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음악'은 단순한 전통 보존이 아니라, 서양음악의 보편적 체계에 우리 고유의 선율을 녹여낸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적 독립 선언이다.
- 친일과 친미를 오간 기회주의적 음악 권력에 맞서, 안기영 등 진보적 음악가들은 민요 채집과 한국 최초의 향토 가극을 통해 대중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
- '너 자신을 아는 것(To know oneself)'에서 출발한 민족음악의 철학은, 오늘날 우리가 주체적인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를 던져준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단순한 정치적 격변기를 넘어,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우리만의 주체적 문화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거대한 철학적 시험대 위에 있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민족음악(民族音樂)'은 단순히 옛 전통음악을 보존하자는 보수적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양음악의 보편적 소통 체계를 받아들이되,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선율을 융합하여 세계와 소통하고자 했던 가장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적 독립 선언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주의 인물 명리학자 강헌입니다. 오늘 우리는 통념 속에 갇혀 있던 '민족음악'의 진짜 얼굴과, 해방 공간에서 이를 치열하게 구현하려 했던 '조선음악가동맹'의 뜨거웠던 발자취를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왜 지금 '민족음악'이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1945년 8월 15일,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갑작스럽게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해방은 극심한 혼란을 낳았습니다. 놀랍게도 일본이 항복한 바로 다음 날인 8월 16일에 모든 문화예술 분야의 전국 대회가 소집되었고, 3일 만인 18일에 '조선음악건설본부'라는 조직이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위대한 전통인 '빨리빨리'와 '부실공사'가 이때도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죠.
시스템은 번개처럼 갖췄지만, 진짜 문제는 식민지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지 않고 모두 모였다는 점입니다. 처형당하거나 최소한 집구석에서 좆잡고 반성해야 할 악질 친일 음악가들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미래를 논하는 어처구니없는 풍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때 친일 음악인의 맹주가 바로 작곡가 현재명이었습니다.
영어 전공자였던 현재명은 미군정이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로디 현(Rody Hyun)'으로 바꾸고, 친일파 명단을 넘겨받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순식간에 우익 음악계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반면, 1917년 이후에 태어나 친일할 기회조차 없었던 30대 초반의 젊고 진보적인 음악가들은 이에 분노하며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훗날의 '조선음악가동맹'을 결성하여 맞서게 됩니다.
이들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1945년 10월에 일어납니다. 현재명 일파가 미군을 환영하는 호화로운 음악회를 열고 있을 때, 조선음악가동맹의 젊은이들은 서울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던 경성방직의 파업 노동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두 달 전까지는 똑같은 식민지 조선의 음악가였던 이들이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족음악'의 명확한 정의: 지배에 맞서는 네 번째 선택
그렇다면 조선음악가동맹이 목숨 걸고 부르짖었던 '민족음악'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음악가들 앞에는 네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첫째, "세계의 대세는 서양음악이니 우리 것은 깨끗하게 버리고 서양으로 가자"는 서구 추종 노선입니다. 둘째, "조선 시대의 옛 음악으로 완전히 돌아가자"는 봉건 회귀 노선입니다. 셋째, 식민지 기간 동안 길들여진 일본풍의 음악(뽕짝)을 근대화의 유산이라며 그대로 유지하자는 식민지 굴종 노선입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졸라게 많지만, 이는 청산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조선음악가동맹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거부하고 네 번째 길, 즉 '창조적 융합으로서의 민족음악'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이 정의한 민족음악은 구호를 위한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서양음악이 가진 보편적인 소통 체계(오선보, 화성 등)의 유용성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 그릇 안에 담을 알맹이는 100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한국인의 특수성, 즉 우리 고유의 민요와 전통 선율(평조, 계면조)에서 추출해 새로 창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나라도 만드는데, 음악이라고 새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엄청난 기개였습니다.
흔히 빠지기 쉬운 오해: 민족음악은 국악의 재탕인가?
