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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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 길에 철문이 생긴 이유

spark_icon7분 지식
  • 아파트 담장을 허물던 선의의 운동은 사생활 침해와 치안 우려 때문에 다시 담을 쌓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 지자체는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며 공공보행통로 개방을 유도했으나, 완공 후 철문을 걸어 잠그는 갈등이 반복되었습니다.
  • 결국 단순 행정 지침이나 약속 대신 등기부에 통행 목적의 지역권을 직접 설정하는 법적 강제 장치로 진화했습니다.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 중에 입주민뿐만 아니라 외부인 누구나 24시간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서울 개포동 재건축 단지처럼 근린공원과 맞닿은 통로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기껏 지어놓고 입구에 굳게 철문을 달아 일반인의 통행을 막아버리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사유지인 아파트 땅 위에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공공보행통로가 들어서고, 거기에 다시 빗장이 걸리는 현상은 단순한 주민 갈등이 아닙니다. 이 통로 하나에 지난 30년간 한국 도시계획이 겪어온 시행착오와 공학적·법적 메커니즘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습니다.

선의로 시작된 담장 허물기가 부딪힌 현실

시작은 1996년 대구에서 출발한 담장 허물기 운동이었습니다. 대구 서구청이 청사 담장부터 허물기 시작했고, 1998년부터는 시민운동으로 번지며 학교와 주택은 물론 아파트까지 담을 걷어냈습니다. 담을 허물면 도둑이 들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개방된 공간에 나무와 꽃을 심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지자체도 적극적이었습니다. 2012년 무렵에는 아파트가 담을 허물고 조경을 조성하면 1천만 원 넘는 보조금을 지원했고, 2018년까지 대구에서만 허문 담의 길이가 30km를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서울과 부산 등 전국 주요 대도시들도 이 모델을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모든 개방이 '주민의 선의'에만 기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외부인이 자유롭게 드나들자 단지 내 잔디밭이 훼손되고 밤늦게 낯선 사람이 돌아다니는 등 사생활 침해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결국 담 없이 지었던 아파트가 2년 만에 다시 담을 세우거나, 1.4m짜리 담을 2m로 더 높여 쌓는 단지들이 생겼습니다. 선의로 열었던 문이 선의의 한계로 다시 닫혀버린 셈입니다.

용적률 거래라는 인센티브의 딜레마

선의만으로는 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행정 당국은 도시계획 차원의 보상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단지 내에 24시간 열려 있는 길인 공공보행통로를 내어주는 대가로 아파트 층수를 더 높이 지을 수 있게 용적률 인센티브를 얹어준 것입니다.

실제로 2023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한 정비구역 13곳 중 10곳이 이러한 공공보행통로 설치 조건을 달았습니다. 최고 49층으로 재건축을 추진하는 서초구의 한 단지 역시 전체 약 300% 용적률 중 10%가량을 공공보행통로 제공 대가로 확보했습니다.

3D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표현된 손이 흰색 봉투를 열고 있는 모습이며, 화면 중앙 하단에는 '100만원이'라는 자막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공공 보행 통로를 제공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용적률 인센티브는 단순한 혜택을 넘어 도시 공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복잡한 계산이 됩니다.

문제는 아파트 입주가 끝나자마자 입구를 걸어 잠그는 단지가 속출했다는 사실입니다. 개포동의 한 단지도 준공 직후 잠시 길을 열었다가 외부인 출입을 막는 철문을 세웠습니다. 구청이 조합을 고발해 조합장에게 벌금 100만 원이 선고되기도 했지만, 철문은 쉽게 철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행정청이 제공했던 용적률을 도로 회수하면 되지 않냐고요? 이미 다 지어진 건물의 층수를 강제로 깎아낼 물리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동주택 관리법령에도 공공보행통로 관리에 관한 강제 규정이 마땅치 않아, 벌금형 수준의 제재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행정적 약속에서 물권인 '지역권'으로의 전환

지자체는 여기서 발상을 뒤집습니다. 길을 열어두겠다는 구두 약속이나 행정 지침에 의존하는 대신, 토지 등기부등본에 남의 땅을 통행 목적으로 쓸 수 있는 물권인 지역권(地役權)을 직접 설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파트 단지 사이의 보행로와 건물들을 위에서 내려다본 3D 그래픽 영상으로, '땅의 권리로'라는 자막이 중앙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지자체와의 행정적 약속이 아닌, 보다 강력한 법적 권리인 지역권을 통해 통행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역권이 등기되면 일반 시민은 해당 사유지 통로를 합법적으로 지나갈 수 있는 확고한 법적 권리를 갖게 됩니다. 서울시 지구단위계획 기준에 따르면, 공공보행통로를 조성해 기준용적률의 약 3% 수준의 인센티브를 받는 경우 그 필수 조건으로 '통행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권 설정'을 못 박아두고 있습니다.

사법부의 판단도 단호합니다. 광주의 한 아파트 단지가 공공보행통로를 막았다가 지자체로부터 원상복구 명령을 받고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24시간 상시 유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아파트 측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통로 개방이 단순 권고가 아니라 법적 구속력을 지닌 의무임을 확인한 셈입니다.

공공성과 사유재산권의 균형을 유지하는 실전 조건

법적으로 지역권을 설정했다고 해서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길을 개방하면서 발생하는 보안등 전기료, 쓰레기 청소, 보도블록 파손 보수 비용을 오롯이 입주민에게만 떠넘길 경우 분쟁은 재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연결된 산책로와 건물들을 위에서 내려다본 3D 그래픽 모델

공공성을 위해 단지 내 길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인센티브를 받지만, 이후 관리 주체와 운영 방식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따라 최근 지자체들은 공공보행통로 유지·관리 비용을 분담하는 현실적 대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예컨대 서울 강동구는 공공보행통로를 상시 개방한 단지에 보안등 전기료와 청소비 일부를 지원하고, 보도블록 보수와 경계 조경 관리까지 예산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지역권 등기 의무화 조건은 새롭게 인허가를 받는 재건축 단지에 주로 적용되며, 이미 지어진 구축 단지에는 소급 적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전히 서울 일부 단지에서는 펜스를 두르고 외부인의 놀이터 이용 시 페널티를 부과하는 등 갈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 담장을 허물던 순수한 선의에서 시작해, 층수를 더 얻기 위한 용적률 거래를 거쳐, 등기부에 새겨 넣는 강력한 법적 권리인 지역권까지. 아파트 단지 안 모두의 길은 이러한 치열한 제도적 진화를 거쳐 탄생한 것입니다.


FAQ

공공보행통로가 있는 아파트는 누구나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나요?

네, 공공보행통로는 재건축 과정에서 용적률 인센티브 등을 받는 대가로 일반인의 24시간 상시 통행을 허용하도록 계획된 통로입니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통로에 철문을 달아 막으면 어떻게 되나요?

지자체의 시정명령 및 원상복구 명령이 내려질 수 있으며, 불응하면 고발을 통해 벌금형 등의 형사 처벌이나 행정 제재를 받게 됩니다. 법원 역시 통로 폐쇄 처분 취소 소송에서 기각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지역권 설정이 기존에 지어진 모든 아파트에 적용되나요?

아닙니다. 지역권 등기 조건은 최근 지구단위계획 및 정비계획 고시를 통해 새롭게 인센티브를 받는 신규 인허가 단지에 주로 적용되며, 이미 준공된 구축 아파트에는 소급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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