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U는 항생제 잔류 검출이 아니라 '항생제를 쓰지 않았음을 시스템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브라질산 육류 수입을 전면 차단했습니다.
- 표면적으로는 슈퍼버그 확산을 막기 위한 보건 규제이지만, 그 이면에는 값싼 남미와 우크라이나산 닭고기로부터 자국 농가를 보호하려는 통상 갈등이 깔려 있습니다.
- 공장식 밀집 사육과 가격 경쟁력, 동물 복지와 물가 안정 사이의 딜레마는 유럽을 넘어 한국 축산 시장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유럽연합(EU)이 최근 세계 최대 닭고기 수출국인 브라질산 육류 수입을 전면 중단했습니다. 전염병이나 유해 세균이 검출된 것도 아니고, 실제 고기에서 항생제 잔류 물질이 나온 것도 아닌데 수입길을 막아섰습니다. EU가 내건 이유는 "브라질 정부가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시스템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항생제 오남용과 슈퍼버그(항생제 내성균) 확산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글로벌 단백질 공급망의 급변과 자국 축산 농가를 지키려는 치열한 무역 갈등이 얽혀 있습니다.

유럽연합이 시스템적인 항생제 관리 미비를 이유로 브라질산 육류 수입을 전격 중단하면서 양측의 통상 갈등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1. 입증 책임을 넘긴 새로운 비관세 장벽
통상 특정 국가의 축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할 때는 조류독감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유해 물질이 검출되는 명백한 오염 사고가 발생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이번 EU의 조치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EU로 수출되는 브라질산 고기 자체에서는 결격 사유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EU는 브라질에 검사관을 파견해 사육 과정 전체를 감시하겠다고 선언하며 수입을 차단했습니다. 수입국이 수출국의 국가 단위 축산 관리 시스템 전체를 통제하겠다는 뜻입니다. 제품의 오염 여부가 아니라 생산 체계의 무결성을 입증하라는 고도의 비관세 장벽을 가동한 셈입니다.
2. 메르코수르 협정과 자국 농가의 반발
왜 하필 브라질이 첫 번째 타깃이 되었을까요? 브라질은 전 세계 닭고기 생산량 3위이자, 수출량에서는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축산 대국입니다. 미국이나 중국은 생산량이 많아도 자국 내 소비 비중이 높은 반면, 브라질은 막강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장악해 왔습니다.

세계 닭고기 생산량은 미국과 중국이 앞서지만, 수출량 면에서는 브라질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배경은 자유무역협정(FTA)에 있습니다. EU는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과 오랜 줄다리기 끝에 FTA를 체결하고 잠정 발효했습니다. 유럽의 공산품을 무관세로 남미에 파는 대신 남미산 농축산물을 들여오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값싼 브라질산 축산물이 대거 쏟아져 들어올 위기에 처하자, 유럽 가금육 협회를 비롯한 현지 축산업계가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EU는 협정 발효 불과 몇 달 만에 '항생제 관리 미흡'이라는 보건 규제를 무기로 수입 차단막을 친 셈입니다.
3. 항생제와 슈퍼버그: 과학적 경고와 공장식 축산의 딜레마
물론 유럽의 우려가 순전히 핑계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축산업 현장의 항생제 오남용은 심각한 보건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좁은 축사에 수만 마리를 밀집 사육하는 공장식 구조에서는 개별 치료가 불가능해 물과 사료에 항생제를 섞어 예방 차원에서 일괄 투여합니다.

국가별 축산물 항생제 사용 현황을 보면 아시아 지역의 높은 수치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향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항생제가 동물의 잔병치레를 막아 에너지를 오로지 살찌우는 데 쓰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사육 주기를 획기적으로 줄여 고기 가격을 낮추는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 세계 동물 체중 1kg당 항생제 투입량은 안전 기준선(50mg)의 두 배에 달하는 평균 97mg 수준에 이릅니다.
특히 인간 치료의 최후 보루로 지정된 '콜리스틴' 같은 최고 등급 항생제마저 일부 국가 농장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 슈퍼버그가 토양과 지하수, 유통망을 타고 사람에게 전파될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항생제 오남용으로 생성된 내성균이 축산물을 거쳐 우리 식탁과 생활 환경으로 어떻게 전파되는지 보여줍니다.
4. 우크라이나발 치킨 충격과 유럽의 자기모순
유럽의 치킨 전쟁은 남미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EU가 우크라이나 농산물에 관세와 쿼터를 면제해 주자, 우크라이나 최대 가금류 기업 MHP의 닭고기가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으로 들어오는 우크라이나산 닭고기 수입액이 급격히 늘어난 흐름을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값싼 우크라이나산 닭고기가 시장을 잠식하자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은 EU 공동 규정까지 어겨가며 우크라이나산 수입을 독자 차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전쟁국 지원'과 '친환경·엄격한 동물 복지'라는 유럽 특유의 명분이, '자국 농민 보호'와 '저렴한 식료품을 원하는 소비자 물가'라는 현실적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5. 한국 식탁과 축산 시장에 던지는 시사점
한국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은 냉장육과 뼈 있는 닭을 선호하는 독특한 식문화를 지녀 국내산 자급률이 약 80%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입산은 주로 뼈를 발라낸 냉동 순살(닭다리살) 형태로 유통되어 프랜차이즈나 단체 급식 등에 쓰입니다.
하지만 매년 겨울 조류인플루엔자(AI)로 대규모 살처분이 반복되며 치킨값이 급등하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밀집 사육을 줄이고 동물 복지와 항생제 관리를 강화하면 생산비가 뛰어 밥상 물가가 불안해지고, 반대로 값싼 수입산을 무제한 수용하면 국내 축산 기반이 흔들립니다.
유럽이 겪고 있는 명분과 실리의 딜레마는 먼 나라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속 가능한 먹거리 안전망 구축과 소비자 물가 안정 사이의 균형점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한국 역시 구체적인 사회적 합의를 준비해야 할 시점입니다.
FAQ
항생제를 맞은 닭고기를 먹으면 사람에게 곧바로 위험한가요?
도축 전 일정 기간 약물 투여를 중단하는 '휴약 기간'을 철저히 지키면 체내 잔류 성분이 분해되어 고기 자체는 안전합니다. 진짜 위험은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으로 살아남은 '내성균(슈퍼버그)'이 농장 환경이나 유통 경로를 거쳐 사람에게 전파되는 데 있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무항생제' 고기는 항생제를 전혀 쓰지 않은 것인가요?
사육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치료 목적으로 제한해 투여한 뒤 규정된 휴약 기간을 엄격히 준수하고 안전성 검증 기준을 통과했다는 인증입니다.
한국은 왜 외국산 닭고기 수입 비중이 생각보다 낮나요?
한국 소비자들이 냉장육과 뼈가 붙은 생닭(삼계탕, 뼈 치킨 등)을 압도적으로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수입산은 운송 효율을 위해 뼈를 제거한 냉동 순살 위주로 들어오므로 주로 단체 급식이나 특정 순살 가공 메뉴로 소비처가 한정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