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여명기 한국 대중은 동학과 기독교라는 두 축을 통해 신분제를 극복하고 인간 존엄과 개인의 주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러한 자각은 수천 년 왕정 역사를 단숨에 지우고 공화정인 대한민국을 수립하는 거대한 민주주의적 동력으로 이어졌습니다.
- 최초의 군악대와 애국가 창가의 역사에서 보듯, 오늘날의 대중문화와 노래 역시 대중의 집단지성이 만들어낸 주체성의 결과물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주의 인물 명리학자 강헌입니다. 오늘은 사주 명식의 틀을 잠시 벗어나, 우리 근대 대중문화사의 가장 뜨거웠던 새벽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수천 년의 왕정을 단 한순간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공화정'이라는 낯선 제도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근대의 여명기에 대중 스스로가 획득한 '주체성'과 이를 매개한 '노래'에 있습니다.
왜 근대 대중문화의 '주체성'을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대중문화라는 역사의 궤적을 쫓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배층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도 아닌데, 어떻게 이 땅의 민초들이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자각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자각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오늘날 세계를 뒤흔드는 한국 대중문화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그저 '우연한 유행'이나 '기획사의 상업적 성공'으로만 치부하는 심각한 왜곡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몇 천 년 동안 왕정의 경험밖에 없었습니다. 서구처럼 피를 흘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친 적도 없죠.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우리는 아무런 이견 없이 '공화제'를 선택했고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지었습니다. 나아가 해방 공간에서 등록된 정당이 3,000개가 넘었음에도, "옛 조선의 왕족을 모셔와 다시 왕정을 세우자"고 주장한 또라이 같은 정당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이 놀라운 의식의 대전환을 가능케 한 핵심 동력이 바로 근대 대중문화 속에 스며든 주체성의 형성이었습니다.
개념 정의: 동학과 기독교가 일깨운 '인간 존엄의 자각'
그렇다면 이 주체성은 어디서 싹텄을까요? 그것은 안으로부터 일어난 동학과 밖으로부터 들어온 기독교라는 두 개의 거대하고 긴장감 넘치는 힘의 상호작용이었습니다. 이 두 종교가 대중에게 제공한 가장 혁명적인 개념은 다름 아닌 '만민평등주의'와 '개인의 존엄성'이었습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남긴 '내수도(內修道)'를 보면 참으로 소름 돋는 대목이 나옵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하늘님같이 공경하라"로 시작해, 약자 중의 약자였던 며느리와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우마육축(소와 말 등 가축)마저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죠.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가 제공한 서양식 교육과 의료 서비스는 단순한 복지를 넘어, 신분제 사회에서 억눌려 있던 민초들에게 "나 역시 하나님 앞에 존엄한 단 한 명의 개별적 인간"이라는 자각을 졸라 강력하게 심어주었습니다. 이 두 사상이 결합하면서 대중은 비로소 자신만의 개성과 주체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공경하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당시 사회적 약자들에게 인간 존엄의 가치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히 오해하는 지점: 근대화는 수동적인 서구화에 불과했는가?
여기서 많은 지식인과 대중이 헷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근대화는 결국 서구의 문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이식(移植) 과정이 아니었는가?" 하는 냉소적인 시각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서구의 문물과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철저하게 주체적으로 재해석하고 변용했습니다.
