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은평구의 재개발 확정 구옥으로 이사한 공간 디자이너 부부는 편리한 첨단 설비 대신 80년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 기존 합판과 회전식 창 걸쇠 등 옛 원형을 살리고 삼베 천장 같은 합리적 자재를 활용해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 언젠가 사라질 유한한 공간이지만, 가족들은 불편함을 유쾌한 생활 규칙으로 바꾸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빠르고 매끄러운 새 아파트와 디지털 도어록이 당연해진 시대입니다. 그런데 서울 은평구의 한 아담한 골목길, 1979년에 지어진 붉은 벽돌 주택으로 기꺼이 발걸음을 옮긴 가족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집은 재개발이 확정되어 머지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입니다. 언젠가 철거될 전셋집에 이사해 도어록 대신 묵직한 열쇠를 쥐고, 불편함을 삶의 재미로 누리는 이 가족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현대 주거 형태에 신선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재개발 확정 구옥으로 들어간 가족
서울 끝자락 은평구, 아파트와 오랜 구옥이 나란히 엉겨 있는 동네에 감나무 두 그루가 마당을 지키는 2층 구조의 붉은 벽돌 집이 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에서 따와 ‘감남우집’이라 부르는 이 1979년산 양옥은 공간 디자이너 남편 최재영 씨와 아내 김하영 씨 가족의 새로운 둥지입니다. 낡고 스러져가는 구옥을 현대적으로 바꾸기보다, 건립 당시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 눈길을 끕니다.
재개발이 확정된 동네이지만, 마당의 감나무와 옛 건축의 정취를 그대로 품고 있는 소중한 보금자리입니다.
이 집은 도어록조차 달지 않았습니다. 외출했다 돌아온 남편은 주머니 속 열쇠를 꺼내기보다 일부러 벨을 누르고 기다립니다. 문을 열어주러 나오는 아내와 아이들의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는 그 짧은 순간이야말로 집이 주는 가장 따뜻한 환대라고 믿기 때문이죠. 열쇠를 잊고 온 날이면 담을 넘는 작은 소동이 벌어지지만, 가족에게는 이마저도 정겨운 일상의 추억이 됩니다.
왜 중요한가: 사라질 공간에 가치를 더하는 혜안
보통 재개발을 앞둔 전셋집에 많은 공을 들여 리모델링을 하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는 손실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남들은 모두 옛것을 허물고 새것을 세우려 할 때, 이들 부부는 왜 굳이 곧 사라질 집에 이토록 깊은 애정을 쏟는 걸까요?
이들에게 이 집은 단순히 잠깐 머물다 떠나는 임대 공간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의 삶을 품어온 집의 ‘마지막 주인’으로서, 공간이 소임을 다하는 순간을 함께하고 기억을 아카이빙하는 과정 자체가 큰 가치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논리를 넘어 공간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만드는 삶의 밀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무엇이 동인가: 옛 원형의 존중과 합리적인 공간 재해석
공간 디자이너인 남편은 기존 구조와 낡은 소재들을 억지로 숨기지 않았습니다. 구옥 특유의 옥색 외장과 대문 틀을 살리되, 대문에는 철제 그레이팅 대신 FRP 그레이팅 자재를 활용했습니다. 완전히 막히지도, 너무 훤히 뚫리지도 않은 적절한 격자 구조를 통해 동네와의 자연스러운 소통과 심리적 사생활 보호를 동시에 달성한 비결이죠.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구옥의 구조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따뜻한 실내 공간입니다.
거실 내부 역시 놀라운 반전을 선사합니다. 천장의 낡은 구조재를 무리하게 철거하는 대신, 친환경 자재인 삼베를 붙여 따뜻한 웜톤의 거실을 완성했습니다. 뜯어내고 다시 바르는 공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습도 조절과 은은한 질감을 얻어낸 합리적인 혜안입니다. 옛 방문의 홈 디자인을 그대로 두고, 내창에는 직접 제작한 목재 틀과 회전식 창 걸쇠를 달아 옛 시전의 운치를 이어갔습니다.
누가 영향을 받는가: 불편함이 바꾼 가족의 삶과 생활 규칙
공간의 크기가 줄어들고 구조가 예전과 달라지면서, 4인 가족의 일상에도 기분 좋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단 하나뿐인 화장실입니다. 아침마다 붐비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조금 더 일찍 일어나거나, 샤워 중에도 화장실을 배려하는 등 가족 간의 사소하지만 따뜻한 규칙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합판의 따스한 질감과 화이트톤의 개방감을 조화롭게 섞어, 좁은 공간을 더 넓고 아늑하게 구성했습니다.
아이들 방 역시 커다란 침대 대신 매일 아침 스스로 이불을 개고 정리하는 정갈한 습관을 키우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공간이 좁을수록 상시 노출을 줄이는 가림막을 활용해 세탁기나 에어컨 같은 가전을 깔끔하게 숨겼고, 거실 소파를 없애 가족들이 언제든 다채롭게 공간을 변주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하자 오히려 가족 간의 대화와 온기가 더욱 짙어졌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살필 것인가: 유한함이 선사하는 삶의 충실함
감남우집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10년 뒤, 혹은 그보다 빨리 이 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해진 결말이 있기에 부부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더욱 애틋하고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이 집에서의 하루하루를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따뜻한 아카이브로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자산 가치로만 집을 바라보는 시대에, 시간을 이어가고 불편함을 여유로 바꾼 감남우집의 도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슴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FAQ
재개발이 확정된 구옥에 전세로 들어가 리모델링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간 디자이너인 남편과 아내는 오래된 단독주택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사라져가는 집의 '마지막 주인'으로서 이 집이 가진 지난 시간과 기억을 존중하고, 가족만의 소중한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습니다.
구옥 천장에 사용된 삼베 자재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삼베는 합리적인 비용으로 기존 천장 틀을 뜯지 않고 가릴 수 있는 친환경 자재입니다. 습도 조절 기능이 있으며, 나무 마루 및 벽체와 따뜻한 웜톤으로 어우러져 옛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효과를 줍니다.
공간이 좁고 화장실이 하나라 생기는 불편은 어떻게 극복했나요?
가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 습관을 들이고, 샤워 중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화장실을 공유하는 등의 사소한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아이들은 매일 아침 이불을 개는 등 생활 방식을 바꾸어 좁은 공간에 유쾌하게 적응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