을 던집니다. 우리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또 다른 일가인 보노보를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보노보는 무리 내에서 유혈 충돌을 벌이는 일이 극히 드물며,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성적인 접촉을 통해 긴장감을 지혜롭게 해소합니다. 게다가 아프거나 다친 동료를 살뜰히 보듬는 남다른 공감 능력까지 발휘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두 이웃 중 한쪽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다른 한쪽은 누구보다 평화로운 셈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침팬지 같은 야수성은 억누르고, 보노보처럼 평화로운 본성을 닮아가야 한다고 결론짓기 쉽습니다. 하지만 드 발은 이 공식이 그리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고 짚어냅니다.
첫째 이유: 폭력적인 침팬지 사회일수록 권력이 오히려 견제된다
침팬지 공동체의 첫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견고해 보이는 권력 구도가 언제나 도전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알파 수컷이라도 그 자리를 4~5년 넘게 지켜내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뭅니다. 힘이 조금이라도 부치거나 무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잃는 순간, 가차 없이 주저앉고 맙니다. 겉으론 거칠고 폭력적인 구조로 보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구에게나 부와 권력을 거머쥘 기회의 문이 늘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다자간의 촘촘한 견제 시스템입니다. 일반적인 원숭이 무리에서는 힘으로 이겨 권력을 잡은 개체를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지만, 침팬지 무리는 다릅니다. 이들은 승자뿐 아니라 싸움에서 밀려난 패자에게도 힘을 실어주며 균형을 잡으려 합니다. 단순히 싸움에서 이겼다고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리의 질서와 규칙을 어지럽히는 과도한 횡포를 부리면 장기적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데 치명타가 됩니다. 예컨대 한 침팬지 무리의 대장 격인 '지모'가 짝짓기를 두고 다른 수컷을 거칠게 쫓아가며 위협하자, 지켜보던 여러 암컷이 일제히 일어서서 집단적으로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저항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국 지모는 암컷들의 눈치를 보며 추격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침팬지 무리에서는 권력자가 독단적인 행동을 보일 때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이를 통제하는 등 독특한 민주주의의 원형이 나타납니다.
드 발은 이 흥미로운 장면을 두고 마치 현대 민주정치에서 표를 던져 의사를 표시하는 투표 과정과 무척 닮아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무리 막강한 지위에 있는 지모라 할지라도, 그 권력은 어디까지나 구성원들의 묵인과 지지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방에 위협과 충돌이 도사리는 불안정한 사회였기에, 그것을 조율하고 억누르기 위한 견제 장치 또한 기민하게 맞물려 작동해 온 셈입니다.
둘째 이유: 평화로운 보노보 사회는 오히려 권력이 고착된다
이에 반해 보노보 공동체는 침팬지와 비교하면 확연히 부드럽고 평화적인 분위기가 감돕니다. 자원이나 성적 기회 역시 훨씬 조화롭고 고르게 나누어 갖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그 아름다운 평화의 이면에는 묵직한 대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보노보 수컷의 위상은 자신의 치열한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서열에 의해 고스란히 결정됩니다. 그들은 장성한 뒤에도 여전히 어머니 품안의 자식으로 머물며 그 후광에 기대어 살아야 하고, 신분 상승을 원한다면 어머니가 세력을 키우기를 목놓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암컷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열의 바뀜은 무척이나 더디고 점진적인 방식으로만 이뤄지며, 사실상 절대 강자인 알파 암컷의 유고나 자연사 수준의 큰 변화가 있지 않은 한 견고한 계급 구도가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야망을 지닌 암컷이 혜성처럼 등장해 판을 흔들 여지 자체가 차단된 구조입니다. 결국 갈등과 폭력이 비껴간 평온한 낙원처럼 보이지만, 정작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자발적 제어 시스템은 전혀 자라나지 못한 셈입니다. 강력한 지배자가 처음부터 먹거리나 배우자를 독차지하려 들지 않으니, 공동체가 머리를 맞대고 그 횡포에 저항할 만한 저항의 근육을 기를 필요도 없었던 구조적 원인 때문입니다.
