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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호프’는 나홍진 감독에게 우리가 흔히 갖는 무겁고 끈적한 스릴러라는 고정관념을 비틀어, 700억 원짜리 거대하고 짓궂은 블랙 코미디로 직조해 낸 영리한 기만극입니다.
  • 작품 전반을 지탱하는 인물 간의 끈질긴 오해와 지독한 생존력은 웅장한 크리처물의 서두를 시골 촌동네 엑스트라들의 아수라장 난투극으로 골탕 먹이는 영리한 코미디적 문법입니다.
  • 인과관계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서사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당혹스러운 어긋남을 주지만, 창작자의 삐딱한 연출 의도와 선명한 예술적 집요함에 눈길을 맞춘 관객에게는 더없이 기발한 놀이터가 됩니다.

안녕하세요.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요한 식당입니다. 하이.

솔직히 좀 터무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한편으로, 이 영화를 한마디로 평가해 보자면 “정말 맛있는 똥이다”라고 부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거장 나홍진 감독이 대중을 슬쩍 놀려먹기 위해 거대한 스케일의 농담을 아주 정교하게 빚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잘 가다듬은 웰메이드 영화를 뛰어넘어 졸라게 기막히게 찍어낸 명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주변 소중한 이들에게 선뜻 꼭 보러 가라며 실드를 쳐주기에는 주춤하게 만드는 대단히 묘하고 독특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명확하게 정복하고 비로소 신나게 머리를 굴리는 사유의 맛을 보려면, 스릴러가 아니라 지독하리만큼 건조한 블랙 코미디라는 시선으로 내부 장치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엉망진창 난장판 속에서 감독이 공들여 깔아둔 그물에 걸려들지 않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습니다.

SF 스릴러인 줄 알았던 영화 ‘호프’, 관객들이 "뭐 이딴 영화가 다 있냐"며 극대노한 사태

굉장히 많은 관객이 거대한 설렘을 안고 극장에 발을 들였을 것입니다. 700억 원이라는 무지막지한 거대 자본이 투입되었고, 무엇보다 ‘곡성’을 만들며 철두철미한 디테일과 묵직한 서사 철학을 각인시킨 나홍진 감독이 처음 도전하는 SF 장르였으니까요. 당연히 우리가 상상하던 시각적 즐거움은 나홍진 특유의 무겁고, 끈적거리며, 숨통을 쥐어짜는 긴장감으로 압박하는 정통 대형 크리처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나타난 실체는 전혀 뜻밖의 경로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초반 지구에 무작정 가닿은 외계인의 등장 장면까지는 익숙한 SF 정체성이 그럴싸하게 이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황정민이 겁에 질려 덜컥 소총을 쏘려 하고 외계인은 서럽게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묘한 뒤틀림이 일더니, 급기야 조인성이 날아가는 UFO를 낚아채듯 올라타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서사의 선로를 완전히 이탈해 버립니다. 진한 대형 스릴러를 보러 온 감상자들은 배신감 속에서 "정말 700억이나 들여가며 공들여 만든 영문 모를 괴작이 맞느냐"며 당혹스러운 짜증을 터뜨리게 된 것입니다.

700억짜리 대규모 '기만극'? 나홍진이라는 거대한 이름표가 만든 기대의 배신

이 어처구니없는 간극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제게는 영화가 제 몫을 다했는지를 따져보는 확실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창작자의 의도가 얼마나 우직하게 실현되었는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호프’는 연출가의 숨은 의도가 지독하리만큼 고해상도로 벼려진 웰메이드 영화입니다. 다만 나홍진이라는 이름값에 가로막혀 형성된 대중의 엄숙주의 필터와 치밀한 각본에 대한 오랜 고정관념이 감상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벽으로 우뚝 섰을 뿐입니다.


파란색 야구 모자를 쓴 남성이 마이크 앞에서 손짓하며 이야기하고 있으며, 화면 오른쪽에는 나홍진 감독의 프로필 사진이 합성되어 있습니다.

거장의 이름이 선사하는 단단한 신뢰 탓에 관객들은 그저 이번 신작 역시 웅장하고 유기적인 미스터리를 품었을 거라 굳게 믿었습니다.


