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8년 외교 조약 한 줄의 틈새에서 탄생한 구룡성채는 95년간 영국과 중국 어디도 손대지 못한 거대한 행정 공백 지대로 남았습니다.
- 세금과 건축 허가, 면허 규제가 전무한 환경 속에서 무면허 의료 시설과 가내 식품 공장, 초저가 임대 주택을 축으로 유례없는 초고밀도 자생 경제가 형성되었습니다.
- 1984년 중영공동선언 이후 약 4,700억 원의 보상금을 투입해 철거된 구룡성채의 역사는 현재 서울 강남 구룡마을의 재개발 궤적과도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홍콩 한복판에 경찰도, 건축 허가도, 세금도, 의사 면허도 필요 없는 기형적인 동네가 있었습니다. 축구장 4개 면적에도 미치지 못하는 2.6헥타르 부지에 14층짜리 무허가 콘크리트 건물 350개 동이 빽빽하게 벽을 맞대고 들어섰고, 그 안에서 무려 3만 3,000명이 살아갔습니다.
이를 1제곱킬로미터당 인구 밀도로 환산하면 약 125만 명에 이릅니다. 당시 서울의 인구 밀도가 제곱킬로미터당 약 1만 5,700명 안팎이었으니, 서울 전체를 무려 80배 가까이 압축해 놓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밀도였습니다. 무법천지처럼 보였던 이 공간이 유일하게 지킨 규칙은 옆 카이탁 공항을 오가는 비행기 날개에 닿지 않도록 건물 높이를 14층 이하로 묶어둔 것뿐이었습니다.

조약에 적힌 문장 한 줄이 95년간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기묘한 역사를 열었습니다.
왜 95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는 땅이 되었나
이 거대한 슬럼의 출발점은 건물이 아니라 1898년 체결된 조약 문서 속 한 줄이었습니다. 1898년 영국이 청나라로부터 홍콩 주변 영토를 99년간 빌리는 '신계 조차 조약'을 맺을 당시, 구룡성 내부에서는 청나라 관리가 관할권을 계속 행사한다는 예외 조항이 들어갔습니다.
이듬해 영국은 군대를 보내 청나라 관리를 내쫓고 구룡성을 일방적으로 자국 식민지로 선포했습니다. 청나라와 이후 들어선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조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섣불리 행정력을 투입했다가 외교 갈등으로 번질까 손을 놓았고, 중국은 영국령 한복판에 자리한 지리적 한계 탓에 관리를 파견하지 못했습니다. 양쪽 모두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면서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치외법권적 공백이 95년간 이어진 배경입니다.
1943년 일본군이 공항 활주로를 확장하면서 구룡성 성벽을 허물었고, 1945년 종전 직후 중국 본토의 내전 피난민들이 성벽이 사라진 요새 터로 밀려들었습니다. 1948년 홍콩 정부가 강제 퇴거에 나섰으나 유혈 폭동과 외교 마찰만 남겼고, 홍콩 정부가 '공식 불간섭' 방침을 굳히면서 이 공백지는 40년간 통제 불능의 자생 도시로 팽창했습니다.

건축법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이 구역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런 제약 없이 건물을 증축해 올렸습니다.
면허와 세금이 빠진 자리에 형성된 지하 경제
1970년대 중반 경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으로 삼합회의 마약 조직이 위축되자, 구룡성채는 단순 범죄 소굴을 벗어나 독특한 자생적 경제 생태계로 변모했습니다. 정부 개입이 없다는 조건은 면허 비용, 위생 검사 비용, 세금, 건축 인허가 비용이 완전히 0원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세 가지 핵심 비즈니스가 가파르게 성장했습니다.
- 무면허 치과 및 의료 서비스: 본토에서 건너와 영문 면허 시험을 치르기 어려웠던 베테랑 의사들이 성채 길목에 터를 잡고, 저렴한 진료비를 앞세워 홍콩 일반 시민들을 대거 불러들였습니다.
- 식품 및 잡화 제조 공장: 위생 검사와 환경 규제가 없다 보니 원가를 극단적으로 낮출 수 있었습니다. 홍콩 전역에서 소비되던 어묵과 완탕면 국수의 상당량이 이 비좁은 골목 가내 공장에서 생산되어 도심으로 유통되었습니다.
- 초저가 임대 주택: 안전 검사 없이 인접 건물에 벽을 덧대어 올리는 방식으로 건축 원가를 대폭 줄였고, 이는 공장 노동자와 신규 이민자, 빈곤층 노인들에게 홍콩에서 가장 저렴한 주거지를 제공했습니다.
제도권의 규제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생산자와 소비자가 이 무세금 지대로 모여들면서, 국가 권력 없이도 돌아가는 기형적인 시장 구조가 완성되었습니다.

