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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로서 살아간다는 착각 (feat. 르네 지라르 '욕망 이론')
르네 지라르의 '욕망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 우러나오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인(매개자)을 모방하는 삼각형 구조를 띱니다. 현대 사회는 나와 비슷한 타인을 모델로 삼는 '내적 매개'가 지배적이며, 이는 끝없는 경쟁, 대상의 한정, 그리고 자기 기만이라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헛된 주체성의 환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수많은 타인의 욕망이 얽혀 있음을 뼈아프게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나답게 사는 것'과 '내 꿈을 실현하는 것'을 이념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며,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을 좇고 있다고 믿죠. 그런데 과연 그 욕망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일까요? 페이팔과 페이스북 등에 투자하며 세계 최고의 투자자로 꼽히는 피터 틸은 스탠퍼드 대학교 시절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를 만나 그의 사상에 푹 빠졌습니다. 지라르의 철학이 인간의 삶과 본성을 굉장히 날카롭게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구조적 시스템이 존재하며, 이를 개선하면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이상주의를 품습니다. 하지만 지라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불행을 향해 가기 매우 쉬운 파괴적인 본성을 지녔다고 보았습니다. 이 씁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시스템만 고치려 든다면, 사회는 결국 파국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지라르의 대표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통해,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자기'라는 환상을 깨부수는 인간 욕망의 진실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욕망의 삼각형: 우리는 결코 대상을 직접 욕망하지 않는다 지라르의 욕망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핵심 개념은 바로 매개자(Mediator) 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욕망이 대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돈을 원하면 나라는 주체가 돈이라는 대상을 직접 욕망한다고 믿는 식이죠. 하지만 지라르는 이러한 구도가 인간의 욕망을 전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직접적으로 대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중간에 매개자가 놓여 있는 '욕망의 삼각형' 구도를 띱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싶은 생리적 욕구처럼 내 안에서 순수하게 일어나는 직접적 욕망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그런 1차원적인 충족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거대하고 중추적인 욕망들은 대개 매개자에 의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연예인이 좋은 집에 살거나 특정 명품을 광고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 집에 살고 싶다", "저 가방을 사고 싶다"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그 대상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 대상 자체가 절대적으로 가치 있어서가 아닙니다. 순전히 그 연예인이 우리에게 이상적인 모델(매개자)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애초에 그 대상을 욕망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우리의 욕망은 철저히 타인에 대한 '모방'을 통해 생겨납니다. 외적 매개에서 내적 매개로: 가까워진 거리가 비극을 낳다 그런데 이 욕망의 삼각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크게 달라집니다. 지라르는 주체와 매개자 사이의 '거리'에 주목했습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구도를 외적 매개 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예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입니다. 돈키호테는 책 속의 위대한 기사 '아마디스'를 매개자로 삼아 기사가 되기를 욕망합니다. 하지만 아마디스는 돈키호테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득히 먼 존재입니다. 이처럼 거리가 멀면, 매개자가 어렴풋하게 보이기 때문에 주체가 욕망할 수 있는 대상이 매우 다양해집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라는 범접할 수 없는 이상적 존재를 매개로 삼아, 각자의 시야에 따라 이웃 사랑, 정의, 진실함 등 다양한 가치를 욕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인류의 문화에는 거대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종교와 신분제가 쇠퇴하고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과 가까운 세속적인 대상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주변 사람들, 즉 직장 동료, 친구, SNS 속 지인들을 모델로 삼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라르는 이를 내적 매개 라고 불렀습니다. 위대한 현대 소설가들은 바로 이 외적 매개에서 내적 매개로 넘어가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해 냈습니다. 내적 매개가 불러온 세 가지 파괴적 결과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을 매개자로 삼는 내적 매개는 외적 매개와는 완전히 다른, 매우 파괴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첫째는 경쟁과 증오심 입니다. 학교에서 전교 2등이 1등을 모델로 삼아 비슷해지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2등이 1등처럼 되는 유일한 방법은 1등을 짓누르고 추락시키는 것뿐입니다.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모방하면 근본적으로 같은 대상을 향해 피 터지는 줄다리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그들을 견제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둘째는 욕망 대상의 한정 입니다. 외적 매개에서는 매개자가 멀리 있어 다양한 대상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내적 매개에서는 매개자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입니다. 친구가 새로 산 시계, 동료가 이사 간 아파트처럼 내가 쟁취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 정확히 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딱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나는 매개자보다 열등한 패배자가 되었다는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셋째는 자의식 과잉과 자기 기만 입니다. 주체는 매개자를 은근히 증오하면서도 결국 그와 똑같은 것을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 가치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속입니다. "친구가 루이비통을 샀으니 나는 샤넬을 살 거야. 나는 저 사람과 다르게 순수하게 내 취향을 좇는 거야. " 현대인들이 그토록 주체성과 자율성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진짜 이유는, 역설적으로 타인과 너무나 비슷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작은 차별성을 만들어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속물근성에 불과하다고 지라르는 지적합니다. 수많은 타인을 모방하다 산산조각 난 자아 이러한 내적 매개의 굴레는 결국 우리의 삶을 자아의 분열 이라는 끔찍한 결말로 몰아넣습니다. 현대인들은 도처에 널린 수많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이는 곧 내 안에 무수히 많은 '욕망의 삼각형'들이 쪼개져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돈키호테가 오직 위대한 기사라는 거대한 삼각형 하나만을 품고 통일된 자아를 유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라르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이러한 분열된 자아를 가장 탁월하게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갑자기 현명하게 굴다가도 돌연 아둔해지고, 미친 듯이 격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주변 환경에는 이웃, 가족, 친구 등 너무나 가까운 매개자들이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순간 어떤 매개자를 떠올리느냐에 따라 그와 연동된 욕망의 삼각형이 작동하고, 잠시 후 다른 매개자를 떠올리면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혀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타인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파편화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자기 기만을 멈추고 현실을 직시하는 법 과연 우리는 이 끔찍한 분열을 피할 수 있을까요? 