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종착지인 죽음이나 거대한 최종 목적이 개별 순간의 삶을 완전히 규정하거나 거장의 기둥처럼 떠받치는 것은 아닙니다.
- 인간 정신은 현재를 계속 초월하여 타인을 향하는 특성을 지니며, 완전히 고립된 순수한 '나만의 의미'는 환상에 가깝습니다.
- 사물이나 개인적 욕망에 부여한 가치는 변하기 쉽지만, 타인의 자유를 돕고 구축한 가치는 쉽게 허무에 빠지지 않는 안정적인 삶의 바탕이 됩니다.

살아가면서 "나는 왜 사는 걸까?" 혹은 "인생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삶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깊은 허무나 부조리에 직면하곤 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이러한 허무에 대해 날카롭고도 따뜻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삶은 결코 종착지나 하나의 거시적 목적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순간순간의 행위와 타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진짜 의미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순간의 목적을 발견하기
어릴 적 한 번쯤 해보았을 "어차피 죽을 텐데 왜 힘겹게 살아갈까?"라는 의문은 삶 전체를 하나의 최종 결과로만 판단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합니다. 보부아르는 그의 저작 《피뤼스와 시네아스》(한국 번역본 《모든 사람은 혼자다》)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피뤼스 왕 우화를 소개합니다. 정벌을 떠나려는 피뤼스 왕에게 신하 시네아스가 "그 다음은요?"라고 연속해서 묻자, 왕은 다른 나라를 정벌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와 쉬겠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신하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쉬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전체 목적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이 순간의 행위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 우화는 어차피 편안함이나 휴식이 목표라면 과정 전체가 무용하다는 논리로 확장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보부아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피뤼스 왕이 훗날 집에 돌아와 쉰다고 해서, 현재 진행하는 하나하나의 정벌 활동이 오직 '쉬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의 개별 행위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목적과 의미를 지닙니다.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종착점이 죽음으로 확정되어 있다고 해서, 죽음이라는 결과가 우리의 매일매일 살아가는 순간을 밑에서 떠받치거나 부정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체를 통해 부분을 억지로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부조리에 빠지게 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과 타인과의 연결
그렇다면 인간 정신은 왜 하나의 정해진 목적에 안주하지 못하는 걸까요? 보부아르는 인간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어떤 고정된 점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면 결코 거기에 멈추지 않고 항상 그 바깥을 향해 나아가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정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우리 정신은 곧 그 목적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할 것입니다.
고정된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매는 대신,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역동적인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보부아르는 우리가 스스로를 초월할 때 지향하게 되는 자리가 다름 아닌 '타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타인과 완전히 분리된 오롯이 '고유하고 특권적인 나'를 찾겠다는 시도 자체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행동조차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거나, 타인을 돕고 싶거나, 타인을 염두에 둔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직 나만을 위한 고유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겠다는 접근 방식은 인간 정신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허무를 극복하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가치, 타인의 자유
인생의 거대한 목적이 없고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삶의 무의미함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보부아르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단정하는 거시적 진술 역시 삶 전체를 고정된 틀로 전제하는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타인을 향한 삶이라는 강력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나의 영향력으로 자라난 타인이 또 다른 자유를 펼쳐나가는 것, 그것이 허무를 넘어서는 삶의 구체적인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물질이나 개인적 쾌락 같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할 경우, 그 가치는 오직 '나'라는 주관에만 의존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바뀌거나 깊은 우울에 빠지면 그동안 추구했던 대상은 순식간에 무가치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불안정성을 지닙니다. 반면 타인은 나처럼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타인이 자신의 자유를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환경을 마련해 주고 발판이 되어준다면, 설령 내 마음이 흔들리더라도 내가 남긴 가치는 그 타인의 삶 속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자녀를 성심껏 길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게 돕는 일처럼, 타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행위야말로 내 삶의 가치가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가장 안정적인 바탕이 됩니다.
삶의 의미를 전부 알지 못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거대한 목적이나 정답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가 건네는 위안은, 거시적인 삶의 정답을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의 경험과 타인과의 온전한 연결 속에서 얼마든지 풍요로운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공부를 해오면서 정답에서는 멀어졌을지 몰라도, 하루하루 마주하는 작은 순간들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삶이 이어진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삶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정답을 강박적으로 찾기보다, 오늘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순간의 행위에 집중하고 내 곁에 있는 누군가의 자유와 행복에 작게나마 기여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삶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깊은 생각을 댓글로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FAQ
삶의 전체적인 목적을 세우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요?
인간의 정신은 한 지점에 멈춰있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목적을 향해 스스로를 초월하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목적에 다다르더라도 정신은 곧 그 바깥으로 나아가려 하므로, 삶 전체를 관통하는 완결된 거시적 목적을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만을 위한 목적이나 물질적 성취는 왜 쉽게 허무해지나요?
사물이나 주관적인 목표에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가 오직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 심리 상태가 변하거나 우울감이 찾아와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대상은 순식간에 무가치해지는 불안정성을 지닙니다.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떻게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나요?
타인은 나처럼 스스로 가치를 판단하고 자유를 발휘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타인이 자유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발판을 만들어주면, 내 주관적 마음이 변하더라도 그 타인의 삶 속에서 내가 만든 가치가 지속되므로 허무에 빠지지 않는 안정성을 얻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