드 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배운 정치 철학자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홉스는 날것 그대로의 인류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즉 혼돈과 야만의 자연 상태 속에 있었으며, 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절대 권력이라는 국가를 탄생시켰다고 구상했습니다. 그러나 드 발은 영장류의 역사를 짚으며 인간은 태초부터 이미 엄격한 계급 질서 아래 묶여 있었고, 인류가 걸어온 길은 오히려 이 막강한 독점을 막기 위해 세력을 쪼개고 감시하는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설파합니다. 이 끊임없는 조율과 저항 과정 속에서 오늘날처럼 체계적인 법률과 민주 사회의 기틀이 싹텄다는 흥미진진한 발상입니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바라본 태초의 자연 상태는 갈등의 폭력과 불안을 다스릴 공권력이 없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민주적 가치는 오직 착한 이웃들 간의 선의와 상호 신뢰만으로 지탱될 수 있는 연약한 체제가 아닙니다. 권력의 비대화를 차단하도록 권한을 쪼개고 한시도 감시의 끈을 놓지 않는 단단한 제도화가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런 영리한 견제 메커니즘은 그토록 평화로운 보노보 사회가 아닌, 생존을 위한 투쟁이 들끓던 살벌한 침팬지 무리에서 한층 더 풍성하고 단단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장류 간의 선명한 대비는 드 발이 펼치는 다소 역설적인 가설에 묵직한 설득력을 보태줍니다.
셋째 근거: 찬란한 결과가 지저분한 과정에서 나올 수 있다
드 발은 이러한 논증을 정교하게 구축하면서 '베토벤의 오류'라는 독특한 비유를 가져옵니다. 불세출의 음악가 베토벤의 집안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쓰레기로 가득하고 늘 무질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아는 이들은 이토록 엉망진창인 처소에서 어떻게 그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향곡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습니다. 베토벤의 오류란 이와 같이 어떤 훌륭한 산물이 탄생하기까지의 지저분한 과정 역시 아름다워야만 할 것이라 넘겨짚는 직관적 착각을 일컫습니다. 인간을 한없이 이기적인 존재로 단정 짓는 학자들 역시 보통 적자생존이라는 잔인무도한 진화 프로세스를 들이밀며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곤 합니다. 승자가 패자를 집어삼키는 냉혹한 자연 상태에서 건져낸 인간이니, 그 속내 또한 당연히 악할 수밖에 없다고 밀어붙이는 셈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이고 잔혹한 생존 법칙 속에서 벼려진 이들이 오히려 극도의 배려심과 따뜻한 이타성을 길러내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보노보의 존재가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 흥미로운 논리는 역의 방향으로도 훌륭하게 작동합니다. 지금 우리가 품위 있게 누리는 소수와 약자를 보듬는 민주주의 제도는, 인간의 타고난 순수한 사랑이나 이타성에서 고결하게 피어난 꽃이라기보다 오히려 영토와 먹거리를 얻기 위해 거친 흙탕물 싸움을 불사하던 침팬지들의 오랜 생존 전략과 권력 암투로부터 흘러나온 찬란한 부산물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설이야말로 저자의 사유에서 가장 반짝이는 통찰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실의 우아함에 취해 그 씨앗이 심겨진 어수선하고 혼탁했던 바닥을 깡그리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끝내 그 장치가 품고 있는 진짜 목적과 작동 원리를 영영 비뚤어지게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의 한계: 평화와 평등의 기원을 잊는 순간의 위험
다만 저자가 풀어놓은 가설을 대할 때 스스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 있습니다. 첫째, 드 발 자신조차 이를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과학적 진리라기보다 깊이 있는 사유 과정에서 건져 올린 정교한 추론이라 명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침팬지와 보노보라는 단 두 종류의 피붙이를 관찰한 결과만을 토대로 광활한 인류사의 태동 전체를 빈틈없이 논하는 일은 분명 과도한 논리적 수비 범위일 수 있습니다. 둘째, 이 흥미로운 구조적 통찰을 곡해할 경우 자칫 과거의 편협했던 지식인들처럼 폭력과 경쟁만이 인류의 피할 수 없는 도덕적 본성이라며 면죄부를 주는 왜곡의 불씨로 악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긴장을 극복하기 위한 침팬지식 견제 시스템을 입에 올리는 것이, 타인에 대한 야만과 무단적 폭행을 장려하는 길잡이가 될 수는 절대 없는 노릇입니다.
