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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창작 뮤지컬은 1941년 김해송의 '견우직녀'와 1960년대 '예그린' 악단으로 이어지는 깊고 독창적인 역사적 저력을 품고 있습니다.
  • 현재 한국 시장은 세계적인 배우와 기술 스텝을 배출하며 급성장했으나, 여전히 독자적인 대본과 음악을 만드는 '크리에이터'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 스타 배우의 티켓 파워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에서 벗어나, 작가와 작곡가라는 핵심 창작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만이 한국 뮤지컬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담보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주의 인물 강헌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뜨거운 뮤지컬 시장으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축제의 장을 들여다보면 이상하리치만큼 서글픈 모순이 존재합니다.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대극장 무대는 대부분 해외 라이선스 작품들이 장악하고 있고, 정작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창작 뮤지컬'은 설 자리를 잃고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낼 저력이 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단단하며, 이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기형적인 시장을 바로잡을 유일한 열쇠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즉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는 명리학뿐만 아니라 예술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왜 한국 창작 뮤지컬의 '뿌리'와 '창작자'를 알아야 하는가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은 겉보기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아이돌 스타가 출연하는 날이면 티켓 오픈 2초 만에 전석이 매진되고, 회당 수천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남의 나라 콘텐츠를 비싼 로열티를 주고 사 와서 연기하는 '음악 열등국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의 역사적 뿌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잃어버린 예술은 자생력을 가질 수 없으며,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는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 창작 뮤지컬의 역사적 저력과 그 안에서 활약했던 크리에이터들의 발자취를 추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우리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힘은 결국 과거의 위대한 시도들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본질적 정의: '신파'에서 '가극'으로의 진화

우리는 흔히 '신파(新派)'라고 하면 찌질하고 통속적인 남녀의 사랑과 배신 이야기를 떠올리며 비하하곤 합니다. 하지만 신파의 본래 뜻은 '뉴 웨이브(New Wave)', 즉 그 시대의 가장 트렌디한 신상품 무대 예술을 의미했습니다. 1910~20년대 일본에서 흘러들어온 신파극은 우리가 이전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음악극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신파극인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막이 끝나면 가수가 나와 주인공의 심경을 대변하는 주제가를 부르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이자 초기 뮤지컬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1930년대 레코드 회사들이 소속 가수를 동원해 극을 만드는 '악극'의 시대가 열렸고, 마침내 1941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창작 뮤지컬인 김해송 작곡의 견우직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신파를 넘어 한국 고유의 가락과 춤, 그리고 서구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 결합한 거대한 블록버스터 가극의 등장이었습니다.


강연자가 마이크를 들고 벽돌 벽 앞의 스크린 옆에 서 있는 모습

한국 창작 뮤지컬의 뿌리인 과거 가극의 규모와 예술적 가치를 되짚어봅니다.


흔히 하는 오해: "우리 뮤지컬은 역사가 짧고, 스타만 있으면 성공한다?"

대중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 뮤지컬이 2000년대 들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장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스타 마케팅과 화려한 무대 기술만 있으면 훌륭한 뮤지컬이 완성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적 사실은 졸라 다릅니다. 이미 1940년대에 활동했던 '반도가극단'은 단원이 무려 180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A, B, C 세 팀으로 나뉘어 남한 전역은 물론 만주와 일본까지 동시에 순회공연을 다녔던 초거대 엔터테인먼트 군단이었습니다. 황해, 허장강, 김희갑, 그리고 한국 최초의 개그맨이자 윤복희의 부친인 윤부길 선생까지, 훗날 대한민국을 뒤흔든 슈퍼스타들이 모두 이 가극단 출신입니다. 즉, 한국 뮤지컬의 힘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한 세기 전에 장르적 기틀과 대중적 폭발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검증된 저력입니다.

