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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디세이>는 개봉 전 불거진 PC 캐스팅 논란을 대중의 착각으로 뒤집으며 철저히 의도된 연출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 CG를 배제한 아날로그 연출과 파격적인 캐스팅은 신화 속 거품을 제거하고, 문명을 지탱하던 약속을 파기하는 현실적인 인간의 역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 전작 <오펜하이머>에 이어 문명의 질서가 무너지는 전환기 속에서 책임과 괴로움을 짊어질 현대적 오디세우스가 누구인지 묵직한 화두를 던집니다.

개봉 전까지만 해도 다들 '놀란마저 PC에 맛이 갔냐'며 난리를 쳤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불필요해 보이던 모든 노이즈마저 철저히 계산된 연출이었어요. 안녕하세요, 고요한 식당입니다. 오늘은 영화 <오디세이>를 관람하고 느낀 생각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 뒤지게 재밌었고,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은 티가 팍팍 났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특유의 아날로그 고집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작품이었어요.

개봉 전 붉어진 PC 논란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오디세이> 개봉을 앞두고 가장 뜨거운 논란을 모았던 지점은 단연 캐스팅이었습니다. 신화 속 헬레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어야 함에도, 관객이 기대하던 전형적인 미인형 배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캐스팅이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란색 야구 모자를 쓴 남성이 마이크 앞에 앉아 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영화 <트로이>의 헬레네와 <오디세이>의 헬레네를 비교하는 인물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기존 영화가 그려온 전형적인 헬레네의 이미지와 달리 이번 작품이 보여준 캐스팅은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자아냈습니다.


대중은 감독마저 정치적 올바름(PC)에 절여져 억지 캐스팅을 감행한 것 아니냐며 깊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극장에서 확인한 결과, 이는 PC주의와는 무관한 철저히 계산된 감독의 의도였습니다.

놀란 감독이 개봉 전 인터뷰에서 "개봉 전의 노이즈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개봉 후 나오는 평가"라고 언급했듯, 모든 논란을 영화의 테마를 완성하는 거대한 미끼로 활용한 셈입니다.

관객의 예상을 뒤엎은 파격적 캐스팅이 진짜 노린 목적

헬레네 역할에 루피타 뇽오를 기용하고, 아가멤논 역할에 중후한 장군 타입 대신 베니 사프디를 배치한 결정은 신화적 환상을 깨부수기 위함이었습니다. 트로이 전쟁의 명분이 '헬레네의 절세가인 외모' 때문이라는 신화 속 허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연출입니다.


영화 속 어두운 고대 궁전 배경에서 짙은 청록색 드레스를 입고 활을 든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다른 여성이 서 있는 모습

전형적인 미의 기준을 비틀어 전쟁의 명분을 허무하게 만드는 감독의 의도가 캐스팅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의 대사처럼, 아가멤논이 전쟁을 일으킨 본질적인 이유는 헬레네의 미모가 아니라 트로이가 독점하던 무역 항로를 빼앗기 위함이었습니다. 헬레네는 명분에 불과했을 뿐, 정치적·현실적 욕망이 전쟁의 본질이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정형화된 미인형 배우를 배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놀란의 미적 감각이 떨어진 것도 결코 아닙니다.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나 칼립소 역의 샤를리즈 테론은 캐릭터 본질에 맞게 지극히 아름답게 연출되었습니다. 헬레네라는 인물에 적용된 파격적인 기용은 신화가 씌운 껍데기를 벗겨내기 위한 정밀한 계산의 결과였습니다.

아날로그 연출과 '신화의 거품'을 제거하는 장치들

놀란은 연출 전반에 걸쳐 구름 위에 붕 떠 있던 신화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묵직한 현실로 가라앉힙니다. CG로 만든 압도적이고 거대한 장관 대신, 실제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한 거대한 트로이 목마와 이타카 성의 질감이 화면 너머로 엄청난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목마 안에서 병사들이 죽을동 살동 버티는 과정이나,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 사람을 돼지로 만드는 키르케의 주술 장면까지도 마법이 아닌 지독히 리얼한 공포와 현실적인 질감으로 그려집니다.

신혼 역을 맡은 엘리엇 페이지의 캐스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외형의 신혼은 마지막까지 신을 향한 순수한 약속을 믿고 지키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이 약속을 이용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만, 그 대가로 평생을 PTSD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신화의 영웅'에서 '약속을 깨뜨린 인간'으로의 전환

이 영화는 놀란의 전작인 <오펜하이머>와 완벽히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하나의 시대나 문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를 지탱하던 거대한 약속이나 신성한 규칙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파란색 야구 모자를 쓴 남성이 마이크 앞에서 손을 움직이며 이야기하고 있고, 하단에는 한국어 자막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시대가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깨져야만 했던 약속의 의미를 되짚어봅니다.


트로이 전쟁 당시 시대를 지탱하던 틀은 '신을 두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제우스의 법칙이자 신성한 약속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의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 이 문명의 규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막난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약속을 깨뜨림으로써 승리를 얻고 시대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 선택을 한 인간 자신은 엄청난 괴로움과 파멸적인 죄책감을 짊어져야만 합니다. 3천 년 전의 오디세우스나 현대의 오펜하이머나, 문명의 거대한 전환점에서 시대를 깨뜨린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의 궤적은 정확히 일치합니다.

시대를 지탱하는 약속이 깨질 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역시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해 온 수많은 약속과 규칙들이 깨져나가는 전환기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지금 이 시점에 <오디세이>를 선보인 것은 매우 심오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입니다.

시대의 약속이 무너지는 지금, 과연 누가 그 끔찍한 책임 의식을 짊어지는 오디세우스가 될 것인가? 그리고 약속이 깨진 뒤 찾아오는 변화를 과연 우리는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영화는 거대한 사운드와 경이로운 아날로그 비주얼 속에 이 묵직한 화두를 숨겨두었습니다.

동시대에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거장의 작품을 극장에서 직접 관람하고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축복입니다. 영화를 보신 다른 분들은 또 어떤 사유를 하셨는지 댓글로 자유롭게 의견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요한 식당이었고요. 그러면 바이.


FAQ

영화 <오디세이>에서 헬레네 캐스팅이 논란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화 속 최고 미녀인 헬레네 역할에 전형적인 미인형 배우가 아닌 배우를 기용하여 개봉 전 PC주의 논란이 일었으나, 이는 전쟁의 명분이 외모가 아닌 정치적·무역적 욕망이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연출적 장치였습니다.

놀란 감독이 CG 대신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 연출적 이유는 무엇인가요?

거대한 목마와 성벽을 실제 아날로그 질감으로 재현함으로써, 붕 떠 있는 그리스 신화의 환상을 거두고 지상에 발을 붙인 참혹하고 묵직한 현실감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오펜하이머와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무엇인가요?

문명을 지탱하던 시대의 신성한 약속이나 규칙을 깨뜨려야만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역사적 역설과, 그 약속을 깨뜨린 인물이 짊어져야 하는 참담한 괴로움과 책임을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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