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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과 논리가 무너지고 세상의 불합리함에 맞닥뜨리는 순간, 인간은 마주한 상황을 '무한히 체념'함으로써 한 차례 내면적 성숙에 다다르게 됩니다.
  •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체념의 비장함에 머무는 대신, 불가능을 담대히 넘어서서 일상을 고스란히 복구하고 삶을 온전히 누리는 '신앙의 기사'를 더 높은 실존적 경지로 바라보았습니다.
  • 자신의 주관적 지식과 가치 기준을 과신하는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절망을 기적 같은 삶의 에너지로 전환하여 평범한 현재의 행복을 완전히 긍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던지는 가장 흔하면서도 심오한 질문 중 하나는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저는 지인이나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선뜻 답하기가 곤란해지곤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쉽게 입에 올리는 '믿음'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명확히 정의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분석심리학자 칼 융 역시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알 뿐이다(Know)"라고 답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융에게 믿음이란 증거를 저울질해 수용하는 지적인 작용인 반면, '앎'은 이성의 장벽을 깨부수는 직접적이고도 생생한 체험인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탱하는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한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동하는 특별한 믿음의 영역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키르케고르의 명저 『두려움과 떨림』을 바탕으로, 이성이 맞닥뜨리는 불합리한 부조리를 넘어 평온한 일상을 되찾는 초월적 신앙의 비밀과 참된 긍정의 의미를 깊이 짚어보려 합니다.


숲속을 배경으로 갈색 재킷을 입은 남성이 카메라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믿음의 본질은 단순한 관념적 확신을 넘어, 인간이 이성적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을 때 비로소 마주하는 생생한 체험입니다.


첫 번째 단계: 부조리를 떠안는 '무한한 체념의 기사'

키르케고르는 구약성경의 아브라함과 그의 외아들 이삭의 일화를 통해 인간 정신의 높낮이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합니다.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가혹하고 모순적인 명령 앞에서도 아브라함은 망설임 없이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현대의 합리적 관점에서는 결코 이해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난해한 선택적 행위를 추적하며, 정신적 성숙의 한 단계인 ‘무한한 체념의 기사(Knight of Infinite Resignation)’를 그려냅니다.

무한한 체념의 기사는 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존재입니다. 내 힘으로 통제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숙명적인 모순을 직시하며, 그로 인한 고통과 희생을 오롯이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여 고이 다스립니다. 만약 가혹한 시련이 닥친다면 세상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공격하기보다, 도리어 비극의 날카로운 칼날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내면 깊숙이 침잠하는 영웅적 자질을 지닌 이들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지식인 대중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장한 체념의 기사로서 소리 없이 분투하며 삶의 우울을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이성에 의지해 세상을 분석하며 이 비장함에 젖어들 때가 무척 많은데요. 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이러한 무한한 체념은 인간으로선 진정 고결하고 훌륭할지언정 아직 궁극적인 도달점에 도달한 상태는 아닙니다. 부조리를 기꺼이 떠맡은 이 영웅은 삶의 무거운 구조에 짓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직면한 상황이 온전히 해결되더라도, 이삭과 예전처럼 아무 걱정 없이 해맑게 장난치며 웃을 수 있는 가볍고 행복한 일상 자체를 되살려내지는 못합니다.


짙은 갈색 재킷을 입은 남성이 검은색 배경의 숲길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말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자막이 적혀 있습니다.

모순된 상황 속에서 모든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락으로 향하는 극단적인 자기희생적 인간상을 대변합니다.


두 번째 단계: 부조리를 넘어 일상을 되찾는 '신앙의 기사'

키르케고르는 이 비장한 체념의 심연마저 한 차례 더 가뿐히 뛰어넘어, 일상 자체를 통째로 회복해 내는 이들을 가리켜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라 칭합니다. 아브라함이 빛나는 진짜 이유는 소중한 자식을 냉엄하게 버리기로 무겁게 다짐하는 체념의 절차를 끝까지 밟아낸 뒤에도, 신을 향한 온전한 지각이자 '앎'에 도달해 기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삭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처절하고도 명백한 이성적 불가능성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막막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예리하게 직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이기에 아들은 결국 보존될 것이며, 기쁘게 평범한 삶으로 복귀해 다시 함께 웃을 것"이라는 강력한 모순적 희망을 오롯이 쥐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절대 성립될 수 없는 이 벼랑 끝의 도약이 마침내 아들을 되찾고 깨져버린 일상의 행복을 고스란히 복원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깊은 절망의 계곡을 지나 세속으로 돌아온 신앙의 기사는 기묘할 만큼 경쾌한 '가벼움'을 풍깁니다. 체념의 기사가 밤낮 사유에 갇혀 무거운 긴장감을 풍긴다면, 신앙의 기사는 오히려 세속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일상을 즐기며 기쁘게 밥을 먹고 집안일도 성실히 돌봅니다. 그가 겪었던 전무후무한 고독의 흔적은 일상의 환한 웃음 뒤로 완벽하게 감춰집니다. 참혹한 절망의 심연을 통과해 낸 이들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평온과 소소해 보이는 일상적 가치입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삶을 완전히 긍정하기

우리는 왜 일상의 사소한 충돌과 모순 앞에서도 쉽게 공허해지고 우울에 압도당하는 걸까요? 이는 단순히 사건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여전히 자신의 주관적인 가치 기준만을 중심에 두고서 세상을 재단하고 판정하려 들기 때문(자기중심성)일지 모릅니다.

