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장기전세주택은 빈 땅을 매입하는 대신 재건축 단지에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고 늘어난 가구를 토지 무상 양여 방식으로 확보한 공공 전세 제도입니다.
- 시세 80% 이하의 보증금과 최장 20년 거주 기한은 내 집 마련 전 자산을 형성하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으며, 단지 내 낙인을 없애기 위한 소셜믹스로 진화했습니다.
- 2027년 첫 20년 만기 도래를 앞두고 퇴거 쟁점이 불거진 가운데, 서울시는 이를 신혼부부용 '미리내집'으로 개편해 다음 세대로 주거 기회를 순환시키고 있습니다.

서울의 신축 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면 겉으로는 완전히 똑같은 동과 현관문을 지녔지만 소유자가 서울시나 SH공사인 집들이 섞여 있습니다. 이 집들은 주변 전세 시세의 80% 이하 보증금으로 최장 20년까지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장기전세주택(시프트)'입니다.
2년마다 치솟는 전셋값과 잦은 이사 부담에 시달리던 무주택 서민에게 장기전세는 주거 안정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사다리였습니다. 하지만 빈 땅이 바닥난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이런 저렴한 공공 전세 아파트를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면에는 도시계획의 틈새를 정교하게 파고든 행정 메커니즘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 장기전세주택이란 무엇인가: 개념과 등장 배경
장기전세주택은 2007년 '집은 사는(Buying) 것이 아니라 사는(Living) 곳'이라는 기치 아래 도입된 공공임대주택 모델입니다. 핵심 조건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합니다. 주변 전세가의 80% 이하로 보증금을 책정하고, 2년마다 재계약하되 보증금 인상 폭을 연 5% 이내로 엄격히 제한해 최장 20년 동안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합니다.

용적률 완화 혜택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일부 가구를 공공 전세 주택으로 확보하는 방식이 서울 도심 주택 공급의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제도 도입 초기인 2007년 5월 송파 장지와 강서 발산 지구에서 첫 481세대가 공급되었고, 발산 3단지 전용 84㎡(34평형)는 시세의 62% 수준인 1억 3천만 원에 선보였습니다. 서민들이 주거 불안 없이 목돈을 모을 수 있는 파격적인 기회를 제공하며 평균 청약 경쟁률이 8대 1을 웃도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2. 공급의 딜레마: 빈 땅이 없는데 어디에 지을 것인가
초기 장기전세는 SH공사가 발산, 장지, 은평 등 대규모 택지개발지구의 땅을 통째로 매입해 직접 짓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 시내에서 대규모로 개발할 수 있는 공공 택지는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그렇다고 외곽이나 특정 구역에 임대 아파트만 대단지로 모아 지으면 '임대 단지'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또 다른 부작용이 뒤따랐습니다.
땅은 부족하고 모아 지으면 낙인이 찍히는 진퇴양난 속에서 서울시는 발상을 전환했습니다. 시가 직접 땅을 매입하는 대신, 민간이 추진하는 아파트 재건축·재개발 사업 속으로 들어가는 전략을 택한 것입니다.
핵심은 '용적률 거래'였습니다. 역세권이나 재건축 구역에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해 같은 대지 위에 건물을 더 높이 올릴 수 있게 허용하는 대신, 완화된 용적률로 늘어난 가구 수의 50%를 시가 공공 기여분으로 인수했습니다. 이때 서울시는 건물 표준건축비만 부담하고 토지는 기부채납(무상 양여) 방식으로 확보해 천문학적인 토지 매입 비용을 완전히 덜어냈습니다.

