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열두 번 넘게 물을 건너야 했던 안동의 첩첩산중 오지마을 한절골에 고향을 떠났던 청년들이 다시 모여들고 있습니다.
- 조상들이 맨손으로 일군 400년 봇도랑과 전통 어로법인 먹지통을 이어받으며, 고단했던 역사를 삶의 자부심으로 바꿨습니다.
- 이웃의 사과밭을 내 일처럼 돌보고 온정을 나누는 한절골 사람들의 모습은 도시가 잃어버린 공동체의 온기를 일깨웁니다.

천지간에 으뜸이라 불리는 천지갑산 자락, 길안천 굽이치는 물줄기 너머에 자리한 경북 안동 한절골에 조용하지만 묵직한 변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고향을 떠났던 청년들이 하나둘 장성해 돌아오면서 고요하던 산골마을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인데요. 마을 앞 하천으로 남정네들이 모여들어 바위를 쌓고 고기를 몰며 유년의 추억을 재현하는 풍경은, 인구 감소로 생기를 잃어가던 여느 농촌과는 사뭇 다른 생동감을 전해줍니다.
잊혀가던 오지마을에 청년 농군들이 모여든 이유
한절골은 과거 바깥세상과 오가려면 열두 번, 많게는 열일곱 번이나 내를 건너야 했던 첩첩산중 오지였습니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책보를 머리에 인 채 헤엄쳐 학교를 다녔을 만큼 험준하고 가난했던 기억이 서린 곳이지만, 지금 이곳 사람들에게 과거의 고단함은 따뜻한 추억이자 웃음꽃을 피우는 별난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마을 남정네들이 함께 하천으로 나가 전통 방식인 '먹지통'으로 물고기를 잡으며 유년 시절의 정겨운 추억을 나누고 있습니다.
장성한 이들이 다시 흙과 물이 있는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유년 시절 몸으로 체득한 자연의 기억과 이웃 간의 끈끈한 정 때문이었습니다. 길안천에서 돌을 쌓아 임시 고기집을 만든 뒤 맨손으로 물고기를 몰아 잡는 전통 어로 방식인 먹지통을 재현하며, 이들은 자연 속에서 누렸던 느긋한 여유와 공동체의 결속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꺾지와 돌고기, 얼룩동사리를 잡으며 나누는 웃음 속에는 오랜 시간 변치 않은 고향의 품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400년 세월을 버텨온 생존의 지혜와 역사적 자부심
이 작은 산골마을이 오랫동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사람을 다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선조들이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며 남긴 지혜가 깊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협곡을 흐르는 하천 물이 산비탈 경작지에 닿지 못하자, 조상들은 무려 3km에 달하는 돌을 손수 쌓아 수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약 400년의 역사를 품은 봇도랑입니다.

조상들의 땀과 지혜로 400년 세월을 버텨온 마을의 터전은 오늘날 우리 삶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맨손으로 물길을 내어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옥토를 일궈낸 선조들의 개척 정신은 지금의 후손들에게도 깊은 자긍심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조선 중기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총 8권의 읍지인 영가지가 약 200년 동안 이 마을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내려왔다는 사실 역시, 깊은 산속 은신처로서의 지리적 의미를 넘어 마을 공동체가 지켜온 문화적 깊이를 증명합니다.
네 일 내 일 없는 울력, 사과밭에서 피어나는 연대
오늘날 한절골 경작지의 약 90%는 사과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겨울철 잦은 눈비로 가지치기가 늦어지자 젊은 농군들과 귀농 11년 차 이장, 마을 장정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데 모여 톱을 들었습니다. 혼자만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마을 전체의 일을 기꺼이 품앗이하는 '울력'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현장입니다.

너의 일과 나의 일 구분 없이 서로의 사과밭을 돌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끈끈한 공동체의 정이 느껴진다.
돈에 얽매여 쫓기듯 살아가는 도시의 삶과 달리, 이곳에서는 이웃을 위해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헌신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씨를 뿌리면 가을에 거두고 익은 열매가 절로 떨어지듯,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서로를 보살피는 태도가 한절골의 일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자연의 속도를 회복하며 그려갈 농촌의 내일
수십 년 세월이 흘러도 방앗간 디딜방아 소리와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는 한절골의 모습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관계의 빈곤을 겪는 현대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갓 쪄낸 찰떡을 이웃과 스스럼없이 나눠 먹는 온정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지켜낼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한절골 사람들은 앞으로도 조상들이 물려준 봇도랑의 물길처럼 묵묵히 흙을 일구고 사과나무를 가꾸며 살아갈 것입니다. 고향을 지키는 토박이와 새로운 삶을 찾아 정착한 귀농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 느리고 단단한 연대는, 소멸 위기에 놓인 농촌 마을들이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FAQ
한절골의 전통 어로 방식인 '먹지통'은 무엇인가요?
그물이 귀하던 시절 길안천 바위를 쌓아 물고기가 숨을 수 있는 임시 고기집을 만든 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돌을 젖히며 맨손으로 물고기를 쫓아 잡던 한절골 고유의 전통 물고기잡이 방식입니다.
마을의 상징인 봇도랑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협곡을 흐르는 길안천의 물이 높은 산비탈 밭으로 올라오지 못하자, 약 400년 전 선조들이 약 3km 구간에 돌을 쌓아 만든 인공 수로입니다. 이를 통해 척박한 산골에서도 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절골에 보관되어 온 '영가지'는 어떤 기록물인가요?
조선 중기 권기가 편찬한 총 8권 규모의 안동 읍지로, 당시 안동의 산천, 풍속, 토산물 등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깊은 산골 오지였던 한절골에 약 200년 동안 안전하게 보관되어 내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