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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철새인 큰유리새와 딱새의 둥지에 벙어리뻐꾸기가 몰래 알을 낳고 가는 '탁란'이 벌어집니다.
  • 먼저 부화한 벙어리뻐꾸기 새끼는 평평한 등을 이용해 진짜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고 어미의 독차지된 사랑을 받습니다.
  • 하지만 숙주 새들도 가짜 알을 구별해 내기 시작하며, 살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치열한 진화의 군비 경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여름 숲, 그곳엔 치열한 숨결이 숨어 있습니다. 계곡 바위틈에 둥지를 튼 큰유리새의 보금자리에 어느새 벙어리뻐꾸기가 몰래 알을 낳고 갔습니다. 어미 새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자신의 알과 함께 낯선 불청객의 알을 정성껏 품기 시작하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남의 둥지를 빼앗는 자와, 아무것도 모른 채 맹목적인 사랑을 내어주는 자. 오늘은 잔혹하지만 경이로운 자연의 생존 전략인 '탁란(Brood Parasitism)'과, 살기 위해 서로를 속이는 새들의 치열한 '군비 경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둥지에 찾아온 불청객, 비극의 시작

큰유리새 암컷은 10여 일 동안 지루한 포란의 시간을 보냅니다. 보호색으로 무장한 채 그림자처럼 둥지를 품고, 수컷은 주변을 경계하며 먹이를 물어 나르죠. 그런데 약속된 시간이 되자 둥지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깁니다. 가장 먼저 태어난 건 다름 아닌 벙어리뻐꾸기 새끼입니다.


바위 틈에 놓인 작은 새알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

어미 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둥지에 몰래 들어온 불청객의 알을 정성껏 품기 시작합니다.


큰유리새 어미는 제 새끼인 양 살뜰히 녀석을 돌봅니다. 하루가 지나 나머지 큰유리새 알들이 부화하지만, 먹이를 먼저 차지하는 건 언제나 덩치가 큰 벙어리뻐꾸기 새끼입니다. 어미가 둥지를 비운 사이, 새끼들은 따뜻한 곳을 찾아 서로에게 파고들며 위태로운 동거를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요?

잔혹한 생존 본능, 왜 원수의 새끼를 키울까요?

새끼 벙어리뻐꾸기는 털이 많고 등이 굽은 큰유리새 새끼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습니다. 털이 없고 등이 평평하죠. 이 평평한 등은 녀석의 가장 강력하고 잔혹한 무기입니다. 둥지 안이 들썩이더니,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새끼 벙어리뻐꾸기가 다른 새끼들을 등 위로 올려 둥지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바위틈 이끼 사이에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 작은 새의 뒷모습

자신의 알과 섞인 불청객의 알을 품으며 묵묵히 생명을 이어가는 어미 새의 헌신입니다.


작은 몸이 더 작은 몸을 밀어내며 생존 경쟁을 벌이는 사이, 수컷은 새끼가 깨어난 만큼 먹이가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냥에만 열심입니다. 새끼들이 처한 위험을 알 길이 없는 큰유리새 부부는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진짜 새끼마저 둥지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가짜든 아니든 둥지의 생명을 품는 건 어미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탁란은 바로 그 눈물나게 맹목적인 모성애를 철저히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속고 속이는 진화의 굴레, 새들의 군비 경쟁

그렇다면 숙주가 되는 새들은 언제까지나 당하고만 있을까요? 벙어리뻐꾸기에게 탁란당한 또 다른 둥지, 딱새 암컷의 행동은 조금 다릅니다. 단 30초도 가만히 품지 못할 만큼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벙어리뻐꾸기의 알을 굴려보고 콕콕 쪼아대기 시작합니다. 둥지 안의 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것이죠. 심지어 가짜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적극적인 행동까지 보입니다.


둥지 안에 푸른색 바탕에 갈색 무늬가 있는 새알 다섯 개가 모여 있는 모습

숙주의 알과 비슷하게 위장한 뻐꾸기의 알은 탁란을 성공시키기 위한 정교한 전략입니다.


탁란을 피하려는 숙주 새들의 반격이 시작되자, 벙어리뻐꾸기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녀석들의 새로운 무기는 바로 '정교한 위장술'입니다. 숙주의 알과 비슷한 푸른색 알을 낳는 것은 기본이고, 숙주의 패턴을 흉내 내기 위해 푸른색에 실무늬를 넣거나 색을 뺀 연한 알을 낳으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둥지를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보이지 않는 군비 경쟁(Arms Race)이 숲속에서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셈입니다.

살기 위해 또 지키기 위해

숙주 새의 몸집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거대해진 벙어리뻐꾸기 새끼는 마침내 둥지를 떠납니다. 하지만 딱새 부부의 육아는 둥지 밖에서도 계속되죠. 쉴 새 없이 날아와 녀석의 배를 채우고, 뱀이 나타나면 애타는 마음으로 녀석을 지켜냅니다. 그 수고로운 헌신은 진짜 제 자식을 향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경이롭고도 가혹한 생존의 법칙. 맹목적인 헌신과 희생, 죽음이 뒤엉킨 이 숲에서 생명은 오늘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살아갑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생명의 요람이 되는 이 치열한 자연의 순리 앞에서, 당신에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가 있나요?


FAQ

탁란이란 무엇인가요?

탁란은 뻐꾸기 같은 일부 새들이 스스로 둥지를 틀지 않고, 다른 종의 새(숙주)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대신 새끼를 기르게 하는 생존 전략입니다. 숙주 새의 맹목적인 모성애 본능을 이용하는 자연의 독특한 현상입니다.

벙어리뻐꾸기 새끼는 어떻게 숙주 새의 둥지를 독차지하나요?

벙어리뻐꾸기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등이 평평하게 진화되어 있습니다. 부화하자마자 본능적으로 이 평평한 등을 이용해 숙주 새의 진짜 알이나 새끼를 떠받쳐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후 어미가 물어오는 먹이를 혼자 독차지하며 빠르게 성장합니다.

숙주 새들은 탁란에 당하기만 하나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딱새 같은 숙주 새들은 자신의 알과 모양이 다른 벙어리뻐꾸기의 알을 구별해 내고 둥지 밖으로 버리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이에 맞서 벙어리뻐꾸기도 숙주의 알과 비슷한 색과 무늬를 가진 알을 낳도록 진화하며 치열한 '군비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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