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분이 많아 쉽게 무르는 청외를 천일염과 청주 술찌개미(주박)에 숙성시켜 1년 내내 아삭함을 유지하는 전통 전라도식 장아찌 기법을 소개합니다.
- 요식업 사업 실패 후 고향 정읍으로 돌아와 '정읍의 휘발유'라 불리는 어머니의 엄격하고 따뜻한 가르침 아래 귀농 농부로 일어선 아들의 감동적인 여정을 다룹니다.
- 빠른 성과만 좇는 바쁜 현대 사회에서 한 세대의 전통을 고수하며 땀 흘려 정직한 슬로우 푸드를 만들어가는 노동과 가족애의 묵직한 가치를 전합니다.

전북 정읍의 깊고 고요한 구량마을, 뜨거운 여름 햇볕 속에서 유독 활기차게 웃음꽃을 피우는 가족이 있습니다. 일 년 중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딱 한 달 동안만 밭에서 수확할 수 있다는 여름의 귀한 보물, 바로 '청외' 때문이랍니다. 대를 이어 청외를 키우고 깊은 항아리 속 전통 방식으로 장아찌를 직접 담그는 이 가족의 하루는, 잊혀가는 토종 작물의 깊고 푸른 가치와 함께 좌절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가족들의 뜨거운 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겉보기엔 호박이나 참외를 쏙 빼닮은 이 낯설고 평범해 보이는 채소 속에 대체 어떤 대단한 맛의 비결이 숨겨져 있을까요?
1. 지금 무슨 일이: 딱 한 달 동안만 허락된 초록색 보물, '청외' 수확기
한여름의 뙤약볕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정읍의 수만 평 밭에서는 해마다 6월 말이 되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전쟁 같은 수확철이 시작됩니다. 파란 참외라 하여 청외, 혹은 '울외'라고도 널리 불리는 이 채소는 여름 한 철 동안만 모습을 드러내는 아주 귀한 몸이랍니다. 여름에 태어나 자라는 만큼 더위 속에서 온 가족이 매일같이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외 수확은 매 순간이 째깍거리는 초시계와의 싸움과도 같습니다. 청외는 원체 자라는 속도가 무섭게 빠르기 때문에 밭에 물을 대고 돌보는 와중에도 자칫 이틀, 사흘만 한눈을 팔아버리면 훌쩍 자라나 너무 커버리고 만대요. 그렇다고 너무 어린 청외를 따자니 속심이 단단하게 차오르지 못해 장아찌용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너무 늦게 따면 밭에서 쩍쩍 터져버리니 매일 알맞은 최적의 타이밍에 손수 골라가며 따내는 것이 여간 고된 공력이 드는 일이 아니랍니다.
수확 직후의 싱싱한 청외는 수분이 많아 금세 무르기 때문에 신속하게 손질하여 장아찌를 담가야 합니다.
2. 왜 이것이 중요한가: 대를 이어온 '맛'과 향토 식문화의 보존 가치
요즘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름이지만, 40년 동안 이 땅을 성실히 일궈낸 어머니의 기억 속 청외는 과거 귀한 손님 상에나 오르던 최고의 고급 식재료였습니다. 오이보다 훨씬 사근사근하고 아삭한 씹는 맛이 뛰어나서 먹을거리가 귀하던 옛날에도 이 청외 장아찌를 올린 밥상 하나면 금세 힘든 농사일의 시름이 개운하게 가시곤 했답니다. 이른 아침 7남매 자식들의 등교 도시락 바닥에 알뜰하게 깔아주던 단골 반찬도 늘 어머니가 정성스레 담근 이 아삭한 단맛 나는 장아찌였습니다.
쉽게 변하고 쉽게 사라져 가는 가벼운 오늘날의 인스턴트 먹거리 홍수 속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이 불편하고 느린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농가의 땀방울은 그 값어치를 더해갑니다. 속도와 효율을 계산하기보다 해를 넘겨 계절의 무서운 순리를 다 받아들이며 대를 이어 맛을 전수해 왔기에, 이 청외 밭엔 단순히 채소를 키우는 것을 넘어 농부 개개인의 우뚝 솟은 인생 철학이 굳건하게 뿌리내려 자라고 있습니다.
청외의 특유의 식감과 감칠맛을 살리기 위해 3년 이상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꼼꼼하게 절이는 과정입니다.
3. 작동 원리와 비결: 소금 절임과 술찌개미(주박)가 빚어내는 발효의 미학
그렇다면 수분이 워낙 많아 밭에서 따낸 뒤 사흘만 보관해도 쉽게 물러서 썩어버리는 신선한 청외를 어떻게 1년 내내 아삭하게 유지해 밥상 위에 올릴 수 있는 걸까요? 그 신비로운 비밀은 이틀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진행되는 단단한 발효 공정에 숨겨져 있습니다. 일단 갓 수확해 온 청외는 반으로 단정히 갈라낸 뒤 속 씨 알갱이에 묻은 솜털 하나까지 철저하게 깨끗한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내 씻어내야 합니다. 이 속의 잔여물이 단 한 톨이라도 남아 있다면 소금을 아무리 세게 치더라도 장아찌 전체가 나중에 눅눅하게 물러 수양버들처럼 변하기 때문이죠.
그 속 자리에 3년 이상 귀하게 묵혀서 간수를 아주 정성 들여 쏙 뺀 고운 천일염을 한 움큼씩 채워 넣어 단단히 절인 채 하룻밤을 완전히 묵힙니다. 24시간의 침전기를 거치고 나면 수분이 빠져나가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데, 바로 이때 이 전통 음식의 핵심 부재료인 '주박'이 등판합니다. 바로 청주(정종)를 맑게 빚어내고 남은 걸쭉하고 향이 깊은 하얀색 술 지개미랍니다. 오직 잘 삭은 전통 청주 주박만을 고집해 갖가지 비법 양념장과 버무린 뒤 항아리 깊숙이 청외의 벌어진 등허리마다 두텁고 야무지게 바르고 공기를 말끔히 차단해야 주박 특유의 지긋한 알코올 발효 향과 고급스러운 풍미가 은은하게 스며들어 마침내 오래 두고 맛보는 '울외 주박장아찌'가 든든하게 완성됩니다.