현대의 낭만주의 사조, 예를 들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처럼 아예 타인의 시선이나 매개적 욕망에 무감각한 인간상을 추구하며 이 현실을 회피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다들 타인에게 영향을 받으며 진실되지 못한 욕망을 품고 사니, 나만은 그 욕망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지라르는 이조차도 결국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려는 또 다른 형태의 속물근성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진정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길은, 자아의 해체를 있는 그대로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나는 남들과 달라. 나는 나의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내 안에는 수많은 타인의 썩어 문드러진 욕망들이 얽혀 있고, 나는 그 갈등 사이에서 분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시스템을 개혁하거나 SNS를 없앤다고 해서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는 본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욕망이 결코 온전한 내 것이 아님을 철저히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매개된 욕망에 무의식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끝없는 모방의 굴레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FAQ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의 욕망이 주체에서 대상으로 직접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매개자(모델)'를 거쳐 대상을 향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가 특정 대상을 원하는 이유는 그 대상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동경하는 누군가가 그것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외적 매개와 내적 매개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외적 매개는 돈키호테처럼 주체와 매개자의 거리가 멀어 직접적인 경쟁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 내적 매개는 직장 동료나 친구처럼 주체와 매개자가 같은 세계에 속해 있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질투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현대인들이 유독 '나다움'과 '주체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타인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이 똑같은 것을 욕망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자기 기만'에서 비롯됩니다. 타인과 작은 차이를 만들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우월성을 정당화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1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의 진짜 의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현대인들에게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내면의 주인이 되려는 강렬한 열망 때문입니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은 주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는 적극적인 태도에 있습니다. 외부의 시선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진정한 평정심의 비결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단군 이래 최고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현대인들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불안과 우울에 잠겨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요동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요? 아주 오래전, 전쟁터 한복판에서 로마의 한 황제가 남긴 일기장인 『명상록』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수많은 이들의 손끝에서 필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고풍 유행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절박하고도 철학적인 몸부림입니다.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의 통찰을 빌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화두를 해독해 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다시 황제의 일기장을 펼치는가 최근 『명상록』을 직접 손으로 쓰며 읽는 이른바 '필사'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눈으로 활자를 훑는 것을 넘어, 손으로 문장을 꾹꾹 눌러 쓰는 행위는 철학을 자신의 몸에 체화하려는 진지한 반성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고전을 처음 펼치면, 어쩌면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지도 모릅니다. "근면 성실하게 살아라", "개인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라"는 식의 문장들이 자칫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는 낡고 고리타분한 훈계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처했던 맥락을 이해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절대 권력을 쥔 황제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가장 화려하고 방탕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딱딱한 맨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검투사 경기를 거부했습니다. 완벽한 성인이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끊임없이 세속적 평판과 욕망에 흔들리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알았기에 자신을 가다듬으려 처절하게 노력했던 것입니다.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 했던 한 인간의 치열한 내면 기록이기에, 『명상록』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우주의 법칙과 운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스토아철학의 근저에는 이 우주가 신적인 이성(로고스)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우주가 선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명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흙수저로 태어난 것, 억울하게 고통받는 것조차 우주의 섭리이니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말은 자칫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찬국 교수는 이 개념을 종교적 맹신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인과법칙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연기설이나 스피노자, 니체의 철학과 맞닿아 있는 사상으로 해석합니다. 핵심은 주어진 운명에 대한 수동적인 체념이 아닙니다. 동양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처럼,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을 겸허히 인정하되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입니다. 일본의 전설적인 기업가 마쓰시다 고노스케의 일화는 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세 가지 은혜를 꼽았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 배우지 못한 것, 그리고 병약하게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끔찍한 저주로 여겼을 이 조건들을, 그는 오히려 부지런히 일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배우며, 평생 건강을 관리하는 성장의 발판으로 역이용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이자, 스토아철학이 요구하는 건전하고도 능동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선 스토아철학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실천적 도구는 바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 입니다. 국가의 경제 상황, 전쟁의 발발,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외적인 영역입니다. 