나홍진은 지능적이게도 거대한 은하계급 장벽들을 멋지게 기획해 두고, 정작 카메라는 웅장한 외계 기지나 연합의 심장부가 아닌 한국의 어느 외진 촌동네 마당에 덜컥 데려다 놓았습니다. 감독은 종족 간의 거창한 정세나 철학적 설전 따위에는 애당초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고, 길 가다 운 나쁘게 휩쓸린 일개 촌뜨기 엑스트라들의 지저분한 패싸움과 촌극을 집요할 정도로 클로즈업해 줍니다. 황족의 거룩한 연대와 은하적 사명이 시작되어야 마땅할 서사의 초입인데, 시골마을 구석에서는 들개 떼가 펄펄 뛰며 난장판을 만드는 엇박자 코미디가 펼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진짜 열쇠: 지독하다 못해 악취를 풍기는 블랙 코미디의 역설

이 아수라장을 가르는 참된 서사 원리이자 가장 결정적인 실마리는 다리 밑 인물이 내뱉는 덤덤한 말 한마디입니다. 황정민이 무작정 외계인인 줄 추측하고 본능적으로 총질을 해 대자 한 아저씨가 참다못해 쏘아붙입니다. "사람한테 총을 왜 쏴?" 그러자 황정민은 몹시 민망한 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죠. "놀라서 쐈어요." 겁에 고꾸라져 인과관계 따위 생략한 채 방아쇠부터 당기고 보는 존재, 오해와 편견으로 무장하고 막무가내로 화를 자초하는 한계가 바로 인간이라는 동물입니다.


파란색 야구 모자를 쓴 남성이 마이크 앞에서 손짓하며 이야기하고 있으며, 화면 하단에는 '그게 뭐가 중요해요?'라는 자막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생뚱맞은 질문은 논리적인 서사의 규칙을 단숨에 부수어 버리는 본 작만의 발칙한 유머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마베이오(마이클 패스벤더)와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라는 성스럽고 기품 넘치는 외계 지성체들은 자비를 구하되 침범당하기 전에는 먼저 가해하지 않는 숭고한 질서를 따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포 지역의 인간 군상들은 꼴사나운 겁과 자기 뇌피셜로 일군 '오해'에 찌들어 곧장 실탄 세례를 뿜어냅니다. 지극히 우아한 지성체들의 철학적인 설득과 들개 떼마냥 시끄러운 인간들이 빚어내는 난장판 촌극을 다이내믹하게 엮어낸 연출에서, 이 비대칭적인 블랙 코미디의 거대한 축조가 확연해집니다.

더불어 조인성이라는 배역은 이 덜그럭거리는 우주 서사에 대놓고 마침표를 찍는 슬랩스틱 자체입니다. 흔적조차 남기 힘들 극단적인 폭사 상황에서도 오뚝이마냥 번번이 기어 나오고, 종국 하이라이트 쿠키 영상까지 보란 듯이 숨통을 내밉니다. 공개 개그 극장에서 덩치 큰 스포츠 파이터에게 들이받아 온몸이 꺾이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씩씩대며 기어오르는 악바리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운 문법과 일맥상통합니다. 진중함과 불시의 파멸이 뒤섞여 창조해 내는 이 골 때리는 허탈함이야말로 나홍진이 숨겨놓은 심술궂은 유머의 참맛입니다.


안경을 쓰고 파란색 야구 모자를 쓴 남성이 마이크 앞에 앉아 손을 들어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엄한 SF 대작에 목말랐던 이들의 기대를 상쾌하게 무너뜨리며, 영리하게 포장된 블랙 코미디로 거듭났다는 평가입니다.


스토리를 원한 사람에겐 쓰레기, 삐딱한 유머를 원한 사람에겐 ‘맛있는 똥’이 되는 이유

결국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영화의 온도는 극과 극의 종착지로 나뉘게 됩니다. 앞뒤 인과관계가 아주 단단하게 설계된 극인 줄 알았는데, 정호연이 쏘아 올린 유탄은 기가 막히는 묘기를 부리며 맞물리고, 조인성은 뚱딴지같이 맹수를 피하듯 말에 훌쩍 올라타 자유자재로 달립니다. 그 와중에 함께 보던 아저씨가 관객을 대리하듯 "쟤는 갑자기 왜 저렇게 말을 잘 타?"라며 유쾌하게 쐐기까지 박아 줍니다. 코미디적 문법이 짜놓은 의도적인 균열을 읽어내지 못하고 고품격 미스터리의 빈틈없는 짜임새만을 쫓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영락없는 괴작이자 시간 낭비로 머무를 것입니다.