춘원 이광수의 삶과 그의 예리한 통찰은 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광수는 사실 18살 때부터 스스로를 '민족의 초월적 예언자'로 여겼던, 이른바 자뻑과 허세의 극치를 달린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그의 평가는 대단히 날카롭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위태로운 도덕의식을 진행시켰으며, 여성의 지위 향상과 한글 보급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국 교회가 지닌 '교회 지상주의', '맹목적인 신앙으로 인한 학문 천시', '비근대적인 포교 방식' 등의 한계를 아주 정확히 꼬집었습니다. 즉, 당시 대중은 기독교를 맹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을 일깨우고 근대적 사유를 자극하는 도구로 주체적으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구체적 사례: 최초의 군악대와 애국가, 그리고 집단지성의 노래들
대중의 주체성이 가장 극적으로 발현된 영역이 바로 '음악'입니다. 우리는 서양 음악을 교회를 통해서도 만났지만, 또 다른 중요한 통로는 바로 '군악대'였습니다. 1881년, 고종은 최초의 음악 유학생 이은돌을 일본 동경으로 보내 서구식 군악을 배워오게 했습니다. 비록 그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1901년 독일인 군악대장 프란츠 에케르트가 시위 연대 군악대장으로 취임하면서 한반도에 본격적인 서양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군악대의 도입과 프란츠 에케르트의 활동은 근대 음악 문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에케르트는 최초의 공식적인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진짜 흥미로운 현상은 대중 사이에서 일어난 '애국 계몽 창가'의 열풍이었습니다. 당시 독립신문 등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중이 직접 작사한 애국가들이 쏟아졌습니다. 1903년경으로 추정되는 한 무명씨의 '애국충성가' 가사를 보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는 어느 한 천재 작가나 유학생이 뚝딱 만든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이름 없는 대중이 부르고, 고치고, 다듬어 나간 집단지성의 결과물이 바로 우리의 애국가 가사였던 것입니다.
실천적 제안: 오늘날 우리가 국가(國歌)와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태도
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노래와 문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대중문화를 지독하게 무시해 왔습니다. 1950년대 신문을 보면 서양 팝송 기사는 '문화면'에 실어주면서, 정작 우리 대중가요 기사는 '오락면'에 처박아 두는 어처구니없는 차별을 일삼았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대중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른 것도 김대중 대통령 때가 최초였습니다. 참으로 가오 빠지는 일 아닙니까?
저는 이 자리에서 아주 단호하고 도발적인 제안을 하나 던지고자 합니다.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자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친일 행적 논란이 있는 작곡가의 곡을, 그것도 부르기 졸라 어려운 장송곡 같은 멜로디의 노래를 국가로 대우해야 합니까? 법적으로 대한민국에는 공식 지정된 국가가 없습니다. 저는 새로운 국가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국가와 대중문화의 관계를 살피며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담긴 의미를 되짚어봅니다.
이 노래는 헌법 정신에 깃든 민주주의 가치를 완벽하게 대변하며, 부르기 쉬운 4박자 행진곡입니다. 게다가 이미 전 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중국, 필리핀, 태국, 남미 등지의 민중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세계적인 보편성까지 획득했습니다. 보수 정당의 일부 정치인들은 이 가사가 '폭력적'이라며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적들의 피로 우리 밭고랑을 채우자")나 네덜란드 국가의 잔혹한 가사에 비하면 '님을 위한 행진곡'은 그야말로 지극히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시(詩)입니다.
결국 대중문화의 본질은 대중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이 되어 자각하고 표현하는 힘에 있습니다. 껍데기뿐인 권위주의와 허례허식을 걷어내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주체적인 노래와 문화를 온전히 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성숙한 독립 국가의 대중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주의 인물 강헌이었습니다.
FAQ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공화정 체제는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합의되었나요?
수천 년간 왕정만을 경험했던 우리 민족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 공화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해방 이후 단 한 곳도 왕정 복고를 주장하지 않은 배경에는 동학과 기독교가 대중에게 심어준 '만민평등주의'와 '개인의 존엄성 자각'이라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한국인 음악 유학생 이은돌은 어떤 인물인가요?
이은돌은 1881년 고종의 명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 서양식 군악을 배운 최초의 유학생입니다. 귀국 후 신식 군악대 창설을 주도했으나, 유학 중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에게 감화되어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듬해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저자가 '님을 위한 행진곡'을 새로운 국가(國歌) 후보로 강력히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민주주의 정신을 가장 완벽히 구현하는 곡이자, 부르기 쉬운 4박자 행진곡입니다. 또한, 이미 전 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민중의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숭고함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