행정 절차와 세금이 면제되면서 구룡성채 안의 물가는 도심 바깥보다 현저히 낮게 유지되었습니다.
자생적 질서의 작동 방식과 4,700억 원의 종말
구룡성채 주민들은 국가 행정의 지원 없이 자체적인 규율을 세워 일상을 지탱했습니다. 건물 지하에 77개 우물을 파 펌프로 옥상 물탱크까지 끌어올린 뒤 층별 시간표에 맞춰 배분했고, 전기가 귀하던 시절 전력선을 임의로 연결해 쓰다가 1977년에는 정식 전력 공급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 대신 14층 옥상이 주민들의 거대한 생활 마당이 되어 학교와 유치원이 자리를 잡았으며, 복잡한 지도를 전부 외운 우체부 한 명이 1,700가구와 8,500개 사업장의 우편물을 도맡아 날랐습니다. 무법 지대 속에서도 최소한의 상호 생존 질서가 작동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 거대 도시의 종말 역시 외교 문서 한 장으로 매듭지어졌습니다. 1984년 영국과 중국이 1997년 홍콩 반환에 합의하는 중영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영유권 대립의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양국은 구룡성채 철거에 전격 합의했고, 홍콩 정부는 1987년 철거 계획을 확정한 뒤 주민 보상금으로 27억 홍콩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4,700억 원)를 투입했습니다. 1993년 시작된 철거 작업으로 13개월 만에 350개 동의 건물이 모두 헐렸으며, 현재 그 부지는 평온한 중국식 정원인 '구룡채성공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서울 강남 구룡마을과 우리가 마주한 교훈
구룡성채의 궤적은 다른 나라의 옛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서울 강남 개포동 대모산 자락에 자리한 구룡마을 역시 놀라울 만큼 비슷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국공유지와 사유지가 얽힌 무허가 지대에 모여 형성된 구룡마을은, 소유권과 관리 주체의 불분명함 탓에 수십 년간 행정 사각지대에 방치되었습니다. 책임질 주체가 마땅치 않다는 점, 갈 곳 없는 도시 빈민이 모여 자생 촌락을 꾸렸다는 점, 대규모 보상과 공공 주도 재개발로 마침표를 찍는다는 점에서 구룡성채의 구조와 그대로 겹칩니다.
서울 구룡마을은 토지 보상과 주민 이주 절차를 밟아 최고 29층, 약 3,700여 가구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는 재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구룡성채와 구룡마을의 사례가 증명하듯, 행정 권한과 규제의 공백은 필연적으로 기형적인 자생 생태계를 낳고, 사회는 방치된 시간을 정상화하기 위해 막대한 정산 비용을 치르게 됩니다. 소유와 책임이 흐려진 도시의 틈새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현대 도시 정책이 마주한 가장 무거운 과제입니다.
FAQ
구룡성채 안에서는 범죄와 삼합회의 지배만 있었나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삼합회가 아편굴과 도박장을 운영하며 세력을 떨쳤으나, 1973~1974년 홍콩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 이후 조직의 영향력은 크게 꺾였습니다. 이후 1980년대에는 3만 명이 넘는 일반 노동자, 자영업자, 이민자들이 자체적인 규칙을 세워 생활하던 서민 주거지이자 가내 공장 지대의 성격이 훨씬 짙었습니다.
건물 높이가 왜 14층을 넘지 못했나요?
건축법 규제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성채에서 불과 800m 거리에 카이탁 국제공항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착륙하는 비행기가 건물 옥상 바로 위를 스치듯 지나갔으므로 항공기 충돌 사고를 피하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 건물 높이를 14층 이하로 제한했습니다.
철거된 구룡성채 부지는 현재 어떤 상태인가요?
1994년 철거를 마친 뒤, 1995년 12월 '구룡채성공원(Kowloon Walled City Park)'이라는 전통 중국식 정원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현재는 과거 성벽 남문 터와 청나라 시절 관청 건물 일부, 안내 표지판 정도만 역사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