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의 탄생은 '가능성을 떠도는 삶'에서 '하나의 현실에 뿌리내리는 삶'으로 어른을 옮겨 놓는 사건이다.
- 칼 융의 푸에르 아이테르누스(영원한 소년)와 영화 〈어바웃 타임〉의 시간 여행 장면은, 아이가 어른의 도피 가능성을 어떻게 차단하는지를 보여 준다.
- 그래서 출산은 단순한 가족 구성의 변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마주하는 다른 종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달 남짓 같이 지내면서 제가 느낀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출산은 어른을 '가능성을 떠도는 삶'에서 '하나의 현실에 뿌리내리는 삶'으로 옮겨 놓는 사건이다. 직업적으로 도전이라 부를 만한 일들을 적지 않게 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처음 두 눈으로 본 순간 들었던 감각은 그 어떤 도전과도 달랐습니다. 가장 솔직한 단어로 표현하면 '당황스러움'이었고, 동시에 '이게 가상현실 같다'는 묘한 비현실감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비현실감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른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바꿔 놓는지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나: 아이를 본 첫 감각은 '비현실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얘가 진짜 내 아이라고?"였습니다. 너무 또렷한 존재가 눈앞에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가상현실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그 어떤 사건보다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감각이 강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보통 우리는 분명히 거기 있는 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고, 멀고 흐릿한 것을 비현실이라고 부르니까요. 그런데 아이의 경우에는 정반대였습니다. 너무 또렷하고 너무 묵직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현실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역전된 감각이 이 글의 출발점입니다.
왜 그렇게 느껴졌나: 우리는 평소에 '도피로서의 현실'을 살고 있다
저는 그 이유를, 제가 평소에 감각하던 '현실'이 사실은 그렇게 진지한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금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마음을 옮기며 살아갑니다. 영상, 게임, 뉴스, 다음 목표, 미래 계획.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늘 다른 시점, 다른 장소에 가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목표 지향적으로 살아온 편이라 열심히 살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열심히 산다'는 것과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마주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의 현실은 사실 느슨한 것이었고, 언제든 다른 가능성을 향해 비켜설 여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는 너무 진지한 현실로, 어떤 도피의 여지도 주지 않는 형태로 눈앞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익숙했던 느슨한 현실 감각이 갑자기 깨지면서, 오히려 그쪽이 비현실처럼 느껴진 것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아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비현실감은 평소 현실을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았던 삶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이 변화를 한 단어로: '뿌리내림'
아이의 존재를 한 개념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저는 뿌리내림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인간은 보통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가능성들을 동시에 열어 둔 채, 선택과 우연을 통해 하나의 경로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 펼쳐진 가능성들을 한 점으로 모아 버립니다.
이 아이가 태어났으면 다른 아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이 아이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아이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고, 다른 가능성으로 슬쩍 옮겨 갈 수 없습니다. 이 하나의 가능성에 저는 뿌리내려야만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평소에도 매 순간 뿌리내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마신 물 한 잔도 마시지 않을 수 있었던 가능성 위에서 선택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일상의 뿌리내림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늘 다른 가능성을 향해 달려 나가야 하니까요.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미 결정된 것보다 앞으로 결정해야 할 것에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 평소의 망각을 깨고, '이미 뿌리내려진 현실'을 시각적으로 들이미는 존재입니다.