이러한 외부 요인에 집착하여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 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영토는 바로 우리 '내면의 마음'입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것은 단지 통제 불가능한 '사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불행으로 해석할지, 아니면 나를 단련시키는 시련으로 해석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욕망과 잡념이 들끓는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철학자들은 끊임없는 수양을 강조한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주입하는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은 욕망의 무한한 충족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다는 이 오래된 진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체념이 아닌 가장 적극적인 삶의 참여 어떤 이들은 스토아철학을 두고 현실에 순응하라는 보수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내가 처한 현실이 우주가 명한 자리이니 그저 만족하고 살라는 체념의 철학으로 오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토아철학은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참여의 철학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세네카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던 정치가들이었습니다. 스토아철학은 인생을 거대한 연극 무대로 봅니다. 우주가 나에게 어떤 배역을 맡겼든, 그 배역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입니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라는 가르침 역시, 세상을 등지고 고립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대중의 얄팍한 인기나 맹목적인 비난은 무시하되,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지혜로운 이들의 충고와 내면의 이성적인 목소리에는 철저하게 귀를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명상록』이 우리에게 남기는 위대한 유산은, 세상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도 결코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단단함입니다. 바꿀 수 없는 외적 조건에 절망하는 대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바꿀 수 있는 나의 마음과 태도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닿은 가장 날카롭고도 위안을 주는 철학적 통찰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배역을 과연 어떤 태도로 연기하고 계신가요? 어쩌면 그 대답 속에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평정심의 열쇠가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FAQ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현실에 체념하라는 뜻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스토아철학의 운명관은 자신에게 주어진 외적 조건을 핑계로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불리한 조건조차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라는 '운명애(Amor Fati)'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사회 문제에도 무관심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스토아철학은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주창하며 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과 자체는 내가 완벽히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되, 자신이 속한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명상록』에서 경계하는 것은 대중의 얄팍한 인기나 근거 없는 비난에 휘둘리는 맹목적인 태도입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의 합리적인 충고나 내면의 이성적 판단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수용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0
'나다움'에 지친 현대인에게 BTS가 건네는 기이한 위로
BTS의 신보 'ARIRANG'은 귀에 꽂히는 멜로디와 멤버들의 뚜렷한 음색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당혹스러운 사운드를 선보였습니다. 이는 그간 강조해 온 '너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self)'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아를 해체하고 세계의 일부로 쉬어 가자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대중성과 화려함을 내려놓고 깊은 물속으로 침잠하는 이들의 실험은, '나다움'에 지친 현대인에게 새롭고 기묘한 위안을 선사합니다. 최근 방탄소년단(BTS)이 신보 'ARIRANG'으로 컴백했습니다. 발매 직후, 귀에 꽂히는 멜로디나 화려한 퍼포먼스 대신 영어 가사와 먹먹한 사운드로 채워진 앨범에 실망감을 표하는 반응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편으로는 이번 앨범을 들으며 긍정적인 의미로 크게 놀랐습니다. 결코 대중성을 놓친 실패작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당혹스러운 사운드 이면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대중성과 개성을 지워버린 당혹스러운 사운드 이번 앨범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명확하지 않은 멜로디와 뭉개지는 듯한 음성에 있습니다. 대중음악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귀에 꽂히는 사운드'가 희한하리만치 배제되어 있습니다. 타이틀곡 'Swim'을 비롯한 여러 트랙들은 강한 더블링과 화음을 통해 메인 멜로디의 음량을 오히려 줄여버렸습니다. BTS의 가장 큰 무기였던 멤버 개개인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음색을 의도적으로 죽여놓은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부르는 것인지조차 또렷하게 들리지 않는 이 실험적인 시도는, 엄청난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K팝 그룹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선택입니다. 첫 번째 이유: 거창함이라는 왕관을 내려놓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번 앨범에 담긴 첫 번째 메시지는 그동안 유지해 온 '거창함'을 내려놓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전 세계를 선도하며 압도적인 사운드와 거대한 퍼포먼스로 임팩트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왜 항상 대중의 귀에 즉각적으로 꽂히는 음악만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표를 던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화려한 자극성을 버리고 굳이 이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은, 역설적으로 BTS에게 또 다른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이유: 'Love Yourself'에서 '자아의 해체'로 두 번째이자 앨범을 관통하는 핵심 철학은 바로 '자아의 해체'입니다. 수록곡 'Into the Sun'에서 들리는 중첩된 목소리들은 본 이베르(Bon Iver)의 음악처럼 익명성과 자아의 붕괴를 상징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의 기준에 맞춰 수동적인 삶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너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밉니다. 우리는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해 끝없이 피곤한 노력을 이어갑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지적했듯, 우리는 세계와 나를 분리하고 '나'라는 영역 안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려 듭니다. 과거 BTS 역시 'Love Yourself' 시리즈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라는 위로를 건넸습니다. 하지만 이번 앨범은 오히려 "너 자신마저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오케스트라의 한 악기처럼 세계의 일부인 '우리'로서 존재해 보자는 제안입니다. 심해로 침잠하여 몸으로 연대하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가사와 사운드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타이틀곡 'Swim'에서 반복되는 "I just wanna dive"라는 구절은, 밝은 빛이 비치는 무대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두운 물속으로 깊이 침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Body to Body'라는 곡은 정신과 대비되는 '몸'의 개념을 끌어옵니다. 