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슈테펜 발리저 벤틀리모터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 |
벤틀리의 첫 순수 전기차 '토르칼(Torcal)'은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과 얼마나 다를까. 폭스바겐그룹의 동일한 전기차 플랫폼을 사용하고 배터리 공급사까지 공유한다면, 초럭셔리 브랜드인 벤틀리는 그 이상의 가치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프랑크-슈테펜 발리저 벤틀리모터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 같은 기술적 공통점에 대해 플랫폼을 독자 개발하지 않는 것이 벤틀리의 기존 개발 방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발리저 CEO는 최근 한국에서 진행된 토르칼 공개 행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플랫폼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지 않는다"며 "토르칼에 적용한 플랫폼은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이라고 말했다.
토르칼은 벤틀리가 107년 역사상 처음 선보이는 순수 전기차다. 기존 벤테이가보다 차체가 작은 도심형 럭셔리 SUV로, 컨티넨탈 GT와 플라잉스퍼, 벤테이가에 이은 브랜드의 네 번째 모델이다.
그러나 토르칼의 기술적 기반은 벤틀리만의 독자적인 구조가 아니다. 폭스바겐그룹의 프리미엄 전기차 플랫폼인 PPE(Premium Platform Electric)를 기반으로 개발됐으며, 구체적으로는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과 같은 PPE41C 아키텍처를 사용한다.
![]() |
PPE41C는 아우디 Q6 e-트론과 포르쉐 마칸 일렉트릭에 적용된 PPE 계열을 대형 전기 SUV에 맞춰 발전시킨 플랫폼이다. 벤틀리는 이 플랫폼을 활용하면서 브랜드에 적합한 주행 특성과 승차감, 차체 구성 등을 구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배터리 공급사 역시 동일하다. 토르칼과 카이엔 일렉트릭에는 모두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가 적용된다. 두 차량은 113kWh급 배터리와 800V 전기 시스템을 채택했으며, 최대 400kW 수준의 초급속 충전 성능도 갖췄다.
다만 배터리 공급사가 같다고 해서 셀의 세부 사양부터 모듈과 팩의 설계까지 모두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포르쉐는 카이엔 일렉트릭의 배터리 모듈을 슬로바키아 호르나 스트레다의 자체 시설에서 생산한다. 벤틀리의 배터리 모듈 및 팩 공급 구조까지 동일한지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두 차량이 핵심 기술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벤틀리의 기술 경쟁력을 평가할 때 중요한 지점이다. 벤틀리가 강조하는 정숙성과 승차감, 섀시 제어, 실내 고급감이 포르쉐와 구분되는 실질적 차이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카이엔 일렉트릭 역시 800V 시스템과 고성능 전기 파워트레인, 첨단 섀시 기술을 갖춘 차량이다. 토르칼이 강력한 출력이나 충전 성능만으로 포르쉐와의 차별성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벤틀리는 이를 고급 소재와 정교한 실내 마감, 브랜드 고유의 주행 감각으로 극복하겠다는 전략이다. 토르칼 S는 최고출력 888마력(PS), 최대토크 1350Nm를 발휘하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2.9초 만에 가속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성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브랜드 고유 가치로 이어지는지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다. 동일한 플랫폼과 배터리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차량에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할 이유를 벤틀리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하느냐가 관건이다.
발리저 CEO는 토르칼이 기존 벤테이가를 대체하는 모델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벤테이가는 차체가 높고 웅장한 SUV"라며 "토르칼은 이와 차별화되는 보다 컴팩트한 SUV를 도입하기 위해 개발한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벤틀리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전기차로 일시에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택지를 추가하는 방식이라는 의미다.
토르칼보다 큰 전기 SUV를 추가로 출시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발리저 CEO는 "현재로서는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그는 "당분간은 토르칼을 중심으로 전기차 라인업을 운영하고, 내연기관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도 계속 제공할 것"이라며 향후 벤테이가의 후속 모델 역시 등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방침은 벤틀리가 전동화 전환의 속도를 시장 수요에 맞춰 조절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 |
발리저 CEO는 전 세계 럭셔리 전기차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최근 진정한 럭셔리 브랜드들이 전기차 시장에 진입하고 있으며 고객들의 수용성도 높아지고 있다"며 "토르칼이 고객들에게 인도되는 2027년은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하다"고 말했다.