반면, 영화가 뿜어내며 조장하는 기묘한 긴장감, 최고의 명장들이 수놓은 엄청난 비주얼과 속도감 넘치는 연출력, 그리고 인물들이 자아내는 무모한 아이러니 중 한 자락에라도 뇌파가 동조된 관객이라면 극장을 나오며 입꼬리를 실룩거렸을 게 분명합니다. "아이코, 아주 훌륭한 비주얼로 기막히게 맛있는 똥을 질러놨네"라며 쾌재를 부르는 셈이니까요.

칸 경쟁작에 출품된 진짜 이유, 그리고 이 거대한 농담의 마무리를 지켜보는 법

단순히 상업적인 우주 프랜차이즈의 실마리 역할에 그치는 수준이었다면, 콧대 높은 칸 영화제가 공식 초청 라인업에 결코 명함을 건네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시골구석 불협화음의 촌극을 위해 무려 700억이라는 우직한 총알을 전부 갈아 태우면서 그것을 끝까지 매만진 그 곤조와 장인 정신을 확인했기에, 평단이 선뜻 그 비틀린 예술성을 지지하고 나선 것입니다.

나홍진 감독이 무대인사에서 "투자가 성사되면 당장 촬영할 수 있도록 모든 속편 대본이 다 준비되어 있다"고 농을 건네는 것조차 관객 전체를 신나게 낚아 올리기 위한 기획된 농담의 장외 무대처럼 들립니다. 일찍이 칸 프리미어 도중 "다음 시리즈의 연장을 치밀하게 조율해서 기계식으로 계산해 둔 작품이 절대 아니다"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던 고백이 이 유쾌한 사건들의 모든 연결고리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깨에 잔뜩 힘 들어가 있던 전작들의 그림자를 털어내고, 그저 헛웃음을 품어보겠다는 한결 편한 심사로 스크린 앞의 어둠에 자리를 잡아보시길 권합니다. 고해상도로 꼼꼼하게 다듬어진 귀엽고 기괴한 비명이 여러분을 맞이해 줄 것입니다. 부디 고요한 식당이 던진 이번 화두를 곱씹어 보며 흥미진진한 탐색의 시간을 보내셨길 기대해 봅니다.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아주 환한 보탬이 됩니다. 지금까지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요한 식당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이.


FAQ

나홍진 감독이 연출해 온 전작(곡성, 추격자 등)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이전 영화들이 피를 말릴 듯한 몰입도 높은 스릴러와 정밀한 각본을 바탕으로 한 추적극이었다면, '호프'는 기품 서린 우주 비극이라는 엄청난 배경판 위에 정작 나약한 인간들이 빚어내는 무모한 오해와 자중지란 상황을 맞부딪치게 만드는 700억 원짜리 거대 블랙 코미디라는 점이 아주 색다릅니다.

조인성이 연기한 주인공 캐릭터가 폭풍 폭사에도 죽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는 전개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해당 전개는 이 영화가 엄숙한 스릴러가 아닌, 비약과 실소가 넘실거리는 슬랩스틱 코미디로 짜여 있음을 증명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쓰러지면 또다시 툭툭 털며 벌떡 기어 나오는 고전 만화 주인공 같은 재미 요소이자 연출적 유머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엄청나게 선량하고 수려한 미형의 외계인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들은 우아하고 깊은 기품을 간직한 우주의 수려한 문명체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시골마을 엑스트라들이 뒤엉키며 일으키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아수라장 난투극과 선명한 극적 대조를 고스란히 끌어내기 위한 탁월한 비주얼 설계이자 상징적 인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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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신작 ‘호프’ 결말 해석: 왜 이 영화에서 ‘코미디’를 빼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갈까? - 이글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