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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을 글로 적을 수 있느냐에 따라 지식 체계가 인정하는 세계의 범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 한글 창제는 한자로 담지 못했던 일상의 발음과 감각을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 기존 언어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아직 정립되지 않은 가치를 포착하려는 철학적·예술적 노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쓸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아는 세계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최근 노마 히데키의 언어 존재론 논의를 접하면서, 저는 언어와 지식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언어적 도구가 제한되어 있을 때, 그 언어로 담아내지 못하는 일상의 수많은 현상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언어 체계와 지식으로 세상을 전부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곤 합니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글에서는 표기 수단의 한계가 어떻게 앎의 경계를 규정하는지, 그리고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건이 우리 지식 세계에 어떤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철학적으로 짚어보고자 합니다.

표기할 수 없는 것은 지식에서 제외된다는 문제의식

공식적인 지식 사회는 오랫동안 '문자로 기록될 수 있는 것'만을 유효한 지식으로 인정해 왔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생생한 대화나 자연의 소리는 문자로 옮겨지지 않는 순간, 지식의 영역에서 손쉽게 배제되고 맙니다.

노마 히데키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무엇을 쓸 수 있는가에 따라 앎이 무엇인지 정의되는 기준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문자로 적지 못하는 현상은 사회적 담론에 진입하지 못하고, 결국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당하기 십상입니다.

표현의 한계가 앎의 경계를 결정하는 이유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울타리를 형성합니다. 특정 표기 체계가 담아낼 수 있는 음성과 개념의 범위가 좁다면, 그 체계 안에서 생산되는 지식 역시 협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사용하는 지식 체계가 완벽하며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기성 언어 프레임으로 정형화할 수 없는 영역을 '무의미한 것'이나 '비과학적인 것'으로 지워버리는 태도는 오히려 더 폭넓은 앎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앎의 확장은 언제나 언어의 경계를 넓히는 작업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한자 체계에서 한글 창제로 이어진 언어적 확장의 메커니즘

한글 창제는 단순한 문자 발명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과 지식 지도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과거 한자만을 공식 문자로 사용하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일상에서 개 짖는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소리 표현을 말로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남성이 마이크 앞에서 손동작을 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고, 화면 상단에는 '헛똑똑이들이 자주 보이는 특징'이라는 자막이, 중앙에는 '공식적인'이라는 짧은 자막이 떠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 체계가 실제로는 세상의 어떤 부분들을 사유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는지 살펴봅니다.


그러나 한자는 이러한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일상의 생생한 소리와 감각은 공식적인 지식 체계에 흡수되지 못하고 배제되어 왔습니다. 반면 한글이 도입되면서 우리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민중의 삶과 고유한 감각이 공식 지식 세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정조의 글에 '뒤죽박죽'과 같은 한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통치자와 고급 지식층의 언어에까지 일상의 생생한 표현이 직접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기존 언어 프레임이 일상의 감각을 기각할 때 생기는 문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동일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거대하게 구축된 공식 언어나 전문 용어, 제도권의 언어 틀로는 포착되지 않는 개인의 고통과 일상의 감정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제도화된 언어로 매끄럽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경험을 올바르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성 언어에 담기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언어 체계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가치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존의 명제에 오만하게 안주할 때 지식은 교조화되고 삶의 생동감을 잃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철학과 예술의 시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성 언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저는 근본적으로 철학과 예술이 바로 이러한 한계에 도전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아직 기존의 언어로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은 낯선 질문과 감각을 어떻게든 언어화하려는 안간힘입니다.

예술 역시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아픔이나 기쁨, 세상의 모순을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작업입니다. 기존 언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아 나설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기존의 언어로 다 설명하지 못해 답답했던 자신만의 감정이나 경험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의견을 댓글로 자유롭게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FAQ

노마 히데키가 한글 창제를 중요하게 평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자 표기 체계에서는 담아낼 수 없었던 한국어의 소리와 일상적 감각을 한글을 통해 비로소 문자로 기록할 수 있게 됨으로써, 지식 사회가 흡수할 수 있는 삶의 범주가 획기적으로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표기할 수 없는 언어나 소리는 왜 지식 체계에서 배제되었나요?

문자화되지 못하는 표현은 공식적인 기록과 학술적 담론으로 남아 전승되기 어렵기 때문에, 상층 지식 사회에서는 점차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요?

공식적이고 익숙한 언어 프레임이 세상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는 겸손함을 갖고, 철학이나 예술처럼 기존 언어로 다 담지 못한 가치를 끊임없이 말하고 표현하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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