이어 "전기차 기술이 발전했고 주행거리도 충분해졌으며, 여러 국가에서 충전 인프라도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전기차가 단기간에 모든 내연기관차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선을 그었다.
발리저 CEO는 "모든 차량이 순수 전기차로 대체되기까지는 앞으로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며 "미래에도 내연기관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가 존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틀리의 전동화 전략이 순수 전기차로의 일방적인 전환보다 파워트레인 선택권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토르칼의 출시 목적 역시 기존 고객의 전기차 전환에만 있지 않다. 발리저 CEO는 보다 젊은 신규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토르칼의 가격 책정과 관련해 "가격은 매우 중요했다"며 "토르칼은 벤테이가보다 작은 컴팩트 차량이고 엔트리 모델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가격도 벤테이가보다 낮게 책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신규 고객을 확보하고, 더 많은 고객이 토르칼을 통해 벤틀리 브랜드를 처음 경험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
벤틀리가 첫 전기차를 통해 판매량 확대와 고객층 다변화를 동시에 모색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발리저 CEO는 판매 대수 자체가 브랜드의 최우선 목표는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럭셔리 시장이 일시적인 호황을 누렸지만, 중국 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럭셔리 산업 전반이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토르칼 출시를 통해 다시 성장을 기대하지만 우리가 판매하는 차량의 대수 자체는 목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발리저 CEO는 "우리는 항상 판매량보다 가치를 우선시한다(Value over Volume)"며 "중요한 것은 판매 대수가 아니라 회사 전체의 수익성"이라고 밝혔다.
이는 벤틀리가 판매량 확대를 위해 브랜드의 희소성이나 수익성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방침으로 풀이된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의 전기차를 통해 신규 고객을 유치하면서도 초럭셔리 브랜드의 수익 구조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가 동시에 주어진 셈이다.
한국 시장에 대해서는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변화를 가늠할 핵심 시장으로 평가했다.
발리저 CEO는 "한국은 시장 규모 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트렌드를 만들어가는 시장"이라며 "한국에서 새로운 자동차나 기술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세계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신호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고객층이 상대적으로 젊고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환율 여건이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언급도 덧붙였다.
벤틀리가 토르칼을 통해 젊은 고객층을 확보하려는 만큼, 새로운 기술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한국은 전기차 전략의 성패를 살펴볼 중요한 시장이라는 평가다.
생산시설에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벤틀리는 토르칼 생산을 위해 영국 크루(Crewe) 공장에 약 3억5000만 파운드를 투자했다.
발리저 CEO는 "다른 벤틀리 차량과 마찬가지로 토르칼 역시 크루에서 생산한다"며 "새로운 건물과 도장 공장, 내장재 작업시설, 시트 조립라인 등을 새롭게 구축했다"고 밝혔다.
플랫폼과 배터리 등 핵심 전동화 기술은 그룹 차원에서 공유하면서도, 차량의 최종 생산과 고급화 작업은 벤틀리의 전통적인 생산 거점에서 담당하는 구조다.
![]() |
발리저 CEO가 제시한 토르칼의 전략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그룹 차원의 기술을 활용해 전동화 시대에 대응하면서도, 벤틀리만의 브랜드 가치를 유지해 수익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 공유를 통해 개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인 동시에 벤틀리의 독자적인 경쟁력을 더욱 엄격하게 검증받게 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과 플랫폼, 배터리 공급사, 핵심 충전 기술까지 공유하는 상황에서 벤틀리가 판매하는 것은 결국 기술 사양 이상의 가치여야 한다.
첫 순수 전기차 토르칼이 벤틀리의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이러한 차별화 전략이 실제 차량의 완성도와 고객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