정신이 나와 세계를 분리하고 자의식을 형성한다면, 몸은 세계와 맞닿는 표면이자 그 일부입니다. 관객과 정신이 아닌 몸 대 몸으로 호흡하겠다는 것은 생의 굴레로부터 내려와 세계와 하나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Merry-Go-Round'에서 엿보이는 라디오헤드(Radiohead) 특유의 우울하고 왜곡된 정서 역시, 쳇바퀴 도는 일상에 대한 피로감과 휴식에 대한 갈망을 대변합니다. 아쉬움의 이면에 자리한 새롭고 기이한 위로 물론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유의 재치 있는 한국어 가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일곱 멤버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없다는 점은 팬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꺼림칙한 느낌이 들거나 아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첩되고 기계적으로 왜곡된 목소리가 주는 나름의 편안함이 분명 존재합니다.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어둡고 침침하지만 있는 그대로 가라앉을 수 있는 심해의 사운드를 통해 우리는 기이한 위안을 얻습니다. 어쩌면 이 당혹스러운 앨범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형태의 휴식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 낯선 음악 속에서 과연 어떤 위로를 발견하셨나요? FAQ 방탄소년단의 신보 'ARIRANG' 사운드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존의 화려하고 귀에 꽂히는 멜로디 대신, 자아를 해체하고 세계의 일부로 쉬어 가자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먹먹하고 중첩된 사운드를 선택했습니다. 이번 앨범이 과거의 'Love Yourself' 메시지와 어떻게 다른가요? 과거에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며 개인의 가치를 강조했다면, 이번 앨범은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마저 내려놓고 익명성 속에서 편안함을 찾자는 새로운 위로를 건넵니다. 한국어 가사나 멤버들의 뚜렷한 음색이 줄어든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K팝 그룹의 강점인 개성과 재치 있는 가사가 줄어든 점은 팬들에게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곡되고 중첩된 목소리 자체가 주는 기이한 편안함과 휴식의 의미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0
억지 긍정에 지친 당신을 위한 철학적 균형 잡기
현대 사회는 행복을 의무로 만드는 '긍정성 과잉'에 빠져 있으며, 이에 지친 사람들은 오히려 극단적인 체념과 부정성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 등은 희망을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고통의 원인으로 보았지만, 희망을 완전히 버리는 염세주의는 현실의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일 수 있습니다. 맹목적인 긍정과 완전한 부정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전한 희망'을 품는 것이 진정한 내면의 힘입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긍정성 과잉' 입니다. 1990년대 미국에서 긍정 심리학이 등장한 이후, 인간의 심리는 단순히 병적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목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행복이 지금처럼 객관적인 목표나 의무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행복하지 않으면 곧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라고 느끼기에 이르렀습니다. 행복마저 일종의 과제이자 부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긍정성 과잉은 역설적으로 강력한 부정성을 탄생시켰습니다. 끝없는 성공과 행복을 주입받은 사람들은 남들의 기준을 따라가느라 지쳐버렸고, 결국 "어차피 인생은 고통일 뿐"이라는 체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긍정의 강요가 오히려 삶의 가치를 부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문제를 낳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맹목적인 긍정성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과연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왜 우리는 희망에 지쳐버렸는가 노르웨이의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의 저서 『삶은 무엇으로 회복하는가(A Philosophy of Hope)』는 우리가 당연하게 긍정적으로 여겨온 '희망'의 본성에 대해 다각도의 질문을 던집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희망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조차, 긍정성을 숭상하는 현대 사회의 사고방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온갖 악의 근원이 빠져나온 그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희망'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인들 역시 희망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고 해석했습니다. 니체에게 희망이란 달콤한 겉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해 헛된 기대를 품게 만들고, 결국 더 큰 좌절감을 안기는 맹목적인 악이었습니다.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도처에 널려 있지만, 현실이 그에 뒤따르지 못할 때 현대인들이 겪는 좌절감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철학자들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희망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대'로 보았고, 스피노자는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섞여 있기에 희망에는 항상 슬픔이 동반된다고 통찰했습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희망이 불필요한 욕망을 부추겨 좌절을 부른다며, 긍정적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을 멈추고 그저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긍정성의 압박에 지친 현대인들이 최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서 큰 위안을 얻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염세주의는 과연 정답일까 하지만 저는 한편으로는 이런 염세주의적인 철학에 일부 꺼림칙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와 희망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은, 어쩌면 나약한 정신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강인하고 굳건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바라는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아 순간적으로 실망하더라도, 그 실망이 삶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내 훌훌 털고 일어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용기를 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마음의 힘입니다. 염세주의적 철학은 좌절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초에 모든 희망을 포기해 버립니다.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가치가 없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닫아버리는 태도는 완전한 이성이라기보다는 삶의 불확실성에 겁을 먹고 전전긍긍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맹목적 긍정과 건전한 희망의 차이 라르스 스벤젠 역시 희망을 미래에 대한 잘못된 집착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건전한 희망의 핵심은 자신이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이 우주에 얼마든지 펼쳐져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지전능하다면 희망은 필요 없습니다. 욕망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스벤젠은 극단적인 우익이나 좌익 지지자들이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맹신'을 그 예로 듭니다. 특정한 변화만 주어지면 완벽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확신은 언뜻 극단적인 긍정성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제한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는 오히려 극단적인 부정성이자 '희망의 상실'에 해당합니다.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줄타기하기 결국 우리는 긍정성과 부정성의 중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반대로 모든 것이 실패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갈 용기를 잃습니다. 