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5년 발표된 '목포의 눈물'은 항일의 메시지를 담은 가사와 완벽한 일본 엔카의 음악 문법이 결합된 기형적인 시대의 산물입니다.
- 1980년대 벌어진 트로트 국적 논쟁에서 우리 고유의 음계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제국주의가 이식한 근대 음악의 본질을 오독한 헛발질이었습니다.
- 기원에 집착하기보다 뼈아픈 식민지 문화 잔재 청산의 실패를 직시하고, 굴절된 역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주의 인물 강헌입니다. 1935년, 이 시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진정으로 한국이 국권을 상실한 을사늑약(1905년)으로부터 딱 30년, 즉 한 세대가 경과한 해입니다. 국권은 한 방에 빼앗길 수 있지만, 문화적 주권은 다릅니다. 정서와 감수성은 서서히 잠식되고, 한 번 빼앗기면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처절하게 되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병합하자마자 전국 1,700개 학교에 일본적인 선율과 조성으로 이루어진 음악 교과서를 강제 배포했습니다. 노래가 가진 집단 정체성의 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교육받은 한 세대가 지난 1935년, 한국 대중음악 최초의 주류 장르가 폭발합니다. 바로 우리가 '트로트'라 부르는 장르의 뼈대가 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입니다.
저항의 노랫말을 덮어버린 제국의 음악 문법
'목포의 눈물'은 발매되자마자 5만 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립니다. 당시 인구를 생각하면 지금의 1천만 장에 필적하는 수치입니다. 이 노래가 민족적 수준의 성공을 거둔 이유는 가사 속에 숨겨진 폭발적인 은유 때문이었습니다. 2절에 등장하는 '300년 원한 품은 노적봉'은 단순한 아낙네의 이별 노래가 아닙니다. 정확히 340여 년 전,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몰살시켰던 임진왜란의 기억을 소환하며 만국의 한을 노래한 민족 저항가였습니다.
당시 총독부의 서슬 퍼런 검열을 어떻게 통과했을까요? 위대한 프로듀서 이철은 검열관에게 술을 먹이며 '원한'이 아니라 암수가 사이좋은 '원앙'이라고 우겨서 통과시키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탄압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오히려 대중을 결속시켰고, 이 노래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개인적인 민족의 찬가가 되었습니다.
강연 중인 강헌의 옆모습을 담은 토크 장면
하지만 여기에는 참으로 놀랍고도 슬픈 위대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정작 이 저항의 노랫말을 담고 있는 음악적 구성은 완벽한 일본의 엔카(演歌) 문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레미파솔라시 7음계 중 4번째(파)와 7번째(시) 음을 뺀 이른바 '요나누키 단음계'에, 2/4박자 리듬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숨결을 기준으로 한 3박자(장단)의 나라인데, 심장 박동을 기준으로 한 서구의 2박자와 제국주의의 음계가 우리의 슬픔을 담는 그릇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엔카(演歌)의 본질: 진보적 연설에서 퇴폐적 염가로
그렇다면 엔카는 일본 고유의 전통 음악일까요? 과연 그럴까요? 절대 아닙니다. 엔카라는 문화는 일본 근대 음악의 산물입니다. 본래 엔카는 연애할 때의 '연'이 아니라 연설할 때의 '연(演)'을 썼습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 자유민권 사상을 글 모르는 민중에게 계몽하기 위해 운동권들이 부르던 몹시 진보적인 '연설가'가 바로 엔카의 뿌리입니다.
안경을 쓴 남성이 마이크 앞에서 강연하는 모습
그런데 1890년대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군국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합니다. 정치적 메시지를 잃어버린 엔카는 1910년대에 이르러 남녀 간의 퇴폐적인 사랑과 개인의 슬픔을 노래하는 '염가(艶歌)'로 변질됩니다. 장조의 당당함은 사라지고 단조의 여성적 감정에 치중하는 노래들이 신파극과 함께 조선에 상륙했고, 끊임없는 반복 학습을 통해 우리의 체질인 양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트로트는 과연 우리 것인가? 빗나간 국적 논쟁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때아닌 트로트 국적 논쟁이 벌어집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트로트의 음계가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음계인 계면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제국주의가 이식한 근대 음악의 본질을 오독한 진짜 어이없는 헛발질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 엔카의 천황이라 불리는 작곡가 고가 마사오가 "엔카의 뿌리는 조선이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고가 마사오는 인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고, 한국의 서도민요 등에서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일본 엔카 시장을 지배한 슈퍼스타의 70%가 조선계 혈통이기도 합니다.
명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 노 원 셀프(To know oneself)',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트로트의 뼈대가 일본에서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는 일본의 미학과 달리, 감정의 진폭을 극대화하는 한국 특유의 '농현(바이브레이션)'과 한의 정서가 결합되면서 트로트는 한국인의 심성에 완벽하게 밀착된 독자적인 장르로 진화했습니다. 축구의 종가는 영국이지만 월드컵 우승은 브라질이 더 많이 하듯, 일본이 이식한 문법을 우리가 더 뛰어나게 변주해 낸 것입니다.
진정한 식민지 잔재 청산은 기원 논쟁이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분노하고 성찰해야 할 지점은 트로트의 기원이 아닙니다. 1930년대 후반, 미나미 총독은 트로트의 슬픈 정조가 전쟁 동원에 방해가 된다며 억지로 장조 기반의 '국민가요(군가)'를 만들게 강제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음악가들이 천황을 찬양하고 징병을 독려하는 살벌한 친일 음악을 쏟아냈습니다.
강연자가 스크린에 '국민가요'라는 글자가 띄워진 무대에서 강연하는 모습
더 뼈아픈 역사는 해방 이후에 벌어집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을 했던 음악가 현제명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미 군정청의 음악 고문으로 발탁되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한국 예술 교육의 산실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어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정작 우리가 획득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제인 '식민지 잔재 청산'에 완벽히 실패한 것입니다.
기원에 집착하며 우리가 원조라고 우기는 것은 공허한 민족주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굴절된 역사를 직시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정서가 억압받고 또 역설적으로 피어났는지를 통찰해야 합니다. 그것이 문화적 주권을 잃어버렸던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주의 인물 강헌이었습니다.
FAQ
'목포의 눈물' 가사에 항일 메시지가 숨어 있나요?
네, 2절 가사의 '300년 원한 품은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상징하며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한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프로듀서 이철은 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원한'을 암수가 사이좋다는 뜻의 '원앙'으로 속여 통과시키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트로트는 일본의 엔카를 그대로 베낀 것인가요?
음악적 문법(요나누키 단음계, 2/4박자) 자체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이식된 근대 음악의 산물이 맞습니다. 하지만 한국 특유의 폭발적인 감정선과 '농현(바이브레이션)' 같은 국악적 요소가 결합되며,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독자적인 정서의 장르로 진화했습니다.
일본 엔카(演歌)는 원래 어떤 음악이었나요?
본래 메이지 유신 시절 자유민권 사상을 대중에게 계몽하기 위해 부르던 진보적인 '연설가(演說歌)'였습니다. 이후 일본 군국주의의 탄압을 받으며 정치적 성격을 잃고, 남녀의 슬픈 사랑과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는 퇴폐적인 '염가(艶歌)'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