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붕괴된 자국 원전 산업 생태계를 부활시키기 위해, 미국 SMR 시장에 약 100조 원 규모의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습니다.
- 미국 SMR 시장은 127종의 모델이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여기서 첫 상업용 원전인 '초도기'를 선점하는 국가가 향후 글로벌 원전 패권과 가격 경쟁력을 독식하게 됩니다.
- 현재 SMR 핵심 기기 제작은 한국의 두산에너빌리티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일본이 막대한 자본으로 프로젝트 의사결정권을 확보하면서 장기적인 주도권 경쟁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최근 일본이 미국과의 투자 협정에서 무려 5,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전체 투자금의 73%인 약 4,000억 달러가 전력 분야에 배정되었고, 그중에서도 소형모듈원전(SMR)에만 우리 돈으로 약 100조 원(650억 달러)이 집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역 흑자를 미국에 환원하는 단순한 투자가 아닙니다. 한동안 시장의 뜨거운 감자였다가 최근 잠잠해진 듯했던 SMR 시장에서, 일본은 왜 지금 이렇게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붕괴된 일본의 원전 제국을 부활시키고, 한국이 쥐고 있는 SMR 제조 패권을 빼앗아 오기 위한 치밀한 전략적 포석입니다.
후쿠시마 이후 멈춰버린 시계, 원전 제국의 몰락
일본이 미국 SMR 시장에 목을 매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일본 원전 산업의 뼈아픈 역사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사실 일본은 과거 프랑스에 버금가는 세계 3대 원전 강국이었습니다. 비핵 국가 중 유일하게 핵 재처리 기술까지 보유하며 완벽한 원전 밸류체인을 구축했던 나라였죠. 히타치, 도시바, 미쓰비시 중공업 같은 굴지의 대기업들이 이 생태계를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일본 내 50여 기의 원전 가동이 전면 중단되면서, 원전 부품을 납품하던 수많은 벤더 업체들의 일감이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습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 말이죠.
가장 극적인 몰락은 일본 전자 산업의 간판이었던 도시바였습니다. 도시바는 2006년 미국의 원전 원천기술 기업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며 글로벌 원전 제국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원전 안전 규제가 대폭 강화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웨스팅하우스가 미국에 짓고 있던 원전 4기의 설계 변경과 공기 지연이 겹치며 건설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2017년 웨스팅하우스는 파산에 이릅니다. 이 여파로 도시바 역시 반도체, PC, 가전 등 핵심 사업부를 모두 쪼개어 팔아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국내 일감이 끊긴 일본 기업들은 베트남, 영국 등 해외 원전 수주로 눈을 돌렸지만, 깐깐해진 안전 규제와 치솟은 건설 비용의 벽을 넘지 못하고 연이어 백지화의 쓴맛을 봤습니다. 생태계를 유지할 최소한의 '캡티브 마켓(전속 시장)'이 사라진 일본 원전 산업은 서서히 고사해 가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 미국의 SMR인가? 춘추전국시대의 개막
그렇다면 일본은 왜 자국도, 제3국도 아닌 미국의 SMR 시장을 돌파구로 선택했을까요? 이유는 명확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원전 르네상스' 정책 덕분에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SMR 초기 시장이 열리는 무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400GW로 늘리고, 인허가 절차를 18개월 이내로 단축하겠다는 파격적인 행정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건, 미국 전력 회사들이 거대한 대형 원전을 짓는 데는 극도로 회의적이라는 점입니다. 웨스팅하우스 파산 사태 때 전력 회사들이 고스란히 천문학적인 손실을 떠안았던 끔찍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형 원전의 대안으로, 초기 투자 비용이 적고 공기가 짧은 SMR이 미국의 핵심 에너지 전략으로 급부상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치열한 SMR 기술 표준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글로벌 SMR 시장은 명확한 표준이 없는 일종의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전 세계에서 무려 127종의 모델이 개발되고 있죠. 그중에서도 미국 시장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4대 천왕이 있습니다. 뉴스케일 파워(NuScale), GE-히타치가 합작한 BWRX-300,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나트륨 냉각로), 그리고 엑스에너지(고온가스로)입니다.
특히 물을 냉각재로 쓰는 경수로 방식의 뉴스케일과 BWRX-300은 이미 기술 검증이 끝난 상태라, 인허가만 완료되면 착공 후 3~4년 내에 완공이 가능할 정도로 속도전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습니다.
'초도기'를 지배하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원전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초도기(First-of-a-kind)' 시장입니다. 처음으로 상업용 모델을 짓는 초도기는 필연적으로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듭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프로젝트를 통해 노하우를 습득하고 공급망을 세팅하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원전부터는 비용이 극적으로 하락하며 규모의 경제가 발생합니다.