완전한 긍정성도, 완전한 부정성도 우리를 바보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긍정과 부정이 결국 삶을 이루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집착과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영상에서는 스벤젠의 철학을 빌려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스벤젠이 책에서 종교적 희망을 무척 비판적으로 다룬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적 희망이야말로 무한한 우주 속에서 유한한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용기가 되어준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렇듯 철학적 독서란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통해 관점을 확장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희망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해악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삶에 꼭 필요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쉽지 않은 세상에서 여러분만의 답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FAQ 긍정 심리학의 발달이 우리 삶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나요? 긍정 심리학이 행복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서, 현대 사회는 행복을 일종의 의무나 과제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곧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라는 강박과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체념이나 부정성에 빠지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왜 희망을 부정적으로 보았나요? 니체는 희망을 헛된 기대를 품게 만들어 인간을 유혹하고 결국 더 큰 좌절감을 안기는 맹목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쇼펜하우어 역시 인간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음으로써 불필요한 욕망이 부추겨지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고통과 좌절이 찾아온다며 희망을 버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라르스 스벤젠이 말하는 '건전한 희망'이란 무엇인가요? 건전한 희망이란 자신이 바라는 결과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면서도, 긍정적인 평가와 기대를 잃지 않고 현재 할 수 있는 노력을 묵묵히 해나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맹목적인 집착이나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와는 다릅니다. 유토피아적 맹신이 오히려 희망의 상실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다고 믿는 유토피아적 맹신은 표면적으로는 극단적인 긍정성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능한 점진적이고 제한적인 변화의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갈아엎으려 한다는 점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부정성이자 희망의 상실로 볼 수 있습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0
왜 똑똑한 개인도 군중에 속하면 멍청해질까
이성적인 개인이라도 군중 속에 들어가면 익명성과 집단의 힘에 취해 논리적 추론 능력을 잃고 동물적 본성에 지배받게 됩니다. 군중을 움직이는 지도자들은 복잡한 객관적 논리가 아니라 확언, 반복, 단순화, 그리고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대중의 무의식을 장악합니다. 정답만을 주입하는 수동적인 교육은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는 군중을 양산하며, 이는 현대 사회가 극단적인 파벌로 분열되는 근본 원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대중이 강력한 힘을 갖는 사회입니다. 과거의 역사가 소수 엘리트 계급의 결정에 의해 흘러갔다면, 이제는 투표와 여론을 통해 군중이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강해진 군중의 영향력은 과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을까요? 1800년대 후반 프랑스의 사상가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은 그의 저서 『군중심리』를 통해 매우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합니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군중은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개인과는 완전히 다른 심리적 특성을 갖게 된다 는 것입니다. 개인은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군중이 되는 순간 그 이성의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개인이 군중이 될 때 잃어버리는 것 군중은 이성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인들이 모이면, 전체는 이상하게도 개인 고유의 성질을 잃어버립니다. 르 봉은 그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집단의 힘'입니다. 현대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이성을 담당하는 신피질보다 생존 본능과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훨씬 더 오래되고 강력한 역사를 갖습니다. 다수가 모여 거대한 힘을 형성하면 개인 단위에서 작동하던 이성의 통제선이 무너지고 억눌려 있던 동물적 본성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장애물을 무작정 제거하려 들거나, 세계를 '우리 편'과 '적'으로만 나누는 흑백 논리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전염'입니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모방하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군중 속의 개인은 혼자일 때의 고유한 관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변의 감정과 행동에 강력하게 전염됩니다. 특정 간식이 유행할 때 길게 줄을 서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이 행동은 누구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일어난 것일까요? 군중은 숙고 끝에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누군가 줄을 서니까 나도 서고, 그것을 보고 또 다른 누군가가 동참하는 전염의 연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암시'입니다. 개인의 이성이 배제된 군중은 명확한 목표 없이 들끓는 에너지만을 가진 상태입니다. 방향성을 상실한 이들에게 누군가 강력한 메시지를 주입하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에너지가 한곳으로 쏠리게 됩니다. 넘쳐나는 유동성이 사소한 계기로 특정 금융 섹터에 광적으로 집중되는 현상과도 같습니다. 권위와 이미지는 어떻게 논리를 압도하는가 이렇듯 이성을 잃고 무의식에 지배받는 군중은 역설적으로 강력한 지도자를 원합니다. 동물적 본성은 유약함을 경멸하고, 압제적이더라도 확실한 구심점을 제공하는 대상에게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군중을 지배하는 이들은 어떤 기술을 사용할까요? 이들은 결코 복잡한 논리나 통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중간 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확언'을 사용하고, 이를 집요하게 '반복'하여 군중의 무의식에 암시를 심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단순화'와 '이미지화'입니다. 모방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상은 군중 안에서 전염력을 얻지 못합니다. 파리에서 독감으로 5천 명이 사망한다는 통계 수치보다, 에펠탑이 무너져 500명이 죽는다는 단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가 군중의 마음을 훨씬 더 크게 뒤흔듭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고 근거를 요구하는 순간, 그 대상은 군중을 상대로 한 권위를 잃어버립니다. 진정으로 대중이 선호하는 대상은 합리적인 근거 없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단순하고 상징적인 이미지입니다.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명백한 모순 앞에서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애초에 이성적 근거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인 군중을 길러내는 교육의 함정 제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대목은 바로 '교육'에 대한 비판입니다. 르 봉은 군중의 비합리적 심리가 형성되는 데 당시의 교육 제도가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1800년대 후반 프랑스의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창의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가르치지 않고, 오직 자격증 획득과 암기 위주의 학습만을 강요했습니다. 