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산맥을 배경으로 포도밭이 펼쳐진 조지아 카헤티 지역. 약 8000년의 와인 역사를 간직한 조지아에서 카헤티는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 꼽힌다 ./사진-픽사베이 |
[투어코리아=김홍덕 기자] 이제는 사진 찍으러 바쁜 일정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관광지를 옮겨 다니는 여행 대신, 한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물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깊숙이 경험하는 여행이 뜨고 있다. 나홀로 여행이든 친구, 가족이랑 소규모로 떠나는 여행이든 일정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지에서의 감정과 감성에 따라 움직이는 게 대세이다. 거기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혹은 방문지의 특성에 맞춰 여행을 떠난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될 터.
그런 의미에서 코카서스는 흥미로운 테마여행지다. 동서양을 이어주던 무역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중간 지역인 코카서스 3국(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은 독특한 음식과 와인 문화를 발전시킨 곳이다. 깨끗한 자연과 청정한 공기가 빚어내는 코카서스의 와인은 서로 인접한 세 나라별로 역사, 문화, 향, 맛이 제각기 다른 특징을 제공한다. 그중에서도 와인 여행의 첫 목적지로 주목할 곳이 조지아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와인 생산국과는 또 다른, 무려 약 8000년의 와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눈 덮인 코카서스산맥을 배경으로 중세 석조 방어탑과 전통 가옥이 들어선 조지아 스바네티의 우쉬굴리 마을 / 사진-픽사베이 |
인류 최초의 와인 생산국, 조지아…8000년 전에도 포도주를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와인의 종주국은 어디일까? 대부분은 프랑스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포도의 품종이 프랑스에는 320여종인데 비해 여태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무려 525종의 포도가 재배되는 나라가 있다면?
인류 최초의 와인 생산국이지만 아직 잘 안 알려진 ‘조지아’가 바로 그곳이다. 우리에게 ‘그루지야’로 알려진 구소련 연방의 한 지방으로, 1991년에 CIS로 독립된 나라들 중에 ‘조지아’라는 나라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튀르키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제일 꼭대기 산간지방에 있는 나라다.
소련 연방에 속해있던 시절에는 오두막집처럼 작은 규모로 집집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거대 산업으로 커버린 와인의 나라. 이 나라의 그 깊고 오래된 전통이 무려 8,000여 년이나 되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조지아 국립와인청은 자국의 와인 역사를 ‘8000년 연속 빈티지(8 thousand continuous vintages)’로 소개하고 있다. 또 525개의 고유 지역 포도 품종을 주요 자산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발견도 있다. 조지아의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를 분석한 결과 기원전 약 6000년 무렵 포도주 양조와 관련된 흔적이 확인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포도 와인 생산의 증거 중 하나다. 조지아가 ‘와인의 요람’이라는 표현을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크베브리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조지아의 고급 리조트 ⓒ김홍덕 |
땅속 항아리에서 와인이 익는다…‘크베브리’의 비밀
조지아 와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크베브리(Qvevri)’다.
크베브리는 진흙과 같은 점토로 만든 것으로, 달걀처럼 아래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우리나라의 김치독처럼 땅속에 넣어 포도를 숙성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크베브리를 땅속에 묻고 그 안에서 와인을 발효하고 숙성한 것.
유약을 바르지 않은 투박한 모습의 크베브리ⓒ김홍덕 |
전통적인 방식에서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알을 크베브리에 넣어 발효·숙성한다. 어두운 땅속에 묻힌 크베브리는 외부 기온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아 일정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 이 과정에서 빚어진 와인은 품종과 양조 방식에 따라 특유의 깊은 향과 개성을 드러낸다. 대체로 1,000ℓ 이상의 크베브리에서 숙성된 와인이 상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 오래된 양조문화는 세계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았다. 유네스코는 2013년 ‘고대 조지아 전통 크베브리 와인 제조법’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했다.
독특한 자연이 만들어낸 와인
코카서스산맥 아랫자락에 분지처럼 둘러싸인 조지아의 광활한 포도원은 이른 아침의 이슬과 따뜻한 햇살로 일교차가 커 독특한 포도의 맛과 향을 만들어낸다.
만년설과 빙하에서 흘러나온 물을 머금은 땅, 울창한 산림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와 비옥한 토양이 만들어내는 포도의 풍성함은 대단하다. 지금도 도심을 벗어나면 일반 가정집 마당 곳곳에 포도나무가 심겨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포도 품종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포도알의 색깔도 총천연색을 이룬다.
이칼토 수도원에 전시된 크베브리들 ⓒ김홍덕 |
525개 토착 품종…조지아에서 만나는 ‘낯선 와인’
조지아 와인이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포도 품종이다. 조지아 국립와인청은 525개의 고유 지역 품종을 자국 와인의 중요한 특징으로 소개한다. 세계적인 와인 시장에서 흔히 접하는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샤르도네와는 다른 이름의 포도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적포도 품종은 ‘사페라비(Saperavi)’다. 조지아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적포도 품종으로, 짙은 색과 풍부한 탄닌, 산미를 지닌 와인을 만들어낸다. 전통적인 크베브리 방식뿐 아니라 유럽식 양조법으로도 생산된다.
특히 조지아 최대 와인 산지인 ‘카헤티(Kakheti)’는 와인을 테마로 여행하기 좋은 지역이다. 알라자니와 이오리 유역을 중심으로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펼쳐져 있으며, 사페라비와 르카치텔리 등 조지아를 대표하는 품종을 만날 수 있다.
전통 와인 무료 시음의 기회를 제공하는 조지아 와인샵들 ⓒ김홍덕 |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가 마시던 것은?
영어권 국가에서 자주 영화로 제작되는 소재 가운데 ‘노아의 방주’가 있다. 이야기 속 주인공 노아는 수천 년 전 혼탁해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120년에 걸쳐 배를 만들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비(물)로 쓸어버렸지만 노아의 배는 산꼭대기에 닿았고, 그 안에 타고 있던 동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물이 빠지고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기 시작한 곳이 지금의 조지아 인근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천 년 전의 이야기인 데다 지금과 같은 국가 간 경계가 없던 시대였다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
어쨌든 자신이 세상을 구했다는 우쭐함에 흥이 오른 노아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아가 마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성경 속 기록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포도주다.
그 오랜 와인 문화의 흔적 가운데 하나가 와인 저장 용기인 크베브리다. 조지아와 국경을 맞댄 아르메니아에서도 인류의 초기 와인 생산 흔적을 보여주는 고대 와인 저장 동굴이 발견된 바 있다.
냉전 전후 자본주의 국가였던 프랑스가 와인의 산업화와 세계 시장 개척에 성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것과 달리, 조지아는 사회주의 체제인 소련 연방에 속해 있어 오랫동안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한 상업화와 홍보에는 상대적으로 제약이 있었다.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조지아 와인은 해외 시장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조지아 와인은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