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_banner
  •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독립행진곡(해방가)'은 친일 음악가 김성태가 일본 군가 음계를 표절한 곡이며, 진짜 우리 민족의 DNA를 담은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는 분단과 검열 속에 잊혔습니다.
  • 당대 최고의 천재 작곡가 김순남은 미군정 장교의 주니어드 유학 제안을 거절하고 월북했으나, 모스크바 유학 중 남로당 숙청 바람이 불자 망명을 거부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는 오만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 결국 김일성 정권에 의해 '작곡 금지'라는 사형보다 잔인한 형벌을 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우리에게 주체적 정체성의 회복과 인생의 '타이밍'에 대한 뼈아픈 교훈을 남깁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주의 인물 명리학자 강헌입니다.

오늘 우리는 20세기 한국 음악사가 낳은 단 한 명의 위대한 천재, 그러나 역사와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히 지워져 버린 비극적 인물 김순남의 삶을 통해 '민족음악'이라는 개념의 본질을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과연 진정한 민족음악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옛날 국악기를 섞어 연주하거나 애국적인 가사를 붙이면 민족음악이 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혀 아닙니다. 민족음악은 식민지 지배와 문화적 거세로 인해 왜곡된 우리의 무의식과 음악적 DNA를 주체적으로 혁명하고 복원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아는 것, 즉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의 철학이 음악이라는 예술로 구현된 결정체가 바로 민족음악입니다.

왜 민족음악이라는 개념이 중요한가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귀와 영혼이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 땅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지 지배 세력이 이식한 음악적 불순물들을 '우리 것'으로 착각하며 자랐습니다. 해방이 되었음에도 정신적, 문화적 식민지 상태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진짜 우리 영혼의 울림을 담은 노래를 오히려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끼는 비극을 겪게 된 것입니다.

민족음악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예술적 장르의 구분이 아니라, 빼앗겼던 민족적 정체성을 복원하고 주체적인 정신을 확립하기 위한 장렬한 음악철학적 독립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영혼이 굶주리고 왜곡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당대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왜 그토록 치열하게 이 운동에 목숨을 걸었는지, 우리는 그 본질을 똑바로 마주해야 합니다.

민족음악의 진짜 정의: 우리말의 울림과 주체적 선율

그렇다면 진짜 민족음악의 명확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민족음악의 출발점은 바로 우리 언어의 고유한 울림입니다. 서양식 오선지 위에 단순히 음표를 나열하는 음악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우리말이 가진 독특한 장단과 호흡, 정서를 음악적 선율로 완벽하게 치환해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당시 김순남을 비롯한 '조선음악가동맹'의 천재들이 가장 사랑했던 시인이 바로 김소월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월의 시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울림과 민족적 한(恨)의 정서를 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김순남은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명작 가곡 '산유화'를 통해, 서양 음악의 틀을 빌리면서도 그 안에서 완벽하게 살아 숨 쉬는 조선의 호흡을 구현해냈습니다. 즉, 외래의 기술적 형식에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주체성을 뼈대로 삼아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민족음악의 진짜 정의입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지점: 친일의 음색을 '민족의 노래'로 착각하는 비극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혼동하고 착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방 직후 남한의 대중과 대학가, 심지어 80년대 운동권 학생들까지 집회 때마다 열정적으로 부르고 춤추었던 '해방가(원제 독립행진곡)'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삼천리강산에 먼동이 튼다며 동포들을 흔들어 깨우는 이 희망찬 노래가, 사실은 어떤 노래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전형적인 일본 군가인 '만주행진곡'의 멜로디를 그대로 가져온 표절곡이자, 일본 특유의 단조 음계인 '요나누키(ヨナ抜き) 음계'로 쓰인 곡입니다. 작곡가는 친일파 현제명의 왼팔이었던 김성태였습니다.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강연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 화면


반면, 진짜 우리 전통 선율 기법과 세련된 당김음(스타카토)을 사용해 김순남이 작곡한 진짜 '해방의 노래'를 들려주면, 대다수의 현대 한국인들은 "어딘가 어색하고 북한 노래 같다"며 거부감을 느낍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소름 돋는 비극 아닙니다. 친일파가 만든 일본 군가풍 멜로디는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데, 우리 고유의 DNA를 담아 정교하게 빚어낸 진짜 민족의 선율은 낯설고 불편하게 느끼는 이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는지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안경을 쓴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강연하는 옆모습이 담긴 영상 캡처 화면