단지 내 임대 세대를 분리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담장을 치던 과거의 주거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구조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 사례가 2009년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전용 84㎡ 장기전세입니다. 강남 요지의 신축 대단지 아파트가 당시 주변 전세가의 절반 수준인 보증금 3억 원에 공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토지비 절감 모델이 있었습니다.
3. 소셜믹스와 20년 만기의 오해
민간 아파트 단지 안에 공공 전세를 확보하자 단지 내 차별 문제가 다시 불거졌습니다. 초기 일부 재건축 단지에서는 장기전세 세대를 특정 동에 몰아넣거나 커뮤니티 시설 이용을 제한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21년부터는 동·호수를 일반 분양 세대와 무작위로 섞는 완전 소셜믹스 추첨제가 의무화되었습니다. 한강 조망이 가능한 로열층이나 로열동에도 장기전세 물량이 고루 배정되면서 겉으로는 어떤 가구가 시의 주택인지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흔히 '20년 동안 살 수 있으니 20년을 꽉 채워 머무는 제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통계는 사뭇 다릅니다. 퇴거 가구의 평균 거주 기간은 약 6년 9개월에서 7년 6개월로 20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렴한 주거비 덕분에 거주자의 70% 이상이 매달 평균 62만 원 이상을 저축할 수 있었고, 퇴거 가구의 70%가 내 집 마련에 성공해 독립했습니다. 장기전세가 평생 머무는 종착지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해낸 셈입니다.
4. 2027년 첫 만기 도래와 차세대 '미리내집' 전환
2007년에 입주한 초기 세대의 20년 거주 기한은 2027년부터 순차적으로 만료됩니다. 2027년 310가구를 시작으로 2031년까지 총 9,361가구의 계약이 종료되어 퇴거 수순을 밟게 됩니다.

20년의 만기가 다가오면서 거주 연장이나 분양 전환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일부 입주민은 주변 시세가 크게 올라 기존 보증금만으로는 인근에 거처를 구하기 어렵다며 분양 전환이나 거주 연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시는 최초 계약에 명시된 '분양 전환 불가 및 최장 20년' 원칙을 명확히 견지하고 있습니다. 장기전세의 20년 기한은 특정 개인에게 영구히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라 다음 무주택자에게 기회를 넘겨주기 위한 주거 순번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회수되는 물량과 신규 공급분은 출산율 제고와 청년 주거 안정을 겨냥한 장기전세 2탄, 곧 '미리내집(신혼부부 안심주택)'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미리내집은 입주 후 자녀를 출산할 때마다 거주 기간이 최장 20년까지 늘어나며, 자녀 수에 따라 20년 뒤 시세의 80~90% 수준으로 우선 매수할 수 있는 분양 전환 권리까지 주어집니다.
5. 주거 정책 관점에서 장기전세를 해석하는 기준
장기전세주택은 도심 내 가용 토지가 바닥난 과밀 환경에서 공공과 민간이 인센티브를 교환하며 주거 안정을 도모한 대표적인 도시계획 모델입니다.
- 자산 형성의 발판으로 접근: 장기전세는 장기 거주 그 자체보다 저렴한 전세 보증금을 토대로 자본을 축적해 내 집 마련의 기반을 다지는 전환기 주거 수단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 순환형 복지 구조의 이해: 20년 만기 제도는 단순한 퇴거 압박이 아니라 더 많은 무주택 대기자에게 공평한 주거 사다리를 제공하기 위한 공공성의 핵심 축입니다.
토지를 직접 사지 않고 용적률 인센티브로 도심 요지에 물량을 확보하며, 소셜믹스로 사회적 차별을 지우고, 정해진 기한 후 다음 세대로 바통을 넘기는 구조. 서울의 장기전세주택은 물리적 한계를 역발상으로 풀어낸 지속 가능한 도시 주거 시스템으로 진화해가고 있습니다.
FAQ
장기전세주택은 20년 거주 후 일반 분양으로 전환받을 수 있나요?
아닙니다. 초기 장기전세주택은 모집 공고와 계약 당시 분양 전환이 불가능한 최장 20년 임대 조건으로 공급되었습니다. 다만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새로 개편된 '미리내집'은 다자녀 출산 시 시세보다 저렴하게 우선 분양받을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됩니다.
민간 재건축 단지 안에 어떻게 저렴한 공공 전세가 들어갈 수 있었나요?
서울시가 재건축 조합에 법적 상한까지 층수를 올릴 수 있는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그 대가로 늘어난 주택의 절반을 토지비 부담 없이(기부채납) 표준건축비만 지급해 인수했기 때문에 저렴한 보증금 공급이 가능했습니다.
장기전세주택의 보증금 인상 기준은 어떻게 되나요?
장기전세는 2년마다 재계약을 진행하며, 관련 법령에 따라 보증금 인상 폭이 최대 5% 이내로 엄격히 제한되어 일반 전세 시장 대비 주거비 변동 위험이 매우 낮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