셋째, 그리고 아마도 이 책 전반을 아울러 독자에게 보내는 가장 서늘한 경고는 따로 깊은 곳에 숨어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지는 듯한 달콤한 평화와 평등 아래 젖어 있는 사회는 그 평온한 상태에만 눈이 멀어, 대를 이어 가며 그 울타리를 짓고 다듬어 온 선배들의 피나는 투쟁을 손쉽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안락하고 투명한 질서 또한, 역사적으로 얽히고설킨 고단한 극복의 세월이 응집된 귀한 결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근원을 잃어버린 자들은 평화와 가치의 이면에 깔린 진짜 본질을 투명하게 보지 못하며, 결국 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 어느 쪽으로 키를 잡아야 할지 몰라 헤매게 됩니다. 드 발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건망증이 어쩌면 한 찬란했던 지적 문명이 서서히 바스러지고 몰락하는 임계점일지 모른다고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문명의 고결한 유산을 만끽하면서도 정작 그 토대가 어떤 피땀으로 다져졌는지 망각해 버리면, 그것을 위협하는 위기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는가
이 전복적인 서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침팬지의 삶이 백번 옳다거나 보노보의 평온을 깎아내리려는 일차원적인 선악 구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요체는 우리가 누리는 소중한 민주주의 제도가 그저 두 자물쇠를 꼭 채운 채 가꿔 온 평화로운 고집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부패하고 비대해지기 쉬운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사방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조율해야만 지켜지는 지독히도 섬세하고 나약한 구조물이라는 자각입니다. 겉보기에 더없이 평등해 보이던 보노보들의 낙원이 외려 교조적인 지배 권력의 세습과 기형적인 서열 세습의 온상이 되었다는 영리한 역설은, 찰나의 표면적인 평온보다 그 이면에 견제의 심장박동이 거침없이 뛰고 있는지 검증하는 감시 장치가 훨씬 막중함을 단단히 깨우쳐 줍니다.
결국 우리 영혼의 밑바닥에는 영토를 노리는 거친 침팬지의 피 끓는 지배욕과, 상처받은 동료를 투명하게 연민하는 보노보의 공감 가득한 눈빛이 모두 고스란히 엮여 있을 테지요.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지레짐작으로 아득한 야성을 감추거나 위장한 선의만을 편향적으로 좇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 복잡다단한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직시하고, 지금의 위대한 규약들이 얼마나 울퉁불퉁한 과정을 버티며 이 연약한 자리에 올라섰는지를 매번 또렷이 길어 올리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도중에 자신에게서 어떤 신비로운 유인원의 그림자를 읽어내고 계신가요?
FAQ
프란스 드 발은 어떤 학자인가요?
침팬지와 보노보를 비롯한 영장류를 오랜 세월 세심하게 관찰하고 추적하며 학계의 판도를 바꾼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입니다. 저서 『내 안의 유인원』을 통해 유인원의 정교한 사회적 행태를 거울삼아 우리 인간의 깊은 내면과 오랜 통치 시스템의 탄생 배경을 탁월하게 재해석해 냈습니다.
침팬지와 보노보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요?
침팬지 사회는 알파 수컷들의 맹렬한 동맹과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매우 투쟁적이고 거친 생태를 띠는 반면, 힘의 남용을 견제하려는 다수의 연대가 살아 움직입니다. 반대로 보노보 사회는 폭력 사태가 거의 없고 성적 교류로 평화를 지키는 온화한 공동체이지만, 서열이 주로 모계 혈통을 통해 대물림되어 한 번 잡은 지배 구조가 견고하게 정체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 주장은 침팬지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것 아닌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의 명확한 요지는 무자비한 무단 폭력을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며, 민주주의의 기틀을 이룬 위대한 상호 감시 체제가 도대체 어떤 지난한 생존 역학에서 파생되었는지 추적하자는 데 있습니다. 원시적인 폭력 자체를 찬양하거나 그것에 일말의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과는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홉스는 인간이 야만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살벌한 투쟁의 공포 속에서 안전을 살려내기 위해 비로소 거대한 사법 공동체를 탄생시켰다고 가정했습니다. 이에 반해 드 발은 인류의 조상들이 사실은 애초부터 단단한 집단 권력 질서 안에서 눈을 떴고, 그 권력가들의 독주를 저지하고 견제하려는 일련의 저항과 노력이 발효되며 서서히 성숙한 민주 정부의 씨앗으로 안착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