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세상을 고정된 '동일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만, 이는 끝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때로는 부당한 차별을 낳기도 합니다.
- 철학자 질 들뢰즈는 '차이'가 동일성에 앞서며, 우리가 아는 대상들은 끊임없는 차이의 흐름 속에서 잠시 출연한 잠재성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 세상을 고정된 주체가 아닌 유연한 '아장스망'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맹목적인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더 주체적이고 공정한 사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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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을 잘못 던져서 유리창이 깨졌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우리는 보통 야구공이 유리에 부딪힌 것을 '원인'으로, 창문이 깨진 것을 '결과'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만약 야구공을 더 약하게 던졌다면, 혹은 유리창이 더 강한 소재였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평소 익숙하게 사용하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판단은 사태의 일면만을 보여줄 뿐, 결코 완전한 판단은 아닙니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은 바로 이 지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 자체를 뒤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표층적인 현상 너머, 사물들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더 깊은 질서를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해한 선에서, 들뢰즈가 난해한 언어를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 핵심적인 사고의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동일성이라는 오랜 선입견
우리는 무언가를 인식할 때 암묵적으로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사고를 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가 있다면, 철수라는 완결적인 존재가 먼저 있고 영희라는 완결적인 존재가 따로 있으며, 그 두 존재가 성립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둘 사이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죠. 쉽게 말해, 존재를 일종의 단단한 울타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수는 '철수 울타리'가 깨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동일하게 존재하는 본질을 갖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울타리를 가진 대상들 사이에서 비로소 차이가 성립한다고 믿죠. 하지만 들뢰즈는 이것이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엄청난 선입견이라고 보았습니다.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들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파악하려다 보면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힙니다.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손흥민, 축구공, 골키퍼라는 동일한 대상들을 아무리 많이 끌어모아도, 하나의 사건 안에는 무한한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사태 전체를 온전히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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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코의 철학 Chungco 제공 영상 · 07:43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들뢰즈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동일한 대상들이 이미 있고 그 사이에 차이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가 이미 존재하고 그 흐름 속에서 특정한 조건을 갖추며 나타난 것이 동일성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동일성이 차이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철수라는 존재 역시 고정된 본질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차이의 흐름 속에서 잠시 '철수'라는 모습으로 출연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변화조차 '동일성을 가진 세포들의 교체'라는 식으로 다시 동일성의 틀 안에 가두려 합니다. 들뢰즈는 이 무한한 설명의 굴레를 빠져나오기 위해 차이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윤리적인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표준어라는 동일성의 울타리를 쳐놓고 생각하면, 사투리는 자연스럽게 '표준어가 아닌 것' 혹은 '고쳐야 할 세련되지 않은 말'로 취급받으며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차이 위주의 사고를 받아들이면,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흐름 속에서 어떤 것은 표준어로, 어떤 것은 사투리로 나타났을 뿐 결코 어느 한쪽이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히지 않습니다.
잠재성과 아장스망: 세상을 보는 새로운 단위
들뢰즈는 이 기묘한 차이의 장을 포착하기 위해 '잠재성(Virtua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토네이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토네이도라는 자기 동일적인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기 이전에도, 공기 중에는 기압과 수분의 특정한 흐름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흐름이 임계점을 넘었을 때 잠시 토네이도의 모습을 보일 뿐이죠.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적인 것은 현실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며 흐르고 있는 차이의 장을 뜻합니다.
이러한 잠재적인 장들의 배치를 가리켜 들뢰즈는 아장스망(Agencement, Assemblage)이라고 불렀습니다. 유튜버로서 영상을 만드는 저의 상황을 동일성의 관점에서 보면 '저라는 주체가 영상을 만든다'고 해석되지만, 아장스망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됩니다. 저는 유튜브 생태계라는 전체 아장스망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며, 저와 컴퓨터의 흐름이 교차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중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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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코의 철학 Chungco 제공 영상 · 14:17
이 아장스망의 사고에서는 주체와 객체, 세계를 이루는 존재의 기본 단위 자체가 유연하게 뒤바뀝니다. 고정된 성질과 정체성이 굳어지며 생긴 하나의 영토를 뒤엎는 이 과정을 들뢰즈는 '탈영토화'라고 불렀습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영토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전쟁 기계'의 잠재적 힘이 때로는 예술로, 때로는 해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극단적 해체를 경계하며: 탈영토화의 진짜 의미
들뢰즈는 우리가 하나의 완결적인 대상에 고정된 채, 똑같은 틀로 세상을 자기 복제하듯 해석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맞게 우리의 사고 또한 계속해서 열어두자는 것이 그의 철학이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편으로는 이 철학이 지나치게 해체적인 방향으로만 오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기존의 틀을 부수는 탈영토화만큼이나, 하나의 시스템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영토화'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영토화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전통과 권위를 비판만 하려는 태도는, 해체 자체를 신성시하는 또 다른 형태의 극심한 획일화이자 권위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하면서 들뢰즈 철학의 생산적인 메시지를 건전하게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특정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아주 강력하게 품고 있을 겁니다. 그 자연스러운 해석이 편리할 수는 있지만, 때로는 더 나은 변화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전자기기는 과연 하나의 독립된 사물일까요? 혹은 주변의 수많은 것들과 연결된 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아장스망의 일부일까요? 들뢰즈의 철학을 빌려, 오늘 하루쯤은 내 눈앞의 세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FAQ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성(Virtuality)'이란 무엇인가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대상이나 고정된 정체성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며 흐르고 있는 차이와 변화의 장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토네이도가 발생하기 전 대기 중에 흐르는 기압과 수분의 움직임 같은 것입니다.
'아장스망(Assemblage)'은 어떤 개념인가요?
고정된 주체나 객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이 유연하게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관계망이나 배치를 의미합니다. 인간과 컴퓨터가 결합해 새로운 창작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생태계도 하나의 아장스망입니다.
들뢰즈의 철학을 일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나요?
세상을 표준어와 사투리처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동일성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데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와 타인의 차이를 결점이나 오류가 아닌,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기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