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천년 고찰 해인사에서 스님과 신도, 청년 등 200여 명의 대중이 참여해 1년 살림을 책임질 5,000포기 대규모 김장 울력을 마쳤습니다.
- 살생을 금하는 사찰의 가르침에 따라 젓갈과 오신채를 넣지 않는 대신 직접 농사지은 채소와 천연 재료, 장으로 담백하고 깊은 시원한 맛을 냈습니다.
- 나흘간 배추 수확부터 버무리기까지 이어진 고된 노동 속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을 낮추는 하심과 나눔의 가치를 배우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습니다.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가야산 자락, 신라 시대 창건되어 1200년 넘는 역사를 품어온 해인사의 앞마당이 북적이기 시작합니다. 한 해의 살림을 준비하는 사찰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5,000포기 김장 울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배추를 수확하고, 절이고, 씻어낸 뒤 양념을 버무리기까지 나흘에 걸쳐 펼쳐지는 이 대장정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1년 살림을 책임질 5,000포기 배추를 준비하기 위해 사찰 마당이 분주한 움직임으로 가득 찼습니다.
5,000포기 배추와 나흘간의 대장정: 해인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올해 해인사 김장은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8,200여 포기의 배추 중 5,000포기를 엄선하여 진행되었습니다. 나머지 3,000여 포기는 인근 암자와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질 예정입니다. 이 대규모 작업을 위해 준비되는 물자부터 남다릅니다. 150인분에서 200인분에 달하는 장화와 간식, 300kg이 넘는 소금, 그리고 지게차까지 동원되어 마당 가득 김장 도구를 운반하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배추밭에서 밑동을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대형 수조에 소금물을 만들어 배추를 재우고, 새벽부터 물에 세 번 이상 씻어 건져내는 작업이 밤낮없이 이어집니다. 말 그대로 사찰이 대형 김치 공장으로 변신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일사불란하고 방대한 작업 현장입니다.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배추로 월동 준비를 해온 사찰의 지난 농사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사찰의 1년 살림이자 수행: 왜 김장 울력이 특별한가
사찰에서 울력이란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함께 노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김장 울력은 해인사 상주 스님들은 물론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 강원의 학인 스님,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신도와 일반 청년들까지 모두 동참하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노동 수행입니다.
절에서는 노동을 단순한 고통이나 직업적 업무로 보지 않습니다. 나를 앞세우지 않고 대중과 함께 땀을 흘리는 '무아(無我)'의 실천이자,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과정으로 삼습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소금물 속에서 차가운 물에 손이 얼어가면서도 군소리 없이 배추를 옮기는 시간 자체가 마음의 번뇌를 씻어내는 정진이 되는 셈입니다.
수많은 손길이 모여 5,000포기 배추가 정갈한 사찰 김치로 거듭나는 현장입니다.
오신채와 젓갈 없이 내는 깊은 맛: 사찰 김치 양념의 비결
사찰 김치는 일반 가가의 김치와 명확히 구분되는 독특한 제조 원칙을 지킵니다. 첫째는 생명을 해치지 않기 위해 새우젓이나 멸치액젓 등 젓갈을 일절 넣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음심을 일으키고 수행의 집중을 방해한다고 알려진 다섯 가지 매운 채소, 즉 오신채(마늘, 파, 달래, 부추, 흥거)를 사용하지 않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신채와 젓갈 없이 어떻게 깊고 깔끔한 맛을 낼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해인사 앞마당에서 직접 재배한 신선한 채소와 천연 재료의 조합에 있습니다. 무, 생강, 연근, 배, 매실청을 넉넉히 갈아 넣고 사찰 전통 장으로 간을 맞춰 담백하면서도 톡 쏘는 시원한 단맛을 만들어냅니다. 이번 김장에는 무려 1,400근의 고춧가루와 300리터가 넘는 초대형 고무통 12개 분량의 양념이 투입되어 깊은 산사의 은은한 풍미를 완성했습니다.
고된 김장 작업 중 잠시 멈춰 서서 나누는 따뜻한 간식은 모두에게 큰 활력이 됩니다.
스님부터 전국 청년들까지: 땀방울로 마음을 다스리는 현장
김장 현장에는 다양한 사연을 안고 찾아온 이들이 어우러져 일손을 돕습니다. 출가를 고민하거나 삶의 전환점에서 쉼표가 필요해 사찰의 청년 객실에 머물게 된 청년들, 30년 전 수련회 인연으로 매년 전국에서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는 신도들이 함께 손을 맞잡습니다.
12년간 해온 운동을 그만두고 허무함 속에서 해인사를 찾았던 한 청년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고된 김장 노동에 몰입하면서 '새로운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작은 자신감과 뿌듯함을 되찾았다고 고백합니다. 말없이 쏟아지는 배추 더미를 나르고 양념을 무치는 동안, 복잡했던 머릿속 고민은 사라지고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는 여유가 찾아오게 됩니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함께 정성을 다해 김치를 담그며 마음을 나누는 수행의 현장입니다.
정성과 나눔의 가치: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삶의 이정표
나흘간의 구슬땀 끝에 완성된 5,000포기의 김치는 저온 창고를 가득 채우며 해인사의 향후 1년 식량을 책임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김치가 갖는 진짜 가치는 사찰 내부의 식복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정성스레 담근 김치는 인근의 작은 암자들과 지역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넉넉히 나누어집니다.
빠르고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수십 명의 대중이 모여 손수 배추를 뽑고 치대며 만들어낸 해인사의 김장 울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묵묵히 땀 흘려 얻어내는 노동의 기쁨과, 이웃과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삶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입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도 고소한 배추 향과 온정이 가득했던 산사의 앞마당은 이미 따뜻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FAQ
사찰 김치에는 왜 젓갈과 마늘, 파를 넣지 않나요?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동물성 재료인 젓갈을 넣지 않습니다. 또한 마늘, 파, 달래, 부추, 흥거 등 오신채는 음심을 일으키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보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젓갈과 오신채 없이 어떻게 김치의 감칠맛을 내나요?
직접 농사지은 무, 생강, 연근, 배, 매실청 등 제철 채소와 과일을 풍부하게 갈아 넣고 사찰 전통 장으로 간을 맞춰 담백하고 시원한 감칠맛을 냅니다.
해인사 김장 울력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나요?
해인사의 주지 스님과 원주 스님을 비롯해 강원 학인 스님, 선원 스님 등 사찰 대중 전체와 전국에서 찾아온 신도, 청년 객실에 머무는 청년, 마을 주민 등 200여 명의 대중이 함께 참여합니다.
해인사 김장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직접 재배한 8,200여 포기 중 약 5,000포기를 김장으로 담그며, 고춧가루 1,400근과 300kg 이상의 소금이 사용됩니다. 수확한 배추 중 3,000여 포기는 주변 암자와 이웃들에게 나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