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K 채소 / 사진=더카뷰 |
항응고제를 복용 중인 환자가 시금치를 평소보다 많이 먹은 뒤 혈액검사 결과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사례가 심심찮게 보고된다.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채소가 오히려 치료 효과를 방해한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현상에는 명확한 생화학적 이유가 있다. 항응고제와 비타민K 사이에는 직접적인 길항 관계가 존재하며, 이 원리를 모르면 약을 꼬박꼬박 먹어도 효과가 사라질 수 있다.
봄철에 접어들면서 식탁에 녹색 채소가 늘어나는 계절이 됐다. 봄나물과 함께 시금치, 브로콜리, 쑥 같은 채소를 자주 올리는 가정이 많아지는데, 혈전 예방을 위해 와파린 같은 항응고제를 처방받은 환자라면 이 시기에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녹색 채소를 많이 챙겨 먹기 시작한 뒤 갑자기 혈액 점성이 높아졌다거나, 정기 혈액검사에서 INR 수치가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전하는 환자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임상 현장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의 핵심은 식단이 약물 효과를 조용히 무력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와파린과 비타민K 길항작용
비타민K 채소 / 사진=더카뷰 |
와파린은 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단백질들을 활성화하는 데 비타민K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원리를 역이용한 약물이다. 구체적으로는 간에서 비타민K 의존성 응고인자인 2번, 7번, 9번, 10번 인자의 생성을 억제함으로써 혈전이 잘 생기지 않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식품으로 비타민K를 대량 섭취하면 와파린이 억제하려는 응고인자 생성 경로에 원료가 넉넉히 공급되는 셈이 된다. 약이 응고 과정의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면, 비타민K는 그 브레이크를 무력화하는 연료를 추가로 붓는 것과 같은 원리다.
비타민K 채소 / 사진=더카뷰 |
시금치 100g에는 비타민K1이 약 483마이크로그램 함유돼 있다. 성인의 하루 권장 섭취량이 약 70~120마이크로그램임을 감안하면, 시금치 한 접시만으로도 권장량의 수 배를 가뿐히 넘기는 셈이다. 케일, 근대, 깻잎도 비타민K 함량이 매우 높은 채소에 속한다.
비타민K 섭취량이 갑자기 늘어나면 와파린의 효과를 모니터링하는 핵심 지표인 INR 수치가 빠르게 낮아진다. INR이 치료 범위인 2.0~3.0 아래로 떨어지면 혈전 예방 효과가 크게 줄어들고, 뇌졸중이나 심부정맥 혈전증 같은 합병증 위험이 실질적으로 높아진다.
비타민K 섭취를 완전히 끊어서는 안 되는 이유
비타민K 채소 / 사진=더카뷰 |
중요한 점은 비타민K를 아예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심장협회와 메이요 클리닉은 공통적으로, 와파린 복용 환자에게 비타민K 음식을 완전히 피하기보다는 매일 섭취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섭취량이 들쭉날쭉할 때 오히려 INR 조절이 어려워진다. 평일에는 채소를 거의 안 먹다가 주말에 쌈채소를 잔뜩 먹는 식의 불규칙한 패턴이, 매일 조금씩 꾸준히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비타민K 채소 / 사진=더카뷰 |
와파린 외에도 리바록사반, 아픽사반 같은 직접 경구 항응고제가 처방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약물들은 비타민K 의존성 경로를 거치지 않아 시금치와의 상호작용이 와파린보다 훨씬 적다. 다만 복용 중인 약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식단을 조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항응고제 복용 환자들이 봄철 녹색 채소 섭취량이 늘어나는 시기에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 식단 관리를 다시 점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봄나물 챙겨 먹으려다 INR 수치가 갑자기 떨어져서 처음엔 이유를 몰랐다", "와파린 먹는 동안은 쌈채소를 확 줄여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매일 일정하게 먹으면 괜찮다고 해서 소량은 계속 먹고 있다"는 등의 경험담이 건강 커뮤니티에 꾸준히 올라온다.
결국 항응고제 복용 중 식단 관리의 핵심은 '금지'가 아닌 '일관성'이며, INR 수치 변동이 생길 때마다 최근 식단 변화를 함께 점검하는 것이 정확한 원인 파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