여기서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합니다. 민족음악을 단순히 박물관에 박제된 국악이나 전통 민요를 그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과연 그럴까요? 절대 아닙니다.
민족음악은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철저하게 당대 대중과의 호흡을 지향한 '음악의 대중화 운동'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창작해 봤자 저희끼리 골방에 모여서 "야, 죽인다. 바르토크랑 비슷하지 않냐?"라며 서로 빨아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강연장에서 한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서 있고, 뒤편 스크린에는 '안기영(1900-1980)'이라는 글자가 떠 있다.
미군정과 한민당 세력이 방송, 언론, 학교 등 모든 미디어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이들의 목줄을 죄어왔을 때, 조선음악가동맹의 엘리트 음악가들은 기꺼이 손에 흙을 묻혔습니다. 그전까지 펜대만 굴리던 백면선생들이 직접 파업 현장과 농촌으로 내려가 대중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함께 부르며 구전으로 음악을 전파했습니다. 이처럼 민족음악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삶 한복판에서 살아 숨 쉬는 혁명적 무기였습니다.
역사적 실증: 안기영의 '그리운 강남'과 한국 최초의 뮤지컬
이 위대한 민족음악의 역사적 실증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작곡가 안기영입니다. 동경음악학교 출신의 홍난파가 서양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어 "우리 것은 다 버려야 한다"고 외칠 때, 미국 유학파 출신의 테너이자 작곡가인 안기영은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서양음악이 참 좋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 것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이화여전 교수가 된 안기영은 제자들을 데리고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전되던 민요들을 채집하고 이를 서양식 악보로 옮기는 파격적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양악계 고상한 자들은 그를 향해 "이화여전을 기생 학교(권번)로 만들려 한다"며 졸라게 비난했고, 전통음악계 역시 자기 밥그릇을 건드린다며 불만을 터뜨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1929년에 발표된 최고의 히트곡 '그리운 강남'입니다. 이 곡은 외형상 4분의 3박자의 서양 음악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멜로디의 뼈대는 우리나라 전통의 '평조 음계'를 오음계로 완벽하게 이식한 곡입니다. 낯선 빠다 냄새도, 왜색 짙은 트로트도 아닌,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련된 새로운 음악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한반도를 넘어 만주 벌판의 독립군들까지 애창하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강연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 캡처 화면
안기영의 천재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가극을 만들고자 1936년 라미라 가극단을 창단하고 한국 최초의 뮤지컬인 향토가극 '견우직녀'와 '은하수'를 무대에 올립니다. 이 반도가극단(라미라 가극단의 후신)은 40년대 초반 한반도와 만주, 일본을 휩쓸며 엄청난 한류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공연 팀이 A, B, C 세 팀으로 나뉘어 동시 순회공연을 돌았을 정도이니, 오늘날의 웬만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습니다. 윤복희 자매의 부친인 윤부길을 비롯해 백설희, 황해, 김희갑 등 초기 한국 대중문화를 지배한 톱스타들이 모두 이 안기영의 품에서 길러졌습니다.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민족음악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왜 이토록 위대한 선구자 안기영의 이름조차 음악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을까요?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우 합작을 통해 분단을 막으려 했던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이 몰락했듯, 음악계에서도 남북의 분열을 막으려 몸부림쳤던 중도파 최동선이나 조선음악가동맹의 주역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민족음악'의 정신은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컬처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진정한 문화적 독립과 주체성은 어디서 옵니까? 맹목적으로 서구 트렌드를 복제하는 것도 아니고, 닫힌 세계 속에서 우리 것만 최고라며 우기는 국수주의에서도 오지 않습니다.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 먼저 나 자신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뿌리인 정체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인류 보편의 소통 도구를 통해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낼 때, 비로소 세계를 뒤흔드는 위대한 문화가 탄생하는 법입니다. 70여 년 전, 혹독한 겨울의 문턱에서 뜨거운 예술적 선언을 던졌던 조선음악가동맹의 거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화두입니다.
요주의 인물 강헌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