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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팔아넘긴 자가 다시 태어났다

spark_icon8분 지식
  • 드비타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자신을 유다로 규정하고 날아오르려 발버둥쳤던 경험을 10개 트랙의 서사로 풀어냈습니다.
  •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하던 이카로스의 상승 강박을 내려놓고 자비를 청하는 순간, 추락의 공포는 타인을 향한 구원의 항해로 전환됩니다.
  • 이 앨범의 본질은 추락을 극복하고 다시 날아오르는 승리가 아니라, 추락하더라도 나를 받아줄 사랑이 있음을 믿는 완전한 수용에 있습니다.

아티스트 드비타(Devita, 본명 조윤경)가 오랜 침묵과 내면의 파국을 딛고 꺼내놓은 고백은 처절합니다. 2020년 AOMG에 합류하며 커리어의 정점에 서는 듯했지만, 2024년 모든 자리를 내려놓고 홀로 섰습니다. 스스로가 신이 된 듯한 착각과 악마로 전락한 듯한 자책이 교차하던 시기, 실제로 찾아왔던 조현병 초기 증세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10개의 트랙을 엮어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을 클로즈업한 유화 스타일의 그림이며 하단에 한국어 자막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자신을 유다로 지칭하며 겪었던 고통과 그 속에서 찾아낸 삶의 기록을 향해 나아갑니다.

앨범 《The Tree is Burning》은 단순한 음악적 포트폴리오가 아닙니다. 예수를 팔아넘긴 가장 끔찍한 죄인, 곧 '유다'로 스스로를 낙인찍었던 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숨을 쉬게 되었는지를 입증하는 날것의 생존 기록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유다로 규정하게 만들었는가

첫 트랙에서 화자는 감히 닿아서는 안 될 금기를 욕망하며 괴로워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모든 불행과 병이 찾아왔다는 자책은, 모세가 마주했던 신성한 불꽃이 아닌 수치심으로 타오르는 불타는 나무의 형상으로 시각화됩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길래 스스로를 유다라고 부르며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용서를 간청하는 것일까요?

이 지독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첫 번째 방식은 끝없는 '상승'이었습니다. 두 번째 트랙에서 드비타는 그리스 신화 속 이카로스를 소환합니다. 밀랍 날개가 녹아내려 바다로 떨어진 이카로스를 보며 '추락은 내 운명이 아니다'라고 다짐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태양을 향해 올라가려는 모습은 이미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 최면을 걸어보지만, 불안하게 툭툭 끊기는 전자음과 바닥을 짓누르는 저음 베이스는 올라가려는 목소리와 반대로 누가 보아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자의 형상을 청각적으로 폭로합니다.

형식적인 기도에서 마주한 내면의 균열과 악마

어릴 적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며 식전 기도와 취침 기도가 숨 쉬듯 자연스러웠던 신앙은,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리자 끔찍한 혼란으로 변질됩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베이스 볼륨을 높여달라고 소리치고, '아멘'을 외치는 순간에도 귓가에는 내면의 악마들이 속삭입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여성의 얼굴 위로 물음표 세 개가 겹쳐져 있는 흑백 영상 캡처 화면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알 수 없던 혼란 속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기도를 음악으로 길어 올렸습니다.

4번 트랙 〈야훼〉에서는 기괴하게 뒤틀린 소리들이 곡 전체를 지배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인간의 원죄를 상기시키는 절망 속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짖지만, 그 이면에는 역재생된 기도문과 속삭임이 불길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망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느낀 감정은 신을 향한 순종이라기보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형식만 남아있던 껍데기 기도가 산산조각 난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신을 향한 절박한 외침이 시작됩니다. 악마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며 흘러나오는 짧은 탄식,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은 분노와 변명을 모두 내려놓은 첫 번째 신호탄이었습니다.

추락을 멈추려 발버둥 치지 않을 때 시작되는 항해

내려놓음이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신에게 완전히 넘기는 행위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도가 관성이었거나 비명이었다면, 드비타는 마침내 다른 잡음이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침묵 속에서 자기 힘으로 날아오르려던 강박을 포기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추락했는지 설명하지도,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구차하게 변명하지도 않은 채 오직 긍휼만을 구합니다.

자신이 죄 덩어리가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순간, 놀랍게도 기도의 방향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신의 사랑은 더 무한하고 위대해서,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

신을 만나러 떠나는 이 항해는 죽음을 향한 도피가 아닙니다. 트랙 1에서 자신을 부끄럽게 태우던 수치심의 불은 어둠 속 길을 밝히는 작은 성냥불로 바뀌고, 거친 비바람을 견디게 해줄 망토를 두른 채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여정을 떠납니다.

촛불 아래 겹쳐진 사랑, 그리고 어린 양의 자리

험난한 항해 끝에 도착한 종착지는 눈부신 황금빛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바깥은 여전히 매섭게 춥고 눈앞에 놓인 것은 흔들리는 작은 촛불과 자신을 돌봐주는 곁의 누군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소박하고 온기 있는 풍경이야말로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베이지색 숄을 걸친 인물의 뒷모습이 부드러운 조명을 받으며 서 있고, 하단에는 한국어 자막이 새겨져 있습니다.

긴 추락 끝에 비로소 다다른 용서와 희생의 자리에서, 마침내 신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인 'falling(추락)'은 완벽하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초반부 이카로스의 추락이 파멸이자 죽음이었고, 중반부의 추락이 바닥없는 심연에 빠지는 공포였다면, 트랙 〈Lamb〉에 이르러 그것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falling for you'로 치환됩니다.

신이 그 바닥에 계심을 알기에 이제는 떨어지는 것 자체가 두렵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배신자 유다로 낙인찍었던 화자는 마침내 용서와 희생을 상징하는 어린 양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억지로 밀랍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맴돌 필요 없이, 완전한 사랑의 품 안으로 기꺼이 몸을 던진 것입니다.

추락하더라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는 〈할렐루야〉에서 비로소 터져 나오는 한국어 가사는 마치 이성을 뛰어넘어 영혼으로 쏟아내는 방언처럼 다가옵니다. 성경 속 광야는 버려지는 공간인 동시에 시험을 통과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자리입니다. 드비타는 이제 고통스러운 광야를 피해 도망치게 해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메마른 땅을 지나며 스스로를 온전히 갱신해 달라고 선언합니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스스로를 가혹하게 정죄하며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이 마주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드비타가 긴 파국 끝에 내놓은 해답은 명료합니다.

이 앨범이 전하는 위로는 추락의 반대가 눈부신 상승이라는 식의 얄팍한 성공 서사가 아닙니다. 설령 바닥으로 추락하더라도 나를 받아줄 무한한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상처 입은 날개를 접고 평안을 되찾은 인간 조윤경의 여정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FAQ

드비타가 앨범에서 자신을 '유다'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현병 초기 증세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이 잘못해서 병에 걸렸다는 자책감에 빠졌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배신자 유다와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앨범 전반에서 '추락(falling)'이라는 모티프는 어떻게 변화하나요?

초반에는 이카로스처럼 죽음과 실패를 뜻하는 공포의 추락이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falling for you'로 바뀌며, 종국에는 신의 무한한 사랑의 품으로 안전하게 안착하는 온전한 수용의 의미로 변화합니다.

타이틀곡 및 앨범 전반에 기독교적 상징이 자주 쓰인 배경은 무엇인가요?

드비타 본인이 모태신앙인으로서 기도가 일상이었던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생존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마주한 내면의 공포와 악마, 그리고 이를 치유해 준 궁극적인 용서의 과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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