스스로 기획하고 생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결국 국가나 사회에 생계를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르 봉은 이러한 교육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능력을 상실한 채 불만만 가득 찬 대중을 양산하며, 이들이 결국 자극적인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위험한 군중이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지식만 주입받은 엘리트층 역시 위기가 닥쳤을 때 우유부단함에 빠져 사회를 제대로 이끌지 못하게 됩니다. 모두가 정해진 시험과 표준화된 자격증에만 매달리는 이 묘사는, 놀랍게도 지금 우리 사회의 씁쓸한 현실과 완전히 맞닿아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파벌, 그리고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 물론 르 봉이 군중을 맹목적이고 부정적인 존재로만 본 것은 아닙니다. 군중 특유의 강력한 에너지가 올바른 방향으로만 설정된다면 개인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역사적 성취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정보와 매체가 난립하면서 군중이 하나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집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더욱이 오늘날은 알고리즘의 발달로 인해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수많은 파벌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다양성의 증가로 보일지 모르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소통이 완전히 단절된 채 맹목적으로 충돌하는 '파편화된 군중'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과연 르 봉의 분석대로 군중은 영원히 비이성적인 존재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각기 다른 파벌 사이에서 논리적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겉만 번지르르한 헛수고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성 이외의 전혀 새로운 연결 방식을 찾아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 안의 군중은 과연 어떤 본성을 숨기고 있을까요? FAQ 개인이 군중이 되면 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나요? 개인이 군중 속에 섞이게 되면 익명성과 집단의 거대한 힘을 빌려 평소 억누르던 무의식적이고 동물적인 본성이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 근거를 저울질하는 논리적 추론 능력을 잃고,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 논리에 의존하게 됩니다. 지도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군중을 조종하나요? 지도자들은 복잡하고 객관적인 논리를 피합니다. 대신 타협 없는 '확언'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며, 메시지를 극도로 '단순화'합니다. 특히 통계나 이성적 근거보다 시각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활용하여 대중의 무의식을 장악합니다. 르 봉은 왜 암기 위주의 교육 제도를 비판했나요?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대신 정답만을 주입하는 교육은 국가나 사회 시스템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르 봉은 이러한 교육이 결국 불만만 쌓인 채 자극적인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군중을 양산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0
삶이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
인류의 역사는 주류 세력이 영원히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변방의 언더독이 새로운 규칙으로 판을 뒤집어 온 전복의 과정입니다. 동서양 고전은 타인의 기준에 맞춘 게임에서 기꺼이 패배자가 될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자신만의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타인의 삶에서 새로운 가치를 배우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않으며, 기존의 통념에 반항할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의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역사는 늘 주류 세력이 영원히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변방의 언더독(Underdog)이 판을 뒤집는 전복의 과정으로 가득합니다. 고대 로마 제국이나 기독교의 탄생이 그러했듯, 남들이 정한 게임에서 기꺼이 약자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이 결국 새로운 판의 승리자가 되곤 합니다. 오늘 다룰 책 『삶이 묻고 고전이 답했다』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과연 우리는 남들이 정해놓은 획일화된 트랙 위에서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글에서는 승리의 기준을 재정의하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는 방법을 동서양 고전의 지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정해진 게임'의 승리만을 갈망하는가 현대 사회는 전문직, 대기업, 핵심지 아파트, 외제차와 같은 획일화된 승리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단일한 게임의 승리자가 되기를 선망하죠. 하지만 누군가는 이 게임에서 기꺼이 약자가 되기로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같은 것을 추구하다가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고전 속 영웅들의 선택 역시 이와 결을 같이 합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귀환 길에 여신 칼립소로부터 불멸과 젊음이라는 '손쉬운 승리'를 제안받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가장 완벽한 보상이었죠.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고통과 노화가 따르는 필멸자의 삶을 선택합니다. 불멸의 쾌락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자신만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 결코 내 삶의 진정한 승리를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현명한 약자의 세 가지 무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존의 억압적인 게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판을 짤 수 있을까요? 책에서 발견한 현명한 약자의 삶을 사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타인에게서 새로운 게임의 가능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근대적 강박에 빠져 맹목적으로 문명을 건설하려던 크루소와 달리, 야만인으로 여겨졌던 방드르디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순수한 내면의 행복을 누립니다. 크루소의 문명이 뜻하지 않게 파괴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방드르디가 누리던 '다른 게임'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나의 게임에만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가치관에 귀를 기울일 때, 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명의 편리함과 내면의 행복은 완전히 별개의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공자와 맹자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불가능하다며 물러나는 태도를 '자포자기(自暴自棄)'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의지를 상실하는 것만이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에너지를 갉아먹는 게임판 안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갈 의지를 차단하는 것 역시 자신을 해치는 일입니다. 셋째, 기존의 통념과 억압에 반항하는 용기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기 위해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반항했습니다. 끔찍한 형벌 속에서도 그는 사과나 타협을 시도하는 대신, 자신만의 선견지명으로 제우스를 압박해 결국 폭력이 아닌 원칙과 정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옳다고 강요받는 맹목적인 게임을 거부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마찰이 따르지만, 이는 진정한 승리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입니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포기할 용기 인생은 수많은 게임이 동시에 펼쳐지는 거대한 장입니다. 하나의 길에서 패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여러 길을 모두 다 챙기려다 보면, 결국 어떤 길에서도 끝까지 가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삶에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는 과정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기꺼이 패배자가 될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나만의 비전을 키우고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 올라탈 수 있습니다. 