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기억하는 '완전 기억 능력'은 오히려 일반적인 언어 개념과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힘을 마비시킵니다.
- 칸트의 선험적 종합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인간의 인식이 시간의 여러 지점을 연결하는 '정신의 벽'을 통해 작동함을 보여줍니다.
- 우리의 앎을 가로막는 이 장벽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한계 너머의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과연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보의 완벽한 집합일까요? 흔히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더 많이, 더 정확하게 받아들일수록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철학자 칸트,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소설가 보르헤스의 통찰을 따라가 보면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외부 정보의 완전한 수용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정신이 세운 '장벽'과 의도적인 '생략'을 통해 비로소 창조되는 것입니다. 즉, 무한한 정보에 압도되지 않도록 경계를 긋고 대상을 두루뭉술하게 묶어내는 한계야말로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역설
먼저 1929년 소련의 기자였던 솔로몬 셰르셉스키의 흥미로운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회의 내용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완벽하게 기억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의 검사에서도 그의 기억력에는 뚜렷한 한계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죠. 하지만 이 엄청난 능력은 그에게 축복이 아니라 결코 부러워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셰르셉스키는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숫자의 패턴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정보를 선별적으로 보는 능력이 없었고, 모든 세부 사항을 동등하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꽃을 볼 때도 각각의 꽃이 지닌 구체적인 차이점에만 압도되어, 이를 '꽃'이라는 하나의 일반 명사로 묶어 이해하는 것을 무척 어려워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천재 소설가 보르헤스는 단편 소설을 통해 이와 닮은 인물인 '푸네스'를 창조해 냈습니다. 푸네스 역시 모든 기억과 경험을 완전히 복귀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언어 사용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3시 14분에 본 개와 3시 15분에 본 개를 똑같은 '개'라는 단어로 부르는 것에 짜증을 냈습니다. 그가 보기에 두 시점의 개는 완전히 다른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에긴턴은 그의 책 《천사들의 엄격함》에서 푸네스의 경험에 내재된 심오한 역설을 지적합니다. 푸네스가 두 시점의 개가 다르다고 짜증을 내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시간'이라는 일반적인 기준을 이미 머릿속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즉, 구체성에 완전히 파악된 것처럼 보이는 이들조차 사실은 이미 일반성이라는 마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의 사유를 통해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지적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칸트의 통찰, 자아의 통합 능력이 만드는 현실
그렇다면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진짜 메커니즘은 무엇일까요?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이 끊임없이 나열되는 정보의 묶음을 경험할 뿐이며, '자아'라는 것은 그 정보들을 사후에 주관적으로 엮어낸 가상의 단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독립적인 정보들을 먼저 받아들이고 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독립적인 정신(자아)이 먼저 세워져 있어야만 세계의 정보를 취합하여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아의 취합 능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정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자아가 시간을 건너뛰어 여러 지점을 연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조용한 방에 있을 때조차, 우리는 내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시선을 돌림에 따라 장면이 바뀐다는 최소한의 변화를 인지합니다. 이 변화를 인식하려면 조금 전의 시점 A와 지금의 시점 B를 연결하는 정신의 힘이 필수적입니다. 경험이 외부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적극적으로 여러 시점을 잇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경험주의 철학자 흄은 인간의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수많은 정보의 나열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과 언어의 동적 성질
이러한 칸트의 인식론적 통찰은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제시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미시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감지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순간들을 잇는 활동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관측하려는 순간의 차이가 너무나도 미세해져서 우리가 가진 인식의 틀로 더 이상 이 시점들을 연결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대상을 감지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대상을 어떻게든 관찰하기 위해서는 관찰의 정확도를 일부 포기함으로써 시점 간의 여유 공간을 확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인간의 언어에 '정적인 성질'과 '동적인 성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연계를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정적인 성질이라면, 시나 소설처럼 유연하게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동적인 성질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정적인 묘사에만 치중하면 개념 간의 복잡한 연합이 희생되며, 이 연합이 없으면 우리는 풍부한 실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의 이해는 언어를 어느 정도 두루뭉술하고 동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셰르셉스키나 푸네스처럼 모든 구체적인 순간에 각기 다른 언어를 붙이려 한다면(극단적인 정밀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소통하거나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대상을 같은 언어로 묶어내는 '동적인 타협'이야말로 현실을 파악하는 열쇠입니다.
고정되지 않은 장벽, 아인슈타인의 도전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 한계와 언어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곧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성급하게 단정 짓고 멈춰 서야 함을 의미할까요?
역사적으로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너머로 나아가는 이론적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언어적 한계를 너무 일찍 규정해 버리지 말고, 언어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론적 이해의 가능성을 계속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획하는 '벽'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현실을 경험합니다. 이 벽이 없다면 세상은 그저 무작위적인 정보의 파편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벽이 얼마나 확정적이고 단단한 벽인지는 아직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벽의 본질을 완전히 깨우쳤다"고 확언하며 한계를 고정하는 태도는 오히려 비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한계의 벽이 열어주는 새로운 희망
우리는 우리의 앎을 가로막는 벽에 대해 결코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벽 자체가 앎의 영역과 무지의 영역 사이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역설적인 희망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언젠가 그 한계의 벽을 움직이고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정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부단히 넓혀갈 수 있는 인식의 영토 위에 서 있는 셈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윌리엄 에긴턴의 《천사들의 엄격함》을 바탕으로 현실과 인식의 벽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요. 여러분은 우리가 마주하는 이 현실의 한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만든 인식의 벽을 조금씩 넓혀갈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댓글로 의견을 남겨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FAQ
완전 기억 능력이 왜 일반적인 개념 이해를 방해하나요?
일반적인 개념이나 단어는 서로 다른 구체적 대상들의 공통점을 추출하고 세부적인 차이점들을 생략함으로써 성립합니다. 하지만 완전 기억 능력을 가진 이들은 모든 미세한 차이점을 동등하게 인식하므로, 대상을 하나의 보편적인 카테고리로 묶어내는 추상화 과정을 거치지 못해 이해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칸트가 말한 '자아의 취합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나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파편적인 감각 정보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주체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시점의 경험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종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칸트는 이 주체적인 종합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일관된 경험과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언어의 한계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대상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고정하려 할수록(정적인 언어), 시점 간의 연결과 의미의 연합(동적인 언어)은 희생됩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은 우리가 대상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고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이는 완벽한 정밀함을 추구할 때 오히려 인식의 틀이 무너지는 언어적·인식론적 한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