역사적 실증: 천재 작곡가 김순남의 장렬하고도 오만한 선택

김순남은 일본 국립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당대 최고의 천재였습니다. 해방 후 단 2년 동안 가곡집 3권, 혁명가 50여 곡, 한국 최초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을 쏟아내며 엄청난 창작력을 발휘했습니다.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 현제명이 서울대학교(국대안)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진보적 음악가들의 생로를 철저히 차단하자, 이들은 게릴라식 전국 문화 공연으로 맞서며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이때 소설 같은 귀인이 나타납니다. 미군정청의 문화 참사관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헤이모비치(Heimowitz) 대위였습니다. 그는 권력욕만 가득한 현제명을 "예술로도 인간으로도 쓰레기"라며 극도로 혐오한 반면, 지하에 숨어 지내던 김순남의 천재성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좌익 소탕령이 내려져 김순남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헤이모비치는 김순남의 악보를 모아 미국 줄리어드 음대로 보냈고, 줄리어드로부터 "미국으로 보내주기만 하면 우리가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허가서까지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김순남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고맙지만 나는 갈 수 없다"며, 대신 미군 지프차를 딱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평생 숨어 다니느라 보지 못했던 서울의 풍경을 지프차를 타고 단 하루 동안 마음껏 눈에 담은 뒤, 그는 미련 없이 북으로 향했습니다.

북한에서의 삶도 처음에는 화려했습니다. 1952년 전쟁 중에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유학을 갔고,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으로부터 "사회주의의 별이 될 위대한 작곡가"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의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를 오케스트라 곡으로 직접 편곡해 헌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명리학은 타이밍'이라 했던가요. 1953년 전쟁이 끝나고 북한 정권 내에서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에 대한 피바람 부는 숙청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던 남로당계 유학생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소련으로 망명(이후 카자흐스탄 알마타로 추방)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김순남은 여기서 두 번째 오만을 부립니다.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겠느냐"며 혼자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것입니다.

평양역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차가운 법정이었습니다. 어제까지 인민의 영웅이었던 예술가는 하루아침에 '반동 부르주아 작곡가'로 전락했습니다. 그가 작곡한 '인민항쟁가'가 사실상 북한의 준(準)국가처럼 불렸기에 처형만은 면했지만, 정권은 사형보다 더 잔인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로 '작곡 금지'였습니다. 그는 평안북도의 외딴 깡촌으로 유배되어, 남들이 만든 너절한 선전가요의 악보를 손으로 베껴 쓰는 '인간 복사기'로 전락한 채 쓸쓸히 잊혀 갔습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지금도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삶에 적용하는 법: 주체적 정체성과 물러설 때의 지혜

김순남의 기구하고 위대한 삶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첫째, 나의 취향과 생각이 정말 나의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중문화나 일상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수많은 가치와 유행들이, 사실은 우리의 주체성을 갉아먹는 '현대판 요나누키 음계'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둘째, 아무리 위대한 천재라 할지라도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의 타이밍을 모르면 파멸한다는 뼈아픈 교훈입니다. 김순남은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자존심에 취해, 권력이라는 괴물이 가진 무자비한 속성을 간과했습니다. 줄리어드로 가라는 헤이모비치의 우정 어린 제안을 거절했을 때,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평양행 기차에 홀로 올랐을 때, 그 오만함이 결국 그의 예술적 생명을 끝장내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주체성을 지키는 것은 졸라 멋지고 숭고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는,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이밍을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인생의 어떤 타이밍을 지나고 계십니까. 요주의 인물 강헌이었습니다.


FAQ

'요나누키 음계'란 무엇이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나요?

요나누키 음계는 일본의 전형적인 5음계(도-레-미-솔-라)로, 일제강점기 군가와 대중가요를 통해 한국인의 무의식에 깊이 이식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 음계에 기반한 곡들이 '민족의 노래'로 둔갑해 불리면서, 우리의 주체적인 음악적 DNA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김순남이 작곡한 '민족음악'의 핵심적 특징은 무엇인가요?

김순남은 단순히 서양 음악을 모방하거나 옛 국악을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언어(특히 김소월의 시)의 고유한 울림과 장단을 현대적인 서양 작곡 기법에 주체적으로 융합했습니다. 싱코페이션(당김음)과 전통 선율 기법을 조화롭게 사용해 한국인 고유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구현했습니다.

김순남은 왜 주니어드 대학의 구명 제안을 거절하고 북으로 갔나요?

미군정 장교 헤이모비치 대위가 그의 천재성을 아껴 주니어드 음대의 유학 허가까지 받아주며 피신을 권유했으나, 김순남은 자신의 신념과 민족음악운동의 현장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미군 지프를 하루 빌려 서울을 둘러본 뒤 월북을 선택했습니다.

북한에서 김순남이 '작곡 금지' 처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1953년 한국전쟁 직후 김일성 정권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을 대대적으로 숙청할 때, 확고한 남로당원이었던 김순남 역시 숙청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대중적 영향력 때문에 처형은 면했으나, 예술가에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작곡 금지' 유배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본 영상 보기

# 강헌
# 김순남
# 민족음악
# 쇼스타코비치
# 요나누키음계
# 인민항쟁가
# 하차투리안
# 한국근대사
# 해방가
# 현제명

인문 카테고리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