하나의 쓰라린 경험이 오히려 또 다른 위대한 성취의 전제 조건이 됨을 마음속에 새겨야 할 때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동서양 고전을 통해 '약자로 살아갈 용기'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지금 어떤 게임을 플레이하고 계신가요? 그 게임의 승리가 정말로 여러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FAQ 책 『삶이 묻고 고전이 답했다』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김헌, 김월회 교수가 공저한 책으로, 동서양 고전에 담긴 지혜를 바탕으로 개인의 성장, 처세술, 감정 조절 등 삶의 실용적인 질문들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대중 인문서입니다. 남들이 선호하는 길을 가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역사와 고전은 획일화된 기준에서 약자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이 결국 자신만의 분야에서 진정한 성취를 이룬 사례를 수없이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비전을 찾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해치고 버린다는 '자포자기'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단순히 모든 의지를 상실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억압적인 게임판 안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갈 의지를 포기하는 태도 역시 자포자기에 해당한다고 고전은 경고합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0
연애와 결혼이 내 자유를 빼앗는다고 느껴질 때
로맨틱한 사랑은 생물학적으로 외부 위협에 맞서기 위한 유전자 결합 과정에서 유래했으며, 그 이면에는 투쟁과 죽음의 흔적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유전적 다양성을 위한 파괴적인 '광적인 사랑'과 미숙한 아기를 길러내기 위한 '안정적인 사랑' 사이에서 일상이 위협받는 본능적 두려움을 느낍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역으로 무한한 자유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한계를 수용하고 성숙해지는 필수적인 관문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문화는 사랑을 장밋빛으로 포장해 놓았습니다. 로맨틱한 기념일과 감동적인 영화 속 열애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사랑이란 오직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인류의 숱한 신화와 역사 속에서 사랑은 종종 파멸과 동일시되곤 했습니다. 아폴론은 사랑에 눈이 멀어 비이성적인 집착을 보였고, 당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 나라를 파국으로 이끌었죠.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 역시 사랑이라는 거대한 종적 힘 앞에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 경고했습니다. 사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사랑 앞에서 꺼림칙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낍니다. 과연 우리는 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토록 두려워하는 걸까요? 진화생물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사랑이 본질적으로 무서울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해독해 봅니다. 생존과 파멸의 경계에 선 투쟁, 사랑 로맨틱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성(Sex)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은 성관계가 세균, 바이러스, 기생충 등 외부 침입자에 맞서는 방어 기제로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유전자를 섞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냄으로써 침입에 대한 대항력을 높이는 보이지 않는 전쟁인 셈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겉보기엔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의 과정 이면에는 생명의 존속과 파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사투의 흔적 이 서려 있습니다. 실제로 자연계에서 번식 활동은 종종 직접적인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수컷 하마들은 짝을 차지하기 위해 잔혹한 싸움을 벌이다 목숨을 잃고, 호주의 안테키누스(Antechinus) 수컷들은 번식기에 극심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며 교미에 집착하다 면역 체계가 무너져 죽음을 맞이합니다. 인간에게 이 정도로 치명적인 집착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우리의 직감은 사랑과 번식이라는 행위가 죽음과 매우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광기와 일상의 파괴 과학철학자 마이클 루스(Michael Ruse)는 로맨틱한 사랑을 초기에 나타나는 '광적인 사랑'과 오래 지속되는 '안정적인 사랑'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광적인 사랑은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진화적 경향 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전병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익숙한 가족과 친지라는 좁은 집단을 떠나 완전히 낯선 타인에게 미친 듯이 끌리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이 말했듯, 사랑의 광기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아에 잡아먹히는 듯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날뛰는 자아만으로는 일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인간의 아기는 포유류 중에서도 가장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오랜 기간 부모와 공동체의 극진한 보살핌을 요구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에게는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일상을 지켜내는 또 다른 유형의 '안정적인 사랑'이 발달했습니다. 결국 광적인 사랑이 그토록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애써 구축해 온 안정적인 일상과 사회적 규칙을 단숨에 파괴해 버릴 수 있는 맹목성 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달콤한 겉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 끝이 어떤 파멸로 흘러갈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미지의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신적인 자유의 포기와 인간적 한계의 수용 사랑은 필연적으로 구속의 경험입니다. 상대와 배타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만날 가능성을 차단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수많은 개인적 목표들을 양보하며 관계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사랑 역시 나의 인생 폭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력감과 두려움을 유발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을 무조건 자유의 박탈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자유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결국 여러 선택지 중 우선순위를 정하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 나머지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는 자유의 완전한 박탈이 아니라, 가상적인 신적 자유에서 제한적인 인간적 자유로 내려오는 자연스러운 강등 일 뿐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본래 타고난 '제한된 자유'를 다루는 탁월한 연습 과정입니다. 혼자 내면에서 갈등할 때와 달리, 타인이라는 명확한 존재와 부딪히며 내가 진정 원하는 우선순위를 뼈저리게 조정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유가 본질적으로 한계 지어져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때, 사랑이 요구하는 구속은 오히려 건강한 삶의 계산이 됩니다. 불확실성 너머로 확장되는 자아 사랑은 내 의지를 넘어서 나를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가보지 않은 낯선 영역으로 나를 이끕니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강제성과 두려움이 동반되죠. 