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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의 인식 틀 안에서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칸트식 '상관주의'의 한계를 깨고, 인간 너머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추적합니다.
  • 우리가 믿는 자연의 필연적 법칙은 언제든 아무 원인 없이 깨질 수 있으며, 현실의 본질은 언제나 완전히 바뀔 수 있는 '절대적 우연성'에 맞닿아 있습니다.
  • 우주는 닫힌 경우의 수에 갇힌 확률적 주사위 놀이가 아니라, 칸토어의 수학적 무한처럼 아예 가능성의 총체조차 규정할 수 없는 무한히 열린 가능성 자체입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을 고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게임이나 시뮬레이션에 비유하곤 합니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평화롭고 당연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일상이 사실은 거대한 세트장과 조작된 각본에 불과했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감각하는 이 세계도 완벽한 규칙 아래 굴러가는 정해진 시스템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한 번쯤 품어보셨을 겁니다. 눈앞의 타인이 사실은 나와 마주할 때만 인간의 표정을 하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면 다른 모습으로 돌변한다는 기괴한 상상도 논리적으로는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죠.

하지만 대단히 독창적인 이론으로 현대 사상계에 바람을 일으킨 프랑스의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유한성 이후』에서 매우 강력한 주장을 던집니다. 현실은 결코 정해진 규칙을 가진 게임이나 시스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가 머금고 있는 진짜 절대적인 진실은 영원불변한 법칙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법칙과 사물이 아무 이유 없이 무(無)로 돌아가거나 통째로 뒤바뀔 수 있는 절대적 우연성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 중심주의적 생각에 갇힌 철학의 함정, '상관주의'

현대 서양 철학은 오랫동안 거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메이야수는 이를 상관주의(Correlationism)라고 명명합니다. 상관주의란 인간과 세계는 늘 서로 관계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만 파악할 수 있으며, 인간의 생각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정서의 뿌리에는 임마누엘 칸트가 주창한 유명한 개념인 '물 자체(Thing-in-itself)'가 있습니다. 칸트는 눈앞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보더라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보편 감각 필터를 통해 구상된 '돌멩이의 모습'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진짜 돌멩이 본래의 실재는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어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훗날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일갈했던 것도 이처럼 인간 이성의 명확한 한계를 넘어서는 불가지 영역을 학문적으로 함부로 참칭하지 말자는 겸손함의 표현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흑백 인물 사진이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아래쪽에는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계에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어떤 신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한국어 자막이 노란색으로 적혀 있습니다.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깊이 집중했던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성으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의 임계점을 명확히 짚어냈습니다.


하지만 메이야수는 이 상관주의가 겉만 겸손해 보일 뿐, 실제로는 인간 이성의 영역을 비좁은 감옥에 가두어 되려 강력한 비합리적 신앙을 조장하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간파합니다. 실재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규정해 버리니, 사람들은 그 한계선 너머에 자신들만의 신이나 맹목적 상징을 세워두고 도리어 맹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의 본모습을 어떠한 이성적 설명도 적용되지 않는 신비한 '의지'의 힘으로 환치해 사실상의 우상 숭배를 조형했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현대 사회는 합리적인 철학적 토론이 거세된 채, 각양각색의 교조화된 이념과 사상적 신조들이 서로 충돌하고 반목하는 온상이 되었습니다.

2. '절대적 우연성'의 발견: 내일 갑자기 세계의 규칙이 통째로 바뀔지 모른다

이 지겨운 반지성주의적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메이야수는 아주 날카로운 발상의 전환을 시작합니다. 상관주의자들의 정교한 규칙을 역으로 이용해,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엄연한 '진짜 실재'의 영역에 도달하려는 용기 있고 엄밀한 시도입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우리 존재가 왜 하필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지, 자연의 물리 규칙은 왜 하필 이런 메커니즘을 띠고 정립되어 있는지 그 최종적인 원인이나 궁극적인 이유를 대는 것은 그 누구도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말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의 룰이나 시공간의 형식들은 내일 당장 완전히 뒤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절대적인 가능성에 부딪힙니다.


온라인 게임 캐릭터와 고양이 형태의 조력자가 서 있는 판타지 게임 속 배경, 하단에는 한국어 자막이 표시되어 있다.

세계의 법칙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마치 게임의 운영자가 업데이트를 통해 시스템의 규칙을 전면 수정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뜨고 중력이 작용할 것을 의심치 않지만, 고도의 이성적인 임계점까지 머리를 쥐어짜 논증해보면 내일 갑자기 주위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지워지거나, 바람이 불자마자 무거운 나무 대신 지구가 두 동강이 나는 어처구니없는 파국이 벌어져도 논리적으로 반박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 게임 속 유저들이 평화롭게 행동하고 있을 때 운영자가 기습적으로 대대적인 패치를 감행해 아예 게임 엔진 규칙을 다른 체계로 교체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와 세계의 관계가 내 주관에서 무너지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조물과 법칙들이 언제 어디서든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완전히 이질적인 실재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을 뛰어넘어 존재해온 세계의 역설적 비밀, 곧 '절대적 우연성'입니다.