역사적 증거: 김해송의 '견우직녀'부터 김종필의 '예그린' 악단까지

한국 창작 뮤지컬의 위대한 발자취는 해방과 분단이라는 비극 속에서 잠시 단절되었습니다. 월북 작곡가라는 굴레에 갇혀 잊혔던 김해송의 악보를 실제로 확인했을 때, 저는 정말 기절할 뻔했습니다. 기존 곡을 적당히 짜깁기하는 얄팍한 짓거리 없이, 극 전체를 무식할 정도로 위대한 신곡들로 가득 채워 넣은 블록버스터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단절된 맥을 다시 이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1960년대 초 군사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이 주도해 만든 국가대표 가극단 '예그린'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문화적으로 앞서 나가던 북한의 '피바다 가극단' 같은 대혁명 가극에 졸라 극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안경을 쓴 남성이 마이크를 들고 벽돌 벽을 배경으로 강연하고 있는 모습

과거 한국이 겪었던 문화적 열등감과 그 속에서 탄생한 예술적 시도들을 되짚어 봅니다.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만든 작품이 바로 1966년의 살짝기 옵서예입니다. 최창권 작곡, 김영수 대본, 박용구 작사, 그리고 당대 최고의 디바 패티 김이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단언컨대 지금까지도 이를 뛰어넘는 창작 뮤지컬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예술적 완성도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였던 탓에 정권의 부침에 따라 극단이 해산과 재건을 반복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 티켓 파워에 기댄 기형적 시장을 넘어 '진짜 크리에이터'를 키워야 하는 이유

90년대 이후 강남 부르주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일부 대형 창작극이나 2001년 오페라의 유령 수입 이후 한국 뮤지컬 시장은 자본주의적 재생산 구조를 갖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뛰어난 퍼포머와 세계적 수준의 무대 기술 스텝들도 졸라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강연자가 마이크를 들고 스크린 앞에 서서 발표하는 모습

라이선스 뮤지컬을 통해 성장한 한국 시장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 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결여된 단 하나의 퍼즐이 있습니다. 바로 '크리에이터(대본작가와 작곡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뮤지컬은 단순히 좋은 대중가요 몇 곡 섞는다고 만들어지는 만만한 장르가 아닙니다. 극의 드라마를 쥐고 흔들며 음악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고도의 전문 창작자가 필요합니다. 스타 배우에게 회당 수천만 원을 퍼주면서 2초 만에 매진되는 티켓 파워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화려한 무대의 불빛 뒤에 가려진 창작의 빈곤을 직시해야 합니다. 오페라의 영광을 찬탈하고 대중 예술의 왕좌를 차지한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본질은 결국 '이야기와 음악의 완벽한 결합'에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 속 김해송과 최창권이 보여주었던 창작자 중심의 뚝심을 복원하지 못한다면, 한국 뮤지컬은 영원히 남의 나라 껍데기만 빌려 쓰는 삼류 모방꾼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뿌리를 기억하고 진짜 크리에이터를 길러내는 것, 그것만이 한국 뮤지컬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생존 타이밍입니다.


FAQ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은 무엇인가요?

1941년 라미라 가극단을 통해 발표된 김해송 작곡의 '견우직녀'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창작 뮤지컬입니다. 이후 속편 격인 '은하수'가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며 초기 창작 뮤지컬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1960년대 '예그린' 악단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당시 박정희 정부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문화 예술 부문에서 앞서가던 북한(피바다 가극단 등)에 강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남한을 대표할 국가대표 가극단으로 만든 것이 '예그린' 악단이며, 이때 탄생한 역사적 명작이 바로 '살짝기 옵서예'(1966)입니다.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의 가장 큰 한계는 무엇인가요?

세계적인 수준의 배우(퍼포머)와 무대 기술 스텝은 풍부하지만, 극의 뼈대와 음악을 유기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전문 '크리에이터(대본작가 및 작곡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스타 배우의 티켓 파워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제작 환경이 창작자 육성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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