수분이 많아 금세 무르기 쉬운 청외는 속을 꼼꼼히 긁어내야 아삭한 장아찌의 식감을 온전히 살릴 수 있습니다.
4. 누가 영향을 받고 무엇이 바뀌는가: 실패를 딛고 대지로 돌아온 이들의 치유
이렇게 자랑스러운 4대째 전통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뒤편에는, 사실 지난날의 쓰라린 아픔과 뜨거운 눈물이 서려 있답니다. 귀향하여 새파란 농부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양형두 씨는 과거 도심의 먼 길로 나가 무려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뼈저리게 부딪치며 요식업인 고깃집 장사를 성실하게 꾸렸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실패의 파고가 덮쳤고, 모든 것을 거품처럼 다 잃고 무일푼으로 엎어져 고향 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을 적엔 눈물겹게도 연로하신 부모님께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할 만큼 한스러운 죄스러움이 무겁게 가슴을 눌렀었습니다.
사업 실패 후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농부로 거듭난 시간은 묵묵히 버텨온 지난 14년의 세월을 말해줍니다.
허나 대찬 여장부로 불리며 '정읍의 휘발유'라는 유쾌한 별명을 가진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의 어깨를 세차게 맞이해주며 아무 말 없이 넓고 깊은 대지의 농사비법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습니다. 농산물을 하나하나 똑바로 손질하는 일조차 사나운 서툶투성이였지만, 매일 뜨거운 햇볕 아래 함께 소금을 나르고 오디를 집어 먹으며 아들의 지친 상처를 어루만졌습니다. 자연의 묵묵한 힘으로 상처를 닦아낸 아들은 이제 동생 부부까지 다 다독여 든든한 4대째 일꾼으로 정착해 2만 평의 대농장을 함께 키워나갈 자양분을 비옥하게 다져놓았답니다.
5.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이 던지는 든든한 화두
피땀 젖는 대낮의 노동이 무사히 다 지나갈 즈음, 집안 한구석에서 정성껏 보관해 둔 1년 전의 노란 보물 상자, 잘 익은 청외 장아찌를 꺼내 올려 시원한 얼음 동동 띄운 우뭇가사리 냉국 그릇 위에 가득 올려내어 맛보는 한바탕 밥상은 그야말로 세속의 지친 번잡함을 흐르는 계곡물에 단숨에 씻겨 가게 만들어 줍니다. "피로는 정말 밥 먹는 재미로 푼다"라며 다 함께 시끌벅적 둘러앉은 이들의 환한 웃음에는 자연에 절대 조급하게 맞서지 않고 오직 땀 올려 일한 만큼만 품는 지극히 깊은 삶의 행복이 굳건하게 들어있습니다.
고된 농사일 끝에 정성껏 차린 시원한 음식들을 나누며 소소하고 건강한 일상의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지켜보고 찾아내야 할 것은 단순히 이 청외 장아찌라는 소박한 음식 하나가 지닌 이색적인 즐거움뿐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추위와 매서운 겨울 서리를 가만히 기다렸다가 비로소 뜨거운 복더위 한 달 동안에만 열매를 건네주는 대지의 철저하고 순직한 가치, 그리고 속도를 낮추어 오랜 숙성의 시간만큼을 우려내는 주박의 긴 과정과도 같은 이 정성이야말로 바삐만 달리기 급급한 숨 가쁜 이 세상에 시원하고 촉촉한 화두를 던지는 한 그릇의 웅장한 지혜가 아닐까요? 올해도 자연이 일러준 소박한 이 여름 상 밑에서, 함께하는 진짜 행복의 길을 가만히 상상해 봅니다.
FAQ
청외(울외)는 어떤 채소인가요?
파란 참외라는 뜻에서 유래한 청외는 전남·전북 지역에서 널리 키워 먹던 향토 참외류 작물입니다. 수박이나 일반 오이와 비교해서 수분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생과로 직접 소비하기보다는 소금과 정종 술지개미(주박)를 혼합해 만든 장아찌용으로 100% 특화되어 재배하는 아주 진귀한 토종 채소입니다.
주박(술찌개미)을 이용하면 장아찌가 어째서 장기 보관이 가능한가요?
곡주나 정종을 청주로 추출하고 남은 하얀 앙금인 '주박'은 고농도의 자체 효모 성분과 알코올성 탈취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청외의 수분을 소금으로 말끔하게 빼낸 뒤 빈틈없이 주박 양념으로 채우고 공기 접촉을 가로막으면, 내부에서 부패 유해균의 성장을 강력하게 억제하고 수개월 동안 묵직하고 건강한 풍미를 내면서 아삭아삭한 질감을 1년 이상 상하지 않게 돋우어 줍니다.
가장 맛 좋은 청외는 언제 수확하며 어떻게 골라야 하나요?
일 년 중 딱 한 달 동안인 6월 말부터 7월 말 한여름에만 본격적으로 밭에서 따냅니다. 절였을 때 육질이 물러지지 않고 오독오독하고 단단하게 맛을 내게 하려면, 너무 작거나 풋풋한 녀석이 아닌 적당히 알이 실하고 고운 은빛 노란 도는 연두색 껍질을 자랑하는 중간 이상의 꽉 찬 크기를 엄격하게 제때 수확하는 선별 숙련도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