3. 확률론적 주사위 던지기를 멈추는 칸토어의 수학적 해법

이쯤 되면 과학적 사고를 근거로 상식적인 반론을 강력히 제기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과학 법칙은 수백 년간 관찰과 엄격한 실험을 거쳐 필연적인 인과를 보증해 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스코틀랜드의 뛰어난 사상가인 데이비드 흄이 밝혔듯, 우리의 뇌가 사건 A가 일어난 뒤 B를 마주하고 그것을 '원인과 결과(인과율)'라고 연역하여 믿는 방식은, 습관적이고 편의적인 상관관계에 기댈 뿐 논리적 불변성을 온전히 증명해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이러한 변동의 기회가 단순히 '매우 낮은 확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고전적인 우연이란 주사위를 굴렸을 때 6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수준의 우연에 한정됩니다. 이는 '주사위의 여섯 면'이라는 완벽하게 닫혀 정의된 경우의 수, 즉 전체 가능성의 엄밀한 총체가 미리 전제되었을 때 성립하는 확률 놀이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의 총서로 완성된 집합론을 여기에 도입해 보겠습니다. 칸토어는 특정 크기의 집합이 품은 고유 무한의 수보다, 그 무한한 원소들을 재구성해 뽑아낼 수 있는 새로운 부분집합의 크기가 언제나 훨씬 더 거대하다는 것을 완벽히 증명해 보였습니다. 무한을 아득히 초과하는 상위의 무한들이 꼬리를 물고 무궁무진하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경험하고 표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총체'라는 정해진 단락 자체가 수학적으로 완전히 성립 불가능함을 직시하게 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애초에 6선지가 그어져 있는 안전하고 단순한 확률 놀이판이 결코 아닙니다. 우주는 언제든 기분 내키는 대로 현행 주사위 던지기 프로세스를 폐지하고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게임을 선언할 수 있는 야생의 들판과 같습니다.

4. 메이야수가 던진 용기 있는 한 걸음과 사색의 여정

과연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장벽 안에서 안심하며 주저앉아야 하는 유한한 조건의 관중일 뿐일까요? 퀑탱 메이야수는 인간 이성에 씌웠던 유약한 상관주의 굴레를 걷어차고, 세계 그 자체의 압도적인 질료와 실재론적인 깊이로 과감히 우리 등을 떠밀어 냅니다. 수학이라는 인류의 발견을 무기 삼아 절대적 우연성의 기저를 짚어내는 그의 날카로운 혜안은 지적이면서도 일면 당혹스럽기까지 한 모험의 희열을 안겨줍니다.

그럼에도 끝내 지울 수 없는 꺼림칙함과 한계 또한 가슴 깊은 곳에 공존합니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엄정하게 수학과 이성의 수식을 동원해 관찰해 내는 '절대적 우연성'마저도, 결국 '우리가 이성적으로 도출한 결과'라는 의미에서 한 치도 인간 인식의 감옥을 탈출하지 못한 또 하나의 대리 표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인간이라는 거울을 완전히 부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참된 외계의 세계를 온전히 포착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이 상관주의의 거대한 중력을 완연히 깨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완벽히 기획되고 통제된 트루먼 쇼 같은 지루한 세상 대신에, 매일 아침 뜨는 태양마저 내일 아무 원인 없이 안 보여도 이상할 것 없다는 이 황홀한 우연성의 바다로 외출을 나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굳어진 상식에 기분 좋은 도끼질을 가해준 그의 용기는 정말이지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을 세차게 자극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당연하게 받아들인 풍경과 하루의 질서가 실은 어떠한 절대적 이유도 필연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의 거대한 행운이자 극적인 우연일 뿐이라는 통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들의 찬란한 생각의 물결을 댓글로 기쁘게 남겨 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FAQ

상관주의란 무슨 뜻이고 그것이 왜 현대학문에서 문제적인가요?

상관주의는 인간이 주관과 독립되어 실재하는 세계 자체를 인식할 수 없으며, 오직 인간과 세계의 상호적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시선입니다. 메이야수는 이 관점이 한계 바깥의 진리를 좇으려는 이성의 힘을 억눌러 결국 교조적 생각이나 불가지론 같은 비합리적 맹신을 조장하는 심각한 왜곡을 초래하고 만다고 비판합니다.

세상의 물리 법칙이나 인과율이 내일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상식적인 현실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입니다. 하지만 일찍이 데이비드 흄이 적시했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확고한 물리적 인과율은 수없이 반복해 겪은 데서 비롯된 주관적 습관과 편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일도 꼭 그러하리라는 절대적인 필연성을 논리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이야수는 이처럼 이성을 최고의 엄밀성으로 확장할 때 대면하는 최종적인 우주의 실상이 법칙조차 일순간에 소멸할 수 있는 '절대적 우연성'의 무대임을 도출한 것입니다.

수학 집합론과 칸토어의 증명이 메이야수의 철학에서 어떤 근거를 지지하나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변동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사건의 가능성 전체가 일종의 닫힌 설계구조로 명확히 통제되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오르크 칸토어는 대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무한한 크기의 부분집합들의 위계를 증명했고, 우주 전체가 포괄하는 '가능성의 닫힌 총체' 같은 식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우주는 여섯 개의 주사위 면처럼 일정한 룰 안에서 굴러가는 정해진 놀이터가 아니라, 매 순간 무한한 변화의 방향으로 무한히 증식해 나아가는 무규칙한 열린 공간임을 수학적 방식을 빌려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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