하지만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을 경험하며, 더 넓은 의미의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관계가 내 인생에 축복이 될지 독이 될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불확실성 자체가 두려움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이 불확실성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발견하는 가장 위대한 의미의 뒷면에는, 항상 이렇듯 꺼림칙한 두려움과 새로운 발견이 맞닿아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동반하는 이 당혹스러운 두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FAQ 왜 진화론적으로 사랑과 번식이 생존의 위협이 되나요? 생태계에서 번식은 한정된 자원을 둔 치열한 투쟁이자 외부 기생충 등에 대항하기 위한 유전자 조합 과정입니다. 자연계의 많은 동물들이 짝짓기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나 치명적인 신체 손상으로 죽음을 맞이하듯, 사랑의 기저에는 생존과 파멸을 오가는 사투의 흔적이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왜 일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과학철학자 마이클 루스에 따르면, 초기의 '광적인 사랑'은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익숙한 환경(가족, 친지)을 떠나 완전히 낯선 사람에게 끌리도록 설계된 진화적 메커니즘입니다. 이 맹목적인 충동이 우리가 애써 유지해 온 일상의 규칙과 안정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유발하게 됩니다. 사랑이 내 자유를 빼앗는 것 같아 불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랑을 무조건적인 자유의 박탈로 여기는 것은, 인간이 애초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신적인 자유'를 과대평가한 결과입니다. 인생은 본래 우선순위에 따라 무언가를 포기하는 과정이며,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가치를 선택하고 제한된 자유를 수용하는 건강한 성숙의 과정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0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현실적인 타협이 필수적입니다. 로마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찰처럼, 타인의 판단을 억지로 바꾸려 하기보다 세상의 틀에 나의 콘텐츠를 맞추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기 싫은 지루한 루틴을 기꺼이 감내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지켜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살아가는 고충을 겪고 계실 겁니다. 저 역시 철학 공부를 하며 먹고사는 것이 꿈이었고, 현재 철학 유튜버라는 직업을 통해 그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자아실현과 맞닿아 있는 마이너한 분야에서 크리에이터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아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의 냉혹한 균형 을 찾아야만 합니다. 오늘은 제가 지난 8년간 크리에이터로 살아남으며 깨달은, 좋아하는 일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타협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착각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은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먹고살 수 있는 매력적인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저 또한 대학생 시절, 딱딱하고 생동감 없는 철학 수업에 아쉬움을 느끼고 '철학 안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온라인 철학 고전 강독 등을 통해 일반 직장인만큼의 수익을 창출하는 경험을 했고, 전업 유튜버의 길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업의 세계에 발을 들이자마자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올리고 싶은 영상만 올려서는 결코 수익 창출도, 조회수 확보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취미로 할 때는 내가 공부한 것을 자유롭게 올리면 그만이었지만, 직업으로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세상이 원하는 문법에 나를 맞춰야만 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뼈아픈 조언 유튜브의 문법을 공부하며 제가 깨달은 것은, 세상이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판단을 바꾸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 우리는 타인을 설득하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타인의 생각과 기호를 내가 원하는 대로 완전히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사람들이 내 철학 이야기를 무조건 좋아하게 만들 거야'라고 고집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직업 세계에서는 결국 실적과 수익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미 주어져 있는 세상의 틀과 대중의 수요에 나의 콘텐츠를 세팅하려는 건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점, 50 대 50의 법칙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원하는 것에만 100% 맞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제가 조회수만을 위해 자극적이고 가벼운 영상만 만든다면, 애초에 철학 공부를 하며 살고 싶었던 저의 자아실현 욕구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게 되는 것은 결코 제가 원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끝없는 고민 끝에 나의 이상과 현실의 수요 사이에서 50 대 50의 비율 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탐구하고 싶은 주제를 절반 정도 가져가고, 나머지 절반은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을 살다 보면 이 비율이 2 대 8, 심지어 1 대 9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쓴 책들 중 상당수도 순전히 제가 100% 원해서 쓴 것이 아니라, 출판사가 원하는 대중적인 포인트와 제목에 맞춰 타협하며 완성한 결과물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견디는 철학적 태도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일의 '작은 파이'를 지켜내기 위해, 저는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루틴과 하기 싫은 잡일들을 기꺼이 참아냅니다. 유튜브 생태계를 조사하고, 출판사와 미팅을 하고,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련의 과정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나' 싶어 당혹스러운 현타가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막대한 부나 우주적 특권을 타고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운명의 존재 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고 싶은 순간을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하기 싫은 일을 감내하며 살아갑니다. 남들이 겪는 수고를 나만 겪지 않으려 하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만큼의 하기 싫은 일들을 참아냈을 때, 내 직업 안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축복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자아실현은 맹목적인 자유가 아니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무거운 현실의 무게 속에서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과연 어떤 현실적인 수고를 감내하고 계신가요? FAQ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돈을 벌 수는 없나요? 타고난 부가 있지 않은 이상, 현실적으로 좋아하는 일만 100% 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직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세상의 수요에 나의 콘텐츠를 맞추는 현실적인 타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중의 수요에 맞추다 보면 원래 하려던 일의 의미를 잃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균형'이 중요합니다. 철저히 대중에게만 맞추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므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과 대중이 원하는 일의 비율을 50 대 50(때로는 20 대 80)으로 조율하며 자신만의 중심을 지켜내는 것이 크리에이터의 핵심 역량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견디는 마음가짐은 무엇인가요? 자신이 특별한 특권을 타고나지 않은 평범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감내하며 살아갑니다. 이 수고를 당연한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축복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원본 영상 보기
26.04.20