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의 행적을 '나름의 애국'으로 포장하려는 시각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 양심을 마취시키는 정당화의 변명과 윤동주 시인이 평생 지녔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대조합니다.
- 시대를 버텨낸 이들의 부끄러움과 희생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사적 정신을 기려야 하는지 사유합니다.

사연 없는 악당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영화를 봐도 마약 파는 악당에게조차 저마다의 눈물겨운 사연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완용처럼 대놓고 나라를 팔아 호의호식하겠다고 작정한 진성 매국노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은 자기 양심을 마취시킬 정교하고 정의로운 변명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두고 '나름의 애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시각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봅니다.
안녕하세요. 고요한 식당입니다. 하이.
최근 어느 채널에서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친일 인사들의 행적을 두고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 시절, 나름의 애국을 하며 살아간 이들을 지금의 잣대로 매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마 오늘 제가 드리는 이야기는 양쪽 진영 모두의 입맛에 맞지 않는 미지근하거나 싱거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친일파의 시체를 꺼내 찢어야 한다고 분노하는 분들에게도, 반대로 한국인들의 역사 의식이 미개하다며 혀를 차는 분들에게도 말이죠. 하지만 이건 제 근본적인 정서와도 닿아 있는 문제이기에 여러분과 함께 사유해보고 싶었습니다.
윤동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서, 부끄러움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저를 깊이 사로잡는 단 하나의 정서가 있습니다.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울어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잘 아시는 〈서시〉의 구절이지요. 〈자화상〉에서는 우물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워졌다 가엾어졌다를 반복하고, 〈쉽게 씌어진 시〉에서는 인생은 살기 어려운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고백합니다. 창씨개명을 앞두고 썼다고 알려진 〈참회록〉에서도 훗날 즐거운 날이 왔을 때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참회할 것 같아 밤마다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냅니다.
적극적인 친일을 선택했던 홍사익이라는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의 선택이 과연 애국으로 읽힐 수 있는지 다시 질문합니다.
윤동주는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자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적극적인 친일 행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시를 쓰는 내내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부끄러움을 토로합니다. 세상 전체가 어둠에 갇혀 괴로워하는데, 나 혼자 너무 쉽게 살아가는 것 같다는 답 없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이러한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고, 더 나은 존재로 도약하게 만드는 진짜 원천이라고 믿습니다.
자기 정당화라는 마약과 '나름의 애국'
친일파 정당화 논리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일본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입니다. 그분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부대에 부임할 때마다 "나는 조선인 홍사익이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이것을 굽히지 않은 애국심의 증거로 해석하더군요. 하지만 제 눈에는 조금 다른 심리로 읽혔습니다.
홍사익은 평민 출신으로 일제 치하에서 최고위 장성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조선이 무너지는 과정을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일본군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가 끝까지 조선인 이름을 지킨 것은 애국의 증거라기보다, 자기 양심을 벼랑 끝에서 지켜내기 위한 '스스로의 정당화'에 가까워 보입니다. "나는 조선인으로서 이름도 지켰으니, 조선인을 위한 나름의 애국을 하는 중이다"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것이죠.
홍사익은 자신의 논리를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비유했다고 합니다. 아일랜드인이 영국의 지배 아래서도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듯, 조선인도 내선일체의 체제 안에서 당당하게 정체성을 지키면 된다는 것이었죠. 당시에는 나름 정교한 논리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는 결코 평화롭지도, 당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피와 유혈 갈등으로 얼룩진 참혹한 역사였습니다.
자신의 친일 행위를 '나름의 애국'이라 정당화하는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지 돌아보게 됩니다.
체제 안에서 정체성만 지키면 아무 문제 없다는 홍사익의 옵션은 애초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나름의 논리적인 선택을 내렸을 때,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에 뛰어든 이들이 이미 존재했습니다. 홍사익과 함께 일본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나라가 넘어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며 독립군이 된 동기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런 길을 걸어간 이들이 존재하는데, 후대에 이르러 그들의 선택을 '자랑스러운 나름의 애국'으로 포장해 주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요?
윤치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방 후 윤치호는 "해방은 우리가 싸워 얻은 게 아니라 연합군 승리의 부산물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일본 신민으로 산 일을 비난하는 건 어불성설이니 분열하지 말고 단결하자"는 글을 남겼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화합의 메시지로 읽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자기가 내린 선택에 대한 부끄러움을 끝내 인정하지 못해 애써 떳떳해지려는 '절규'로 들렸습니다.
기려야 할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뚫고 나간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우당 이회영 일가의 삶은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윤치호나 홍사익 같은 엘리트들이 '나름의 애국'을 선택하며 포기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지위도, 재산도, 영예도 모두 지켰고 오히려 더 누렸습니다. 만약 해방이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까지 영예롭게 살았을 겁니다. 반면 당대 최고 명문가였던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는 전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조 원이 넘는 거부였지만, 예순이 넘은 온 가족이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 제일의 갑부 소리를 듣던 이석영 선생은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는 더 무거운 책임이 따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결코 한가한 도덕관념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이 존재하는데, 가진 것을 다 누리며 살았던 이들의 행적을 두고 "열심히 산 게 무슨 죄냐"며 애국으로 포장하는 것은 너무나 궁색한 논리입니다.
순응하며 살아가기보다 끝내 저항했던 이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1940년대쯤 되면 이미 대다수의 사람이 일제 체제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1910년 이후에 태어난 이들에게는 '변절'이라는 말조차 가혹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 보니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니까요. 저 역시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 필부들을 마녀사냥하듯 단죄하고 조롱하는 멍석말이 문화는 저 역시 경멸합니다.
하지만 순응하며 살아간 이들을 죽일 듯 비판하지 않는 것과, 끝내 순응하지 않고 자신을 던진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며 부끄러움을 완전히 거세해 버리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사연을 빌미로 양심을 마취시킨 이들의 변명에 손을 들어주기보다, 스스로의 한계와 부끄러움을 안고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의 정신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사유해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요한 식당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이.
FAQ
친일파 인물들에게도 나름의 사연과 논리가 있지 않나요?
진성 악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양심을 마취시킬 정당화 논리를 만듭니다. 하지만 편안함과 지위를 누리며 만든 변명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이 왜 역사적으로 중요한가요?
윤동주는 적극적인 친일 행적 없이 저항의 길을 걸었음에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끄러워했습니다. 이러한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더 나은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진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 사람들도 모두 비판받아야 하나요?
태어날 때부터 일제 치하였던 시대를 살며 어쩔 수 없이 순응했던 대중을 무조건 단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순응한 이들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그 엄혹한 어둠 속에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팝업 행사나 조롱 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누군가를 타겟 삼아 조롱하고 소비하는 자극적인 멍석말이는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녀사냥이 싫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에 대한 반성과 역사적 단죄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치부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오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