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실존적 불안은 의식하는 나와 의식되는 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분열'과 '빈틈'에서 비롯됩니다.
- 고정된 본질은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창조해야 하며, 이때 '연기하는 척하는 행동'이 오히려 우리의 실존을 결정합니다.
- 삶을 지나치게 진지한 1차적 현실로만 대하기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배역을 플레이하는 '2차적 현실'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여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며, 어떻게 해야 흔들리지 않는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인간이 느끼는 불안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의식의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실존적 조건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세상이 규정한 고정된 '진짜 나'를 찾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빈틈을 인정하고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능동적으로 역할을 연기하는 데 있습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 철학을 통해 우리의 불안이 어떻게 자유의 가능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지도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의식하는 나와 의식되는 나의 분열: 왜 인간은 사물처럼 평온할 수 없을까
세상의 일반적인 사물들은 내적으로 완전히 통일되어 존재합니다. 펜은 그저 펜으로서 존재하고, 물분자는 수소와 산소가 결속하여 단일한 성질을 유지합니다. 이렇듯 세상의 사물들은 단일성을 기초로 존재합니다.
사물은 원자들의 결합처럼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하며 분열하는 존재입니다.
반면 인간의 의식은 결코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독특한 분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의식하는 나와 의식되는 나로 분열된 채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식합니다. 나 바깥으로 나가서 마치 타인을 보듯 나를 쳐다보는 것이죠. 이 재귀적인 활동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다름의 틈새, 즉 빈틈이 생겨납니다.
동물들은 현재에 완전히 통합된 상태로 존재하기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나로서 존재하려는 순간 이미 나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 자신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중적인 존재로서 매 순간 분열과 불안정성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마주하는 실존적 불안의 진짜 정체입니다.
"연기는 본질에 앞선다": 행위를 통해 비로소 창조되는 자아
사르트르의 가장 유명한 명제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우리에게 고정된 성격이나 운명 같은 설계도가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를 오늘날의 맥락에서 "연기는 본질에 앞선다"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행위에 앞선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나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서만 미래의 내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를 생각해 봅시다. 대본에 적힌 햄릿은 비어 있는 기호에 불과하지만, 어떤 배우가 무대 위에서 그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햄릿이라는 인물이 구체적인 실체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실제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금까지의 내가 어떠했든, 잠시 후의 나는 전혀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인물을 연기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는 실제로 그 인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 자아의 빈틈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심연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카뮈의 《전락》이 보여주는 이중성의 보복과 '농담'으로서의 구원
알베르 카뮈의 소설 《전락》은 자아의 이중성을 정면으로 다룬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주인공 장바티스트 클라망스는 파리의 존경받는 변호사로, 약자를 도우며 스스로 완벽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인간 내면의 분열과 이중성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을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는 다리 위에서 한 여성이 강물로 뛰어내리는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 발길을 재촉합니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어디선가 자기를 비웃는 듯한 정체 모를 웃음소리가 자꾸만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선한 변호사'라는 배역을 완벽하게 연기했던 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가 자신의 위선과 연기의 이중성을 철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비로소 웃음소리가 사라집니다. 프랑스어에서 연극과 놀이를 뜻하는 '주회(Jouer)'라는 단어는 '농담(Joke)'과 어원이 같습니다. 즉, 삶이라는 무대를 무조건 진지하게만 받아들여야 하는 1차적 현실로 보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 유희할 수 있는 2차적 현실, 일종의 조크(Joke)로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짓눌림에서 벗어날 여유를 얻게 됩니다.
자유의 무거운 형벌과 일상의 자동화라는 도피처
하지만 매 순간 나를 새롭게 창조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무거운 자유의 형벌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충동은 어쩌면 아무런 선택도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무기물의 상태, 즉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힘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피곤할 때 잠을 자며 일시적으로 세상을 지우고 싶어 하거나, 술과 담배, 혹은 사회가 제공하는 획일적인 오락거리에 나를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미리 정해놓은 안전한 선택지들을 답습하며 삶을 자동화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의 빈틈이 주는 불안을 일시적으로 메우고 편안함을 느낍니다. 물론 이러한 반복과 자동화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을 선택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도피가 반복되면 우리는 정체 모를 무력감과 불행에 갇히게 됩니다.
무대 위의 배우처럼, 우리는 언제든 다른 삶을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내면의 빈틈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을 겪습니다. 그때 그 불안을 즉각적으로 덮어버리려 하기보다, 내 존재의 근본적인 이중성을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이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든 다른 배역을 선택하고, 다른 농담을 던지며, 새로운 삶의 규칙을 플레이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삶을 나를 증명해야 하는 무거운 시험대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자 게임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짓누르던 불안에서 벗어나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배역을 맡아 하루를 플레이하고 계시나요? 그리고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어떤 새로운 역할을 연기해 보고 싶으신가요?
FAQ
인간이 동물과 달리 실존적 불안을 항상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물이나 동물은 내적으로 완전히 통합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의식하는 나'와 '의식되는 나'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생겨나는 내면의 '빈틈'과 분열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불안정성과 선택의 부담을 줍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나의 과거 행적이나 성격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행위하기 전의 나는 비어 있는 상태이므로,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어떤 '역할을 연기'하느냐에 따라 매 순간 나의 본질을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카뮈의 소설 《전락》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이중성을 인정하자 웃음소리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신의 삶을 완벽하고 진지한 현실로 포장하려던 가식을 버리고, 삶이 일종의 '연극'이자 '농담(Jouer)'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삶을 게임처럼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심리적 압박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