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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한국 음악의 전성기는 주류의 조용필뿐만 아니라, 방송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강력한 비주류(언더그라운드) 생태계가 함께 존재했기에 가능했습니다.
  • 예술적 자존심인 '가오'를 앞세워 앨범과 콘서트로 승부한 동아기획의 '뮤지션십'과, 입시 억압에 저항하며 완벽주의를 지향한 '메탈 키드'가 그 핵심 축이었습니다.
  • 비록 메탈 밴드는 군입대와 제작사 편의주의라는 구조적 한계로 해체되었으나, 이들이 구축한 거대한 인적 저수지는 90년대 서태지와 신해철이라는 시대의 아이콘을 탄생시켰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주의 인물 명리학자 강헌입니다.

우리는 흔히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영광을 이야기할 때 조용필이라는 거대한 태양만을 기억하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조용필이라는 주류의 거인이 가장 강력한 광휘를 뿜어내고 있을 때, 놀랍게도 그늘진 음지에서는 해방 이후 사실상 사라졌던 '비주류 문화(언더그라운드)'가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주류와 비주류가 나란히 달리는 행복한 이인삼각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비주류의 탄생과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옛날 음악을 추억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과 권력의 시스템 안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주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영토를 어떻게 개척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를 지탱했던 두 개의 거대한 축인 '뮤지션십(동아기획)''메탈 키드'라는 개념을 통해 그 역동적인 생태계를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 80년대 언더그라운드라는 신인류의 등장

1980년대 중반,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독특한 표정의 집단이 나타납니다. 당시 언론은 이들을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념의 핵심은 단순히 '유명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성 주류 시스템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와 예술가적 자존심, 즉 '가오'를 지키겠다는 태도(Attitude)의 선언이었습니다.


강연자가 스크린 앞에 서서 청중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스크린에는 'Korean Underground Wave Musicianship'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던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태동과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이들은 대기업 음반사의 메이저 시스템이나 지상파 방송국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구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음악'만으로 대중과 만나겠다는 고집이었습니다. 이들이 대중과 소통하는 통로는 딱 두 가지, 바로 '앨범''콘서트'뿐이었습니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는 딴따라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진짜 '예술가'로서 존재하겠다는 신념이 이 개념의 본질입니다.

2. 동아기획의 '뮤지션십'과 길거리의 '메탈 키드'

이 한국형 언더그라운드는 크게 두 가지 아주 대조적인 흐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조동진을 마형으로 하고 들국화, 김현식, 시인과 촌장 등이 합류한 '뮤지션십 진영(동아기획 군단)'입니다. 이들은 장르를 넘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적 세계관을 소중히 여겼던 이른바 중림(竹林)의 선비들이었습니다. 방송 홍보를 포기하는 대신 앨범 자체의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흰 벽돌 배경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강연하는 중년 남성

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태동과 그 이면에 숨겨진 제작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는 대도시의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진짜 생양아치들, 바로 '메탈 키드(Metal Kids)' 진영입니다. 8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가 급격한 중산층 성장과 함께 살인적인 입시 경쟁이라는 억압을 마주했을 때, 서울, 인천, 부산 등 대도시의 날날이 청소년들은 LA 메탈의 강력한 마초적 에너지에 열광했습니다. 이들은 펑크(Punk)의 아마추어리즘과 달리, 밤새도록 피를 흘리며 기타를 연습하는 '완벽주의적 강인함'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3. 언더그라운드는 '헝그리 정신'으로만 성공했다는 오해

우리가 흔히 하는 졸라 한심한 오해가 있습니다. 예술가는 배가 고파야 좋은 작품이 나오고, 비주류는 돈을 멀리해야 진짜 언더그라운드라는 생각입니다. 참 재미있죠?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80년대 동아기획의 위대한 성공 뒤에는 김영이라는 탁월한 프로듀서의 비즈니스 감각과 물적 토대가 있었습니다.