참된 신뢰는 내 주관적인 아집과 한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절벽 끝에서 시작됩니다. 한 모금 숨쉬기도 벅찬 한계 상황에서 시끄러운 자아를 내려놓고,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 몸을 담담히 맡기는 영혼의 도약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설령 이성이 온통 실패를 선언할지라도, 삶의 위대함은 우리의 초라한 절망을 안은 채 다시금 찬란한 새 하루를 기적처럼 선사합니다. 고통마저 감싸 안는 주체적인 긍정은 우리의 소중한 회복력이 되어 줍니다.

한계와 경계: 현실 세계에 대입해 볼 때의 숨겨진 장벽

다만 이러한 믿음의 도약을 삶에 적용할 때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장벽이 마주합니다. 현실의 냉혹한 맥락을 덮어두고 '신이 어떻게든 다 해결해 주겠지'라며 안일한 낙관에 취하는 맹목적인 도피주의나 기만적인 맹신(盲信)과 겉보기에는 매우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그토록 소리 높여 말한 신앙은 내면의 아집이 깨지는 고뇌와 외로운 단독자로서의 처절한 성찰을 건너뛰어도 되는 값싼 위로나 마취제 같은 신념이자 관념이 아닙니다. 삶이 유발하는 깊은 아픔과 부조리를 향해 차가운 날을 세운 이성을 휘두르고, '무한한 체념'이 주는 참담한 고독을 뼈저리게 겪어낸 이들에게만 비로소 허락되는 거대한 삶의 변화입니다. 이 치열한 과정과 영혼의 흔들림을 생략한 채 그저 편안한 결과만을 영악하게 계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허상과 기만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결론: 이성의 한계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믿으실 겁니까?

칼 융이 "맹신하는 차원을 넘어 신이 작동하는 원리를 직접 알 뿐"이라고 밝힌 것처럼, 파편화된 상식의 경계를 깨고 우주와 삶의 깊은 이치를 온몸으로 알아차리는 심오한 영적 영토가 우리 내면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통해 우리의 자아가 온전히 깨질 때 진짜 믿음이라는 수수께끼가 어떻게 건강한 생의 긍정으로 되살아나는지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뜻하지 않는 삶의 벼랑 끝에서 여전히 슬픈 체념의 무게에 짓눌려 있지는 않으신가요? 혹은 모순된 절망의 현실을 가벼운 도약으로 바꾸어내는 그 비범한 믿음의 힘을 아주 조금이나마 예감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고독하고 치열한 일상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내면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나만의 무기는 무엇인지, 조용하고 따뜻한 댓글로 가만히 전해주시면 기쁘게 전해 듣겠습니다.


FAQ

무한한 체념의 기사와 신앙의 기사가 보여주는 가장 일상적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체념의 기사는 고난과 한계를 직시하고 수용하지만 그 무게에 짓눌려 있기에 삶이 늘 비장하고 무겁습니다. 반면 신앙의 기사는 그 모순을 완벽히 지나온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기쁘게 밥을 먹고 어린아이처럼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오롯이 누릴 줄 압니다.

칼 융이 남긴 '나는 판단하는 근거를 가지는 단순한 대상을 믿는 게 아니라 그저 안다'라는 고백은 이 논지와 어떻게 이어지나요?

합리적인 검증과 객관적 유용성을 통해 움켜쥐는 대상은 조건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의 얕은 믿음입니다. 반면 칼 융의 '앎'은 이성의 울타리를 아득히 뛰어넘어, 존재의 모순이 지극해지는 종착점에서 우리의 생을 흔드는 초월적 흐름을 직접 온전히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실존적 도약을 함의합니다.

치열한 고민 없이 단순히 신을 신뢰한다는 '맹신'하는 일반적 태도도 신앙의 기사로 볼 수 있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이 유발하는 모순과 비극적 심연을 깊이 뼈저리게 느껴본 '무한한 체념'의 참담한 고독을 겪지 않고, 막연하게 '다 해결되리라' 기대하며 계산하는 태도는 기만적인 도피에 불과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외로운 철학적 번민과 참회 없이 그저 안락함만을 구하는 이 상태를 가장 경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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