SMR 시장의 초기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본이 미국 시장에 집중하는 전략적 배경을 살펴봅니다.
한국이 현재 글로벌 원전 수출 시장에서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자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에 지은 원전이 바로 3.5세대 대형 원전의 전 세계 첫 초도기였습니다. 미국, 프랑스 모두 실패하거나 지연됐던 이 초도기 시장을 한국이 선점하면서 생태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죠.
일본의 속내가 바로 이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열리는 SMR 초도기 시장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선점함으로써, 앞으로 대형 원전 시장을 훌쩍 뛰어넘을 SMR 생태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것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압도적 우위, 과연 안전할까?
이 지점에서 한국 투자자들의 가장 큰 의문이 생깁니다. "SMR 핵심 기기(주기기)는 어차피 한국의 두산에너빌리티가 다 만드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현재 경수로형 SMR의 핵심인 압력용기 등 격납건물 내 주기기를 완벽하게 주조하고 제작할 수 있는 역량과 생산 캐파를 갖춘 기업은 전 세계에서 두산에너빌리티가 거의 유일합니다. 심지어 뉴스케일의 설계 도면 자체가 아예 두산에너빌리티의 제작 공정을 전제로 그려졌다고 할 정도로, 두산은 이 분야의 'TSMC' 같은 존재입니다.
전 세계에서 개발 중인 127종의 SMR 모델은 냉각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며, 기술적 표준이 정립되지 않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심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전 건설을 아파트 건축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뉴스케일이 아파트 설계사라면, 두산에너빌리티는 핵심 자재를 납품하는 최고급 목수입니다. 그렇다면 전체 공사를 총괄하고 책임지는 시행사나 시공사는 누구일까요?
뉴스케일 프로젝트의 시행을 맡은 곳은 '엔트라원(Entra1)'이라는 회사입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100조 원의 지분 투자를 단행하는 타깃이 바로 이런 프로젝트 시행사들입니다.
일본은 미국과 투자 협정을 맺을 때 아주 무서운 조건을 하나 달았습니다. "우리가 투자한 프로젝트에는 우선적으로 일본 기업의 부품과 기기를 납품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히타치가 당장 두산처럼 주기기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돈줄과 의사결정권을 장악한 상태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두산의 기기를 쓰더라도, 점차 어깨너머로 노하우를 흡수하고 2차 부품 공급망부터 일본 기업들로 채워 넣으며 결국 장기적으로는 주기기 제작 역량까지 내재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지켜봐야 할 관전 포인트
결국 일본의 100조 원 베팅은 단순히 재무적 수익을 노린 투자가 아니라, 자국 원전 산업의 명운을 건 생존 전략입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SMR 인허가 속도와 착공 여부가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데이터센터 전력난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TVA) 등 미국 전력 회사들의 발주가 본격화되면 뉴스케일과 두산에너빌리티 연합은 확실한 수혜를 입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시각에서 우리는 일본의 자본 침투를 경계해야 합니다. 일본이 프로젝트 시행사의 지위를 이용해 초도기 건설의 노하우를 독식하게 둔다면, 우리가 3세대 대형 원전에서 누렸던 확고한 지배력을 SMR 시대에는 일본에게 내어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두산에너빌리티라는 걸출한 '제조사'를 보유한 한국이, 어떻게 하면 단순 하청업체에 머물지 않고 SMR 생태계 전반의 '룰 메이커'로 남을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FAQ
일본은 왜 자국이 아닌 미국 SMR 시장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나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내 원전 신규 건설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자국 원전 산업 생태계가 붕괴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원전 부흥 정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SMR 초기 시장이 열리고 있는 미국에 투자하여, 자국 기업들에게 일감을 주고 잃어버린 원전 패권을 되찾으려는 전략입니다.
미국은 왜 대형 원전 대신 SMR에 집중하고 있나요?
미국 전력 회사들은 과거 웨스팅하우스가 대형 원전을 짓다가 천문학적인 비용 초과와 공기 지연으로 파산한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SMR은 초기 투자 비용이 적고 공장에서 모듈 단위로 제작해 공사 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어 리스크가 낮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투자가 한국의 두산에너빌리티에 당장 악재로 작용하나요?
단기적으로는 아닙니다. 현재 뉴스케일 등 주요 SMR의 핵심 기기를 제작할 수 있는 압도적인 기술력과 캐파를 갖춘 곳은 두산에너빌리티가 거의 유일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프로젝트 시행사의 지분을 확보해 의사결정권을 쥐게 되면, 장기적으로 자국 기업들에게 기술을 이전하거나 부품 공급망을 대체하려 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