무엇이 이 변화를 만드나: 〈어바웃 타임〉과 시간 이동의 포기
이 감각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저는 영화 〈어바웃 타임〉을 떠올립니다. 주인공과 그 아버지는 시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회되는 행동이 있으면 시간을 되돌려 수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주인공이 과거로 한 번 다녀온 뒤 현재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로 바뀌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정자 중 하나, 수많은 난자 중 하나가 만나야 합니다. 아주 작은 시간차, 아주 사소한 행동의 차이만 있어도 다른 정자와 결합하게 되고, 그러면 이 아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선택된 생명은 부모에게 도피할 수 없는 진지한 현실이자 뿌리내림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더 이상 아이의 탄생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지 않습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게 된 아이의 존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 역시 같은 선택을 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자유의 자원으로 쓰지 않기로 결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가 어떻게 달라지나: 푸에르 아이테르누스에서 푸에르 나투스로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푸에르 아이테르누스(puer aeternus)', 즉 '영원한 소년'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의 가능성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가능성만 탐색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아이들이 환상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며 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선택과 집중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그 푸에르 아이테르누스에 대비되는 정신을 같은 라틴어 표현으로 굳이 붙여 본다면, 푸에르 나투스(puer natus), '태어난 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영원한 소년 옆에 태어난 아이가 놓이는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어른을 영원한 소년에서 벗어나도록 끌어내리는 존재가 바로 이 '태어난 아이'라는 점입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이제 너는 하나의 가능성을 살아야 한다"고 말 없이 강제합니다.
물론 모든 어른이 부모가 되어야만 이런 변화에 도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출산이라는 사건은 그 변화가 매우 압축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형태로 들이닥치는 경로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지켜볼 것인가: '지금 여기'를 다시 배우는 시간
그래서 저는 출산을 가족 구성이 한 명 늘어나는 사건으로만 정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른의 시간 감각, 가능성 감각, 현실 감각이 동시에 바뀌는 사건에 가깝습니다. 평소 같으면 흘려보냈을 '지금 여기'를 어쩔 수 없이 진지하게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죠.
앞으로 제가 스스로에게 지켜볼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시 익숙한 도피의 현실로 슬쩍 돌아가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간은 한 번 깨달았다고 그대로 살아지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른 하나는, 이 '뿌리내림'의 감각이 아이와의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관계, 다른 일, 다른 시간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마주하며 부모로서의 삶과 책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부모가 되어 본 모든 인간이 이런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해 올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아이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나요? 꼭 자녀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을 어쩔 수 없이 '지금 여기'로 끌어내린 존재가 있었다면 그 이야기도 함께 들어 보고 싶습니다.
FAQ
왜 아이를 처음 봤을 때 '가상현실 같다'고 느꼈다는 건가요?
평소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며 익숙하게 감각하던 것은 사실 다른 가능성으로 늘 비켜설 여지가 있는 느슨한 현실이었습니다. 반대로 아이는 도피의 여지를 주지 않는 묵직한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에, 익숙한 현실 감각과 어긋나면서 오히려 비현실처럼 느껴진 것이라고 글에서는 해석합니다.
'뿌리내림'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수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두고 떠도는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의 현실에 자기를 묶어 두는 경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글에서는 '이 아이의 부모로서, 다른 가능성으로 옮겨 갈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일이 가장 극적인 뿌리내림의 사례로 제시됩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은 왜 인용됐나요?
주인공과 그의 아버지가 아이를 낳은 뒤로는 더 이상 아이 탄생 이전 시점으로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작은 차이만 있어도 같은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 '부모가 된다는 것이 가능성을 자유롭게 되돌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일'이라는 글의 주장을 잘 시각화해 주는 사례로 인용됐습니다.
푸에르 아이테르누스와 푸에르 나투스는 어떻게 다른가요?
푸에르 아이테르누스는 칼 융이 사용한 개념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의 가능성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새로운 가능성만 탐색하는 '영원한 소년'을 가리킵니다. 푸에르 나투스는 글쓴이가 그 대비 개념으로 제안한 표현으로, '태어난 아이' 즉 어른을 한 가능성에 뿌리내리도록 끌어내리는 존재를 가리키는 자기 나름의 명명입니다.
꼭 부모가 되어야만 이런 변화를 겪을 수 있나요?
글에서는 출산이 그 변화가 가장 압축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형태로 닥치는 경로 중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모든 어른이 부모가 되어야만 이 변화에 도달한다고 단정하지는 않으며,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존재'라면 다른 형태의 관계나 사건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둡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