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권맨 출신 김영준 작가는 고전적인 장롱 속 나전칠기를 현대적 조형 예술과 IT 기기 케이스 등으로 확장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 일반적인 옻칠을 넘어 1년에 나무 한 그루당 5~10g만 채취되는 희귀한 황칠을 접목해 천 년의 빛과 영구적인 보존성을 구현했습니다.
- 전남 완도 보길도의 전복패와 자생 황칠 수액을 지키려는 현장의 노력은 잊혀가던 전통 공예의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고단한 장롱 속에 갇혀 있던 전통 자개가 현대의 첨단 IT 기기와 세계적 거장들의 공간에서 다시 빛나고 있습니다. 10년간 잘나가던 증권맨의 삶을 뒤로하고 서른여덟의 나이에 나전칠기 외길에 뛰어든 김영준 작가의 손끝에서, 천 년의 바다가 빚어낸 전복 껍데기와 만 년을 버틴다는 황칠 수액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예술로 태어났습니다.
1. 세계적 거장들이 주목한 한국 공예의 현재
과거 혼수용 가구의 상징이었던 나전칠기가 이제는 글로벌 명사들의 컬렉션과 국가적 의전의 중심에 서고 있습니다. 전통 공예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현대 미술이자 산업적 가치로 확장되는 순간입니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나전칠기는 이제 전통 공예를 넘어 현대 예술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김영준 작가의 작품은 지난 2007년 프랑스 파리 전시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빌 게이츠는 현장에서 두 점의 작품을 구입한 데 이어 당시 한국 대통령에게 선물하기 위해 무려 1억 원 상당의 X박스(Xbox) 게임기 자개 커스텀을 의뢰했습니다. 플라스틱 표면에 자개를 접목한 것은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이후 애플의 스티브 잡스 역시 맞춤형 휴대폰 케이스 작업을 의뢰했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에는 명동성당 미사에서 사용된 교황 의자에 33번의 칠을 올린 자개 문양이 새겨지며 한국 공예의 깊은 품격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2. 장롱 속 민속품에서 현대 조형 예술로 거듭난 이유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아끼던 나전 장롱 속 학과 모란꽃의 신비로운 빛은 김 작가가 안정된 금융인의 길을 버리고 공예에 33년을 바치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과거의 양식을 답습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전복 껍데기 본연의 빛깔과 질감을 면밀히 관찰하며 나전칠기 예술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기존의 나전칠기가 규격화된 문양을 오려 붙이는 평면적인 방식이었다면, 작가는 전복 껍데기 하나를 통째로 쓰거나 빛깔과 결이 다른 조각을 무수히 나누어 재배열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하나의 껍데기를 잘게 쪼개어 배치하면 빛이 닿는 각도마다 전혀 다른 오묘한 색채 스펙트럼이 피어납니다. 전통 기법의 원형은 보존하되 표현은 오늘날의 감각에 맞춘 혁신이 통했던 것입니다.
3. 옻칠을 넘어 '만 년의 황금빛' 황칠을 품다
작가는 10여 년 전부터 검붉은 빛을 띠는 전통 옻칠 대신 영롱한 황금빛 광채를 유지하는 황칠(黃漆)을 자개와 결합하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예부터 '옻칠 천 년, 황칠 만 년'이라 불릴 만큼 황칠은 방부성과 내구성이 뛰어나며 변치 않는 투명한 황금빛을 자랑합니다.

상처 입은 나무가 스스로를 치유하며 흘려보내는 귀한 진액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귀한 황금빛으로 변해갑니다.
이 귀한 재료를 얻기 위해 작가는 여름마다 청정 바다를 품은 전남 완도 보길도를 찾습니다. 보길도 바다에서 다시마를 먹고 자라 깊고 단단한 빛을 머금은 대형 전복패를 구하고, 산자락에서는 20여 년간 황칠나무 숲을 가꿔온 김종훈 대한민국 황칠문화연구원장과 손을 잡았습니다. 황칠나무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흘려보내는 유백색 진액은 산화되며 찬란한 황금빛으로 굳어집니다. 30년생 나무 한 그루에서 1년에 채취할 수 있는 양은 고작 5~10g 남짓으로, 1년 생산량을 모은 대병 한 병의 문화적·예술적 가치는 약 1억 원에 달합니다.
4. 손끝의 고단함이 빚어낸 정밀한 제작 메커니즘
황칠 자개 작업은 극한의 인내와 고도의 숙련도를 요구합니다. 햇빛과 온도가 맞아야 비로소 굳어지는 황칠은 바르고 말리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자개 본연의 빛을 해치지 않고 맑게 투영해 냅니다.

몸 전체의 감각을 활용하여 일정한 힘으로 붓질을 이어가는 고수의 손길에서 작품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칠을 할 때는 손목의 힘만 쓰면 도료의 두께가 불균일해지기 때문에 온몸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일정한 압력으로 붓질을 이어갑니다. 30년 넘게 닳고 닳은 손도구를 쥐고 묵묵히 이어가는 수작업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깊이를 만들어냅니다. 바다가 길러낸 조개껍데기와 숲이 품어낸 나무 진액이 한 장인의 몸짓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예술품으로 승화하는 과정입니다.
5. 전통 자원의 보존과 현대 공예가 나아갈 길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화려한 완성작 뒤에 숨겨진 자연과 생태계의 가치입니다. 보길도에 서식하던 400년 된 국내 최고령 황칠나무가 낙뢰 피해로 쓰러진 모습은 오랜 세월을 지켜온 자연 유산의 취약성을 상기시킵니다. 과거 과도한 공물 수탈로 명맥이 끊길 뻔했던 황칠 숲을 다시 조성하고 지켜내는 지역 농가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황칠 자개 공예 역시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묵직한 노동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담긴 한국의 나전 황칠은, 빠르고 가벼운 소비재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FAQ
황칠은 일반 옻칠과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옻칠은 산화되면서 특유의 짙고 어두운 흑갈색을 띠는 반면, 황칠나무 수액으로 만든 황칠은 투명하고 영롱한 황금빛을 띱니다. 방부·방습성이 매우 뛰어나 고대부터 왕실의 최고급 교역품으로 쓰였습니다.
황칠이 고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황칠나무에 상처를 내어 분비되는 수액은 30년생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에서 1년에 고작 5~10g 정도만 얻을 수 있을 만큼 채취량이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김영준 작가가 나전칠기 재료로 보길도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길도 앞바다는 다시마를 풍부하게 먹고 자라 빛깔의 깊이와 육질이 단단한 양질의 전복패가 생산되며, 숲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자생 황칠나무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