기타 학원을 하며 가마니로 돈을 쓸어 담았던 김영은 가난한 무명 뮤지션들의 '가오'를 살려주기 위해 철저히 창작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어차피 방송국에 굽실거리지 않을 테니 앨범의 퀄리티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대중 역시 조용필을 통해 귀가 졸라 높아진 상태였습니다. 한국말로 된 깊이 있는 음악적 콘텐츠를 갈망하던 대학생 중심의 젊은 소비층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들국화의 데뷔 앨범은 방송 한 번 타지 않고도 단 6개월 만에 100만 장을 돌파하는 기적을 쓸 수 있었습니다. 즉, 비주류의 성공은 무모한 반항이 아니라 철저한 콘텐츠의 신뢰도와 새로운 시장의 결합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4. 메탈 밴드의 몰락과 '인적 저수지'로서의 가치

그렇다면 그 뜨거웠던 메탈 키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신중현이 이태원에 연 메탈 공연장 '월드'를 중심으로 시나위, 부활, 백두산, 블랙홀 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들의 생명력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한국이라는 시장이 가진 아주 기구하고 최악인 구조적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마이크를 들고 강연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음악적 완성도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동아기획 군단과 그들이 구축한 독자적인 프로덕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군입대였습니다. 밴드로서 팀플레이의 호흡을 좀 맞출 만하면 군대에 가야 하니 지속성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둘째는 음반사들의 영악한 편의주의였습니다. 제작자 입장에서 4~5명이나 되는 메탈 밴드는 관리하기 졸라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누구 하나가 사고를 치거나 약을 하지는 않을지 매일 밤잠을 설쳐야 했죠. 반면 솔로 가수는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면 되고 24시간 밀착 관리가 가능했습니다.

결국 음반사들은 밴드에서 가장 잘생기고 노래 잘하는 '보컬리스트'만 쏙 빼내어 솔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로 인해 밴드 생태계는 붕괴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메탈 씬은 90년대 한국 대중음악 주류를 지탱하는 위대한 '보컬리스트와 창작자의 저수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대철의 시나위와 김태원의 부활이 배출한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5. 내 삶의 타이밍에서 '비주류의 무기'를 만드는 법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명리학의 핵심 원리이자 제가 늘 강조하는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아는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주류가 아닐지라도, 혹은 기성 시스템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지라도 좌절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류의 틈새에서 나만의 '뮤지션십'을 구축하십시오. 타협하지 않는 나만의 독창적인 무기(콘텐츠)를 갈고닦으며 타이밍을 기다려야 합니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방송국의 횡포에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가 마침내 대중의 자발적인 선택을 이끌어냈듯이, 진짜 실력과 벼려진 애티튜드가 있다면 세상은 결국 당신의 가치를 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메탈 키드들처럼 비록 내가 속한 조직이나 프로젝트가 구조적 한계로 흩어지더라도, 그 치열했던 단련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경험은 결국 90년대의 서태지와 신해철처럼,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에너지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주류의 눈치를 보느라 진짜 소중한 자존심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주의 인물 강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FAQ

동아기획의 김영 대표는 어떻게 방송 홍보 없이 음반을 흥행시킬 수 있었나요?

김영 대표는 기존의 방송 중심 홍보 방식 대신, 뮤지션들에게 완벽한 창작의 자유를 주어 '앨범 자체의 완성도'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당시 조용필을 통해 귀가 높아진 젊은 관객들은 방송에 나오지 않더라도 음악성이 뛰어난 동아기획의 음반들을 입소문과 콘서트를 통해 자발적으로 소비했고, 이는 레이블 자체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습니다.

80년대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해체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원인은 '군입대'로 인한 팀플레이의 단절과, 밴드 관리를 기피하고 솔로 보컬리스트만 영입하려 했던 '음반 제작사들의 편의주의적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멤버들이 이탈하면서 밴드 생태계는 유지되기 힘들었습니다.

메탈 밴드의 몰락이 90년대 대중음악 부흥에 기여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메탈 밴드 자체는 해체되었지만, 그 척박한 환경에서 혹독하게 트레이닝된 인재들이 90년대 가요계의 주역으로 우뚝 섰기 때문입니다. 시나위 베이시스트 출신인 서태지, 신나위 출신의 임재범과 김종서, 부활 출신의 이승철, 아기천사 출신의 신해철 등이 모두 80년대 메탈 씬이라는 거